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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반도백제의 도읍이전 – 최초주장

윤여동 2023. 10. 7. 13:29

윤여동설 반도백제의 도읍이전 최초주장

 

 

 

  지금 많은 사람들은 삼국사기 기록 속 백제의 흔적들을 한반도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백제의 첫 도읍 위례성(慰禮城)과 한성(漢城)을 한반도 서울 부근에서 찾고 있고, 남한성(南漢城)을 경기도 광주(廣州) 부근에서 찾고 있으며, 웅진(熊津)을 충남 공주라 하고, 마지막 도읍 사비(泗沘)를 충남 부여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고, 충남 공주에서 백제 무령왕릉이 발견되었으며, 부여에서 창왕명석조사리감과 창왕명사리기명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서,百濟 武廣王 遷都 枳慕地 新營精舍 以貞觀 十三年 歲次 己亥 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帝釋精舍(백제 무광왕이 지모밀 땅으로 천도하고 정사()를 새로 지었다. 그런데 정관 13(A.D.639) 기해년 겨울 11월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제석정사에 불이 났다.)”라는 기록이 발견되자 학자들은 무광왕을 무왕과 동일인으로 보아 백제 말기에 무왕이 다시 한번 도읍을 옮겼거나, 옮기려고 추진하다가 중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부여에서 멀지 않은 전북 익산 왕궁면(금마)백제의 흔적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익산 미륵사지를 발굴하기도 했고, 쌍릉을 발굴했으며, 제석사지를 발굴했고,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사리봉안기가 출토되기도 했는데, 여전히 명쾌한 결론을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제석사지 발굴로 관세음응험기 기록의 정확성이 확인되었고,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는 백제 왕후가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가 아니라 좌평 사탁적덕의 딸이라는 사리봉안기 명문이 출토되었으며,

  또 중국 사서인 남제서 등에는 백제에 모도왕(牟都王)이라는 왕이 있었고, 이가 동성왕의 할아버지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에 모도왕이라는 인물이 왕위에 오른 적이 없고, 또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되어 있는 무광왕(武廣王)이라는 인물이 백제의 왕위에 오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식의 전환을 하고 백제 역사를 세밀히 들여다보면, 온조백제의 건국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 북쪽 지금의 진황도 도산(都山) 부근으로 나타나고, 그 부근에서 도읍을 옮겨가며 왕조를 이어오다가 그곳 대륙에서 멸망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분명 한반도에도 백제의 흔적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나타나는 백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대륙에서 온조백제가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이 한반도로 와서 다시 백제를 재건했던 것일까?

  아니면 대륙의 온조백제와는 다른 백제가 한반도에 별도로 존재했던 것일까?

  그리하여 필자는 온조백제의 왕위계승을 세밀하게 분석한 결과 대륙의 온조백제에서 8대 고이왕 때부터 왕실이 장자파와 차자파로 나뉘어 왕위다툼을 벌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온조백제 중기 왕위다툼기의 왕위계승도]

 

 

  나이 어린 7대 사반왕이 왕위에 오르자 사반왕의 7촌 재당숙부였던 8대 고이왕이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10대 분서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 당하자, 7대 사반왕의 동생의 아들이었던 11대 비류왕이 왕위를 장자파로 가져오게 된다.

  그랬다가 11대 비류왕이 죽자 12대 계왕이 왕위를 다시 차자파로 되돌렸고, 13대 근초고왕이 왕위를 다시 장자파로 가져가게 된다.

  그러자 12대 계왕의 아들 무광왕(武廣王, 필자주 :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고, 무광은 시호일 것이다)이 강력하게 반발하게 되어, 13대 근초고왕과 무광왕은 온조백제(대륙백제)의 왕좌를 놓고 이후 무려 20여년간 다투게 된다.

  그랬다가 365년경 최종으로 근초고왕이 승리하게 되어 근초고왕은 대륙 온조백제의 왕위를 이어가게 되고, 패한 무광왕은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건너와서 지모밀 땅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백제라 하게 되는 것이다.

 

대륙백제 왕 중에 5대 초고왕과 13대 근초고왕, 6대 구수왕과 14대 근구수왕 그리고 4대 개루왕과 21대 근개루왕(개로왕이라고도 한다)과 같이 선왕의 시호에 ()”자를 붙여 시호를 정했던 것은 이들이 장자파라는 의미이고, 21대 근개루왕은 장자파나 차자파나 모두 4대 개루왕의 혈손들이니 서로 반목하지 말고 통합하자고 주장했던 왕이었기 때문에 붙여준 시호였다.

 

  이리하여 세상에는 대륙백제(온조백제)와 반도백제(무광왕백제) 두 개의 백제가 발해 북쪽 대륙과 한반도에 각각 존재하게 되고, 대륙백제는 중국 북조의 나라들과 교류하게 되고, 반도백제는 중국 남조의 나라들과 교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랬다가 100여년이 흐른 반도백제 모도왕(牟都王) 때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통합하게 되고, 모도왕은 손자인 모대를 대륙으로 보내 왕위에 올리게 돠는데, 이가 곧 대륙백제 동성왕이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남제(南齊)에서 동성왕 모대에게 작위를 줄 때 죽은 할아버지 백제 모도왕(牟都王)의 작위를 계승하게 한다고 하면서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의 작위를 보내오게 되는 것이다.

