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백제(대륙백제)의 진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찾았다 – 최초공개
백제(온조백제, 대륙백제)의 “남한성(南漢城)”은 온조왕 재위 14년(B.C.5) 정월에 첫 도읍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옮긴 두 번째 도읍으로서 13대 근초고왕이 371년에 북한산 아래 한성(漢城)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무려 375년간 백제(대륙백제)의 도읍이었고, 이 남한성 가까이에 축성된 남한산성(南漢山城)은 비상시를 대비하여 쌓은 산성이었다.
☆ 고구려도 졸본에서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는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아 비상시에 대비하였고, 후일인 342년에 이르러서야 왕성인 국내성(國內城)을 쌓았었다. 이를 보면 이 당시의 왕들은 왕성을 별도로 쌓았던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는 백성들과 섞여 살다가 비상시에만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삼국사기 기록 속 백제(百濟)를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했던 나라로 인식하여, 경기도 광주(廣州), 하남(河南) 부근에서 백제 남한성(南漢城)을 찾고 있으며, 그곳의 산성을 남한산성(南漢山城)이라 하고, 인천에서 미추홀(彌鄒忽)을, 서울 부근에서 위례성(慰禮城)과 한성(漢城)을 찾고 있으며, 충남 공주를 웅진(熊津), 부여를 사비(泗沘)라 한다.
그런데 서울, 인천, 경기도 광주, 하남 부근에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 초기 흔적들이 발견되지 않자 그것참 이상하다고 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사실 이는 애초부터 잘못 짚은 것이었다.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역사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을 한반도로 가져와서 그 기록 속 장소들을 한반도에서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고대의 요동(遼東)은 지금의 북경(北京)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의 백제와 고구려는 실제 북경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중국 사서들에도 요동 동쪽 1천여리에 고구려와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발해 북쪽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灤河) 부근에 진짜 백제(온조백제, 대륙백제)의 미추홀(彌鄒忽), 한산부아악(漢山負兒嶽)과 위례성(慰禮城) 그리고 남한성(南漢城)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었고, 하북성 승덕시에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따라서 백제(대륙백제)의 남한성[南漢城, 후일의 광주(廣州)]은 한반도의 경기도 광주(廣州)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천안시의 건창영진(建昌營鎭)을 말하는 것이고, 북한산(北漢山)은 지금의 진황도 도산(都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백제의 흔적들은 온조왕이 세운 대륙백제의 흔적이 아니라 4세기 중엽 대륙백제(온조백제)에서 13대 근초고왕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패한 무광왕(武廣王, 필자주 : 12대 계왕의 아들이다)이 한반도로 건너와 지모밀(전북 익산 금마) 땅에 세웠던 반도백제(무광왕백제)의 흔적들이다.
이것이 우리 백제 역사의 진실이다.
이를 헷갈려서는 우리 백제 역사를 절대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백제(대륙백제)의 진짜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그림을 보시라.
[위 : 백제(대륙백제) 남한산성(南漢山城), 좌표 동경118도47분17초 북위40도11분31초 일원]
[위 : 북쪽에서 내려다본 백제 남한산성의 지형, 지금은 야생약용식물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백제 장성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