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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수양제의 고구려 2차 침공로와 퇴각로 – 최초공개

윤여동 2023. 12. 9. 07:13

윤여동설 수양제의 고구려 2차 침공로와 퇴각로 최초공개

 

 

[수 양제 초상]

 

(6126) “옛날 명장들이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군사에 관한 일이 한사람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인데, 지금 우리는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양제는 중문(우중문)이 계교와 전략이 있다하여 모든 부대들로 하여금 (우중문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기 때문에 우중문이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우문술 등이 마지못하여 우중문(于仲文)의 말을 좇아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강(필자주 : 압록강이다)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 하였다.

을지문덕이 우문술(宇文述)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피로하게 하려고 싸우고는 달아나고, 또 싸우고는 달아나니 우문술이 하루 일곱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그들은 매번 이기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동쪽으로 살수(薩水)를 건너 진군하여 평양성(平壤城)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는 체하고는 우문술에게 청하기를 만약 군사를 돌려 세운다면 왕을 모시고 황제가 계신 곳으로 가서 예방하겠다고 하였더니 우문술이 자기 군사들이 피로하여 더 이상 싸울 수 없음을 알았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튼튼하여 빨리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우리의 거짓말을 곧이 듣고 돌아가려 하였다.

 

이때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써서 보냈다는 與隋將于仲文詩(여수장우중문시)가 전해온다.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그대의 신비한 책략은 천문을 꿰뚫고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신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네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전쟁에서 승리한 공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족한 줄 알고 그만 그치기 바라오

 

우문술이 방진을 치면서 퇴각을 하는데, 우리 군사가 사면에서 공격하니 우문술 등이 한편으로는 싸우며, 퇴각하였다.

(612) 가을7월에 우문술의 군사가 살수(薩水)에 이르러 군사들이 절반쯤 강을 건넜을 때에 우리 군사가 뒤에서 그들의 후속부대를 공격하니 적장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여기서 전사하였다.

이때에 여러 부대가 한꺼번에 무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장수와 군졸들이 뛰어 달아나는데, 11(一日一夜, 필자주 : 만 하루 즉 24시간을 말한다)에 압록수(鴨綠水, 필자주 : 요동의 오기이다)까지 450(필자주 : 살수에서 요동까지의 거리이다)를 갔다.

수나라 장군 천수 왕인공이 후군이 되어 우리 군사를 막아 물리쳤다.

(수군인) 래호아도 우문술이 패한 소식을 듣고 역시 퇴각하고 다만 위문승의 군사만이 온전하게 돌아갔다.

처음 9군이 요동(遼東)에 도착했을 때는 총수가 305천명이었으나, 요동성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오직 2,700명 뿐이었다..........

양제가 크게 화를 내어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서 계묘일(필자주 : 725)에 돌아갔다.[612년 수 양제의 고구려 2차 침공 기록 중]

 

[윤여동설에 의한 지명 비정]

1. 고대의 요수(遼水)는 지금의 북경 서쪽을 흘러 발해로 들어가는 영정하(永定河)이다.

2. 고대의 요동(遼東)은 지금의 북경(北京)을 말한다.

3. 고대의 압록강(鴨綠江, 鴨淥江)은 지금의 북경 북쪽 백하(白河)와 동쪽의 조백하(潮白河)를 말하는 것으로서, 사서에 기록된 압록강은 백하와 조하가 합류되는 지점에 만들어진 지금의 밀운수고(密雲水庫) 부근을 말한다.

4. 고대의 살수(薩水)는 지금의 조하(潮河)로서 고구려 살수대첩(薩水大捷), 고려 의 귀주대첩(龜州大捷)은 바로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 부근에서 이루어진 전투이다.

5. 고대의 패수(浿水)는 지금의 난하(灤河) 중류를 말한다.

6.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承德市)의 피서산장(열하행궁)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곳이 바로 옛날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고, 낙랑군의 치소였으며, 고려의 서경이었다.

 

[고대 요동(북경)에서 고구려 평양성(하북성 승덕시)까지 1천여리]

 

[고대 요동(북경)에서 백제 웅진성(진황도 노룡현)까지 1천여리]

 

  필자의 지명 비정에 따라 그려진 그림에 612년 고구려 침공 당시 수나라군의 요동(遼東)에서부터 평양성(平壤城)까지의 진격로와 퇴각로 기록을 대입시켜 꼼꼼하게 비교해 보시면 필자의 주장이 아주 정확하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의 요동(遼東)이 지금 한반도의 압록강 북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수도인 북경(北京)을 말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우리 고대사 연구의 기초입니다.

  후한서에는 낙양 동북 3,600리에 요동군이, 4,000리에 현토군이, 5,000여리에 낙랑군이 위치했다고 했으며, 중국의 많은 고대 사서들에는 요동 동쪽 1천여리에 고구려와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대의 요동(遼東)을 낙양 동북 3600리에 위치했던 지금의 북경(北京)으로 비정하면, 북경 부근에 한사군(漢四郡)의 현토군(玄菟郡, 필자주 : 옥저 땅에 설치되었던 초기 현토군에서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 다시 설치한 현토군)이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북경의 동북쪽, 동쪽 방향에 낙랑군(樂浪郡)과 고구려(高句麗) 그리고 백제(百濟)가 위치했음을 바로 알 수 있는데, 지금까지 수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지금까지도 미로를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상고사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 역사 전부가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모든 역사서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기술할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고려 때 만들어진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폄훼하기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발해 북쪽에 살았던 고려 사람들이 만든 대륙 삼국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 속 역사 현장을 한반도에서 찾으려 했으니, 기록과 현장이 일치할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런데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우리의 강단사학자들은 조선시대의 멍청한 유학자들처럼 우리의 모든 역사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있고, 그 역사의 현장들을 한반도에서 찾고 있으니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가 모두 가설의 역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실 우리 역사에서 고려로부터 그 이전의 사서 기록과 현장이 일치하는 곳이 한 군데라도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는 있다고 하겠네요. 충남 공주에서 발견된 백제 무령왕릉.

  그렇지만 충남 공주의 옛 이름은 웅진이 아니라 고마성(固麻城)이었고, 부여의 옛 이름은 사비성이 아니라 거발성(居拔城)이었습니다.

  웅진성(熊津城)과 사비성(泗沘城)은 발해 북쪽에 위치했던 대륙백제의 도읍이었고, 무령왕은 한반도 반도백제 출신으로서 대륙백제로 건너가 왕위에 올랐다가 죽자 그 뼈를 간추려 한반도로 가져와 고향 땅인 고마성에 장시지냈기 때문에 무령왕의 능이 한반도 충남 공주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눈을 돌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을 발해 북쪽 난하(필자주 : 중 상류는 옛 패수였고, 하류는 옛 백강이었다)를 중심으로 하는 대륙에 맞추고 기록을 따라가면, 비록 천년도 훨씬 넘게 세월이 흘렀지만 삼국사기 기록 속 산이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있고, 강도 여전히 말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께서는 이 순간부터 고대의 요동군(遼東郡)이 지금의 북경(北京)을 말하는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이루시기만 하면, 지금까지 아리송하기만 했던 우리의 고대사가 환하게 보이실 것이며, 고대 사서의 기록들을 쉽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모든 의문들이 한 순간에 눈 녹듯 사르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고대 사서 속 잘못된 부분까지도 짚어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고대의 요동(遼東)은 지금의 한반도 북쪽 요하 동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영정하 동쪽 북경(北京) 일원을 말하는 것임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고대 요동의 위치만 정확히 인식하고 있어도 우리 고대사 연구의 절반쯤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