  그랬다가 대륙백제 동성왕이 시해 당하자 당시 반도백제의 남제왕(男弟王)은 다시 동생인 사마를 대륙으로 보내 왕위에 올리는데 이가 곧 대륙백제 무령왕으로서 무령왕은 양나라로부터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 백제왕의 작위를 받게 되고, 이때 받은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의 작위가 무령왕릉 지석에 새겨져 있었다.

  이후 대륙백제의 왕위는 모두 반도백제 모도왕의 후손들이 오르게 된다.

 

  그렇다면 반도백제의 도읍은 어디였으며 언제,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관세음응험기]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봉안기 : 가람(절)을 창건한 백제왕후가 좌평 사탁적덕의 딸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를 보면,“百濟 武廣王 遷都 枳慕地 新營精舍(백제 무광왕이 지모밀 땅으로 천도하고 새로이 절을 지었다)”는 기록 속에서 반도백제의 첫 도읍지가 지모밀(枳慕密)”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의 전북 익산 왕궁면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곳 왕궁리에 왕궁터가 있고, 제석사지가 발굴되었으며, 익산 미륵사지에서 대왕폐하(필자주 : 반도백제 남제왕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때 남제왕은 황제를 칭했던 듯하다)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사리를 봉안한다는 사리봉안기도 출토되었고, 왕릉급인 익산쌍릉도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공주 공산성(서문)]

 

 

[공주 무령왕릉 출토 금제관장식]

 

 

[공주 송산리고분군 중 무령왕릉 내부]

 

 

  그런데 양서나 남사 백제전에는 도성(都城)을 고마(固麻)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반도백제는 도읍을 지모밀(枳慕密) 땅으로부터 고마(固麻)로 옮겼던 것으로 판단되고,

 

[부여 능산리 출토 창왕명석조사리감]

 

 

 

[ 부여 왕흥사지 출토 창왕명 사리기와 명문] 

 

 

 

[부여 능산리 출토 금동대향로]

 

 

[부여 출토 사택지적비]

 

  또 북사 백제전에는 그 도성(都城)은 거발성(居拔城)으로 고마성(固麻城)이라고도 부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다시 고마성에서 거발성으로 도읍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의 기록이 아닌가 싶고,

  수서 백제전에는 그 나라의 도읍은 거발성(居拔城)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마성(固麻城), 거발성(居拔城)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고마성(固麻城)은 충남 공주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인데, 이는 지금도 공주에는 고마나루라는 지명이 전해지고 있고, 백제왕성이라는 공산성과 백제왕궁터, 백제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 등 백제의 유적 유물이 많이 있기 때문이고,

 

  거발성(居拔城)은 충남 부여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는 부여 능산리고분군이 공주의 송산리고분군 보다 후대에 조성되었기 때문이고, 부소산성, 나성, 건물지 등  도읍지로서의 격에 어울리는 유적, 유물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반도백제의 초기도읍은 건국지인 지모밀(枳慕密, 익산 왕궁면)이었을 것이고,[4세기 중엽 5세기 중엽]

  두 번째 도읍은 고마성(固麻城, 공주),[5세기 중엽 6세기 중엽]

  세 번째 도읍은 거발성(居拔城, 부여)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6세기 중엽 이후]

  그 이후 반도백제의 변화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 수 없다.

 

[필자주 : 지금 많은 사람들이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전주에 도읍했다"는 기록에 따라 한반도 전주가 후백제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생각하고 전북 전주에서 후백제 왕성의 흔적을 찾고 있으나 아직까지 확실한 유적, 유물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한반도 전주가 온조백제, 통일신라 강역이 아니라 무광왕, 모도왕으로 대표되는 반도백제의 강역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반도 전북 전주에서 확실한 도읍지의 흔적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후백제가 아니라 반도백제의 흔적으로서  혹시 반도백제가 지모밀(익산 왕궁리)에서 남쪽의 전주(필자주 : 옛날 원래의 지명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로 도읍을 옮겼던 흔적이거나, 아니면 고마성(공주), 거발성(부여)시대를 지나  반도백제가 다시 전주로 또 도읍을 옮겼던 흔적일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백제유적들은 모두 이 무광왕이 세운 반도백제를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그 비밀이 풀린다]   

 

  그런데 백제 역사를 필자와 같이 해석할 경우,

  지금까지 우리가 대륙백제의 역사기록을 한반도로 가져와 한반도 지형에 맞추어 해석하려 했다는 말이 되고,

  실제 반도백제에 관한 역사기록은 이해되지 않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록으로 치부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사고의 전환을 이루어 두 백제가 발해 북쪽과 한반도에 각각 위치하고 있었음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반도백제에 관한 기록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고, 발해 북쪽 대륙백제의 강역을 찾기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륙백제의 강역은 이미 필자가 그 대강을 찾아 놓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