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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봉상왕(烽上王)이 생명의 은인 고노자(高奴子)에게 식읍(食邑)으로 내려주었던 곡림(鵠林)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24. 3. 23. 04:55

윤여동설 고구려 봉상왕(烽上王)이 생명의 은인 고노자(高奴子)에게 식읍(食邑)으로 내려주었던 곡림(鵠林)을 찾았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4대 봉상왕 2(A.D.293) 조를 보면,

  “가을8월 모용외(慕容廆)가 침공하여 왔다.

  왕이 신성(新城)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 곡림(鵠林)까지 갔는데, 모용외가 왕이 도망친 것을 알고 군사들을 이끌고 추격하여 거의 붙잡힐 지경이 되어 왕이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이때 신성(新城) 성주인 북부소형 고노자(高奴子)가 기병 5백을 거느리고 와서 왕을 영접하고, 적군을 맞받아쳐 맹렬하게 치니 모용외의 군사가 패하여 물러갔다.

  왕이 기뻐하여 고노자의 벼슬을 높여 대형(大兄)으로 삼고, 또한 곡림(鵠林)을 주어 그의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봉상왕이 생명의 은인인 고노자(高奴子)에게 곡림(鵠林)”이라는 곳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과연 이 곡림(鵠林)이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는데, 드디어 필자가 그 곡림(鵠林)의 위치를 찾은 듯하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 봉상왕(재위 : A.D.292-300) 당시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던 때로서, 고구려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연나라 모용외의 침공을 받았는데 이때 봉상왕은 왜 고구려 서쪽 변경에 위치하고 있던 신성(新城)으로 피신하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는, 이때 봉상왕은 당시 도읍이었던 평양성(平壤城)을 떠나 옛 도읍 국내(國內) 서남쪽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으며, 옛날부터 고구려 왕들의 사냥터였던 질산(質山)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연나라 모용외의 침공을 받아 옛 도읍 국내(國內)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질산의 서쪽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던 신성(新城)으로 가려다가 모용외의 추격을 받아 붙잡힐 위기에 처했었을 것이다.

 

[고구려 곡림(鵠林) 추정지인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계명산(雞鳴山). 좌표 : 동경115도17분57초 북위40도28분00초]

 

[고구려 신성(新城)이었던 지금의 선화고성 남문 공극문, 선화고성 좌표 : 동경115도03분20초 북위40도36분45초]

 

  질산(質山)은 고구려 8대 신대왕 때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식읍(食邑)으로 내려 주었던 곳으로서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회래현(懷來縣)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고구려 서쪽 변경의 큰 성이었던 신성(新城)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선화현(宣化縣)에 있는 선화고성(宣化古城)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이때 봉상왕은 회래현 부근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향하여 선화현으로 가려했을 것인데, 그 중간지역 어디에선가 급히 추격해 온 연나라 모용외에게 사로잡힐 뻔했다가 마침 고노자가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왕을 구원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때 봉상왕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회래현과 선화현의 중간쯤에 위치한 지금의 하화원(下花園) 부근에서 사로잡힐 뻔했을 것인데, 바로 그 가까이에 지금 풍경구로 지정되어 있는 계명산(雞鳴山)이라는 경치 좋은 산이 있다.

  필자는 바로 이 계명산(雞鳴山)이 옛날 고구려의 곡림(鵠林)이었을 것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아마 옛날 고구려 시기에 강변에 위치한 이 산 부근에 고니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거나 그 산의 지형에서 고니의 형상이 보였기 때문에 곡림(鵠林)이라 이름 붙여졌울 것인데, 지금은 그 산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는지 계명산(雞鳴山)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결론적으로 고구려 봉상왕(烽上王)이 생명의 은인인 고노자(高奴子)에게 식읍(食邑)으로 내려 주었던 곡림(鵠林)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계명산(雞鳴山) 일원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