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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대의 기록에 나타나는 성정왕후(成貞王后) 그리고 엄정왕후(배소왕후)와 소덕왕후(점물왕후)의 관계를 밝힌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24. 3. 30. 07:51

윤여동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대의 기록에 나타나는 성정왕후(成貞王后) 그리고 엄정왕후(배소왕후)와 소덕왕후(점물왕후)의 관계를 밝힌다 - 최초주장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신라 성덕대왕신종, 그러나 그가 시호처럼 정말로 성스럽고, 덕스러운 왕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록 중 아직까지 그 신분을 정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33대 성덕왕 조에 나타나는 "성정왕후(成貞王后)"이다.

  삼국유사 왕력 제33대 성덕왕 조를 보면, “이름은 흥광이요 본래 이름은 융기였다. 효소왕의 동생이다. 첫 비는 배소왕후로 시호는 엄정으로서 원대아간의 딸이고,다음 비는 점물왕후로 시호는 소덕으로서 순원각간의 딸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성덕왕의 첫 왕비는 배소왕후(시호는 엄정왕후)였고, 두 번째 왕비는 점물왕후(시호는 소덕왕후)로서 성덕왕에게는 두 왕후가 있었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A.D.704) 조를 보면, 여름5월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성덕왕이 혼인을 했고, 이 왕비가 곧 배소왕후(시호는 엄정왕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앞선 신문왕 7(A.D.687) 조를 보면, “2월에 왕의 장자가 태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문왕의 장자가 서기 6872월에야 태어났음도 알 수 있다.

 

기록을 보면 신문왕의 장자는 32대 효소왕이고, 둘째 아들은 33대 성덕왕이며, 셋째는 근질(釿質)이고, 넷째는 사종(嗣宗)이었다.

 

  따라서 효소왕의 동생인 성덕왕은 아무리 빨라도 688년 또는 그 이후에 태어날 수 밖에 없고, 왕위에 오른 702년에 10여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7045월에 김원태의 딸(배소왕후, 시호는 엄정왕후)을 왕비로 맞아들였다는 것은 성덕왕이 이때 첫 혼인을 했다는 기록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 탑상 제4 대산오만진신 편의 주를 보면, 32대 효소왕의 출생년도를 의봉2(A.D.677)이라 하였고, 16세때인 천수3(A.D.692)에 왕위에 올랐으며, 장안2(A.D.702)26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하였고, 33대 성덕왕은 형인 효소왕보다 4살이 적은 개요 원년(A.D.681)에 출생한 것으로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와 출생년도가 차이가 나는데, 신문왕이 자식이 없던 김흠돌의 딸을 폐출시키고, 김흠운의 딸과 다시 혼인한 해가 683년 2월이었으므로 그 소생인 효소왕과 성덕왕은 683년 이전에 출생할 수 없다. 그리하여 필자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옳은 것으로 판단되어 삼국사기에 따라 기술했다.

 

  그런데 삼국사기 성덕왕 13(A.D.714) 조를 보면, “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보내어 숙위를 들게 하니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고 그를 총애하여 조회청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라고 갑자기 왕자 김수충(金守忠)이 나타나고,

  이어서 성덕왕 15(A.D.716) 조에는,“성정(成貞 일설에는 엄정이라고도 한다)왕후를 궁에서 내보내는데 비단 5백필, 200, 1만석, 집 한 채를 주었는데, 집은 강신공의 옛 집을 사서 주었다라고 갑자기 성정왕후(成貞王后)가 나타난다.[필자주 : 일설에는 엄정이라고도 한다라고 부기하여 놓았으나 이는 오기로서 엄정왕후는 성덕왕이 왕위에 오른 후 첫 혼인을 하였던 배소왕후의 시호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왕자 김수충이 성덕왕과 성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성덕왕의 실제적인 장자일 것이고, 성정왕후가 성덕왕의 실제적인 첫 왕후였으나 이때 무언가 알 수 없는 죄를 짓고 궁에서 내쫓기게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성덕왕 14(A.D.715) 조의, “왕자 중경을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라는 기록을 해석하기를, 성덕왕의 첫 왕후였던 성정왕후가 죄를 짓고 궁에서 내쫓기게 되면서 그 장자인 왕자 김수충(金守忠)도 성덕왕의 왕자로서의 자격을 잃게 되어, 이때 성덕왕과 배소왕후(엄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중경을 다시 태자로 봉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덕왕 16(A.D.717) 조를 보면,“6월에 태자 중경이 죽으니 시호를 효상(孝殤)이라 하였다” “가을9월 당나라에 들어갔던 대감 수충이 돌아와 문선왕(공자)1072제자도를 바치니 곧 대학에 비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태자 중경이 죽자 당나라에 가 있던 김수충이 급히 귀국했음을 알 수 있고, 이때까지도 김수충은 건재하였음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이때 김수충이 급히 귀국한 것은 차기 태자 책봉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성덕왕은 태자 중경이 죽었고, 당나라에 갔던 왕자 김수충이 귀국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자 김수충을 태자로 책봉하지 않고, 3년 뒤인 재위 19(A.D.720) 3월에 이르러 다시 이찬 순원의 딸을 맞아들여 일단 왕비로 삼았다가 6월에 이르러 왕후(점물왕후, 시호는 소덕왕후)로 책봉하게 되고, 다시 3년 뒤인 재위 23(A.D.724)에 그녀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나이 어린 승경(후일의 34대 효성왕)을 태자로 봉하게 된다.

  성덕왕은 왕자 김수충(金守忠)과 성정왕후(成貞王后)를 철저히 배제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성덕왕(聖德王)과 성정왕후(成貞王后) 그리고 왕자 김수충(金守忠)은 무슨 관계였던 것일까?

  이의 진실을 그림으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즉, 김수충은 32대 효소왕(孝昭王)과 성정왕후(成貞王后) 사이에서 입태되었는데, 그 아버지 효소왕이 702727일에 16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아직 태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32대 효소왕의 뒤를 이어 동생인 당시 10여세에 지나지 않았을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 후 효소왕의 유복자인 김수충(金守忠)도 태어났다. 성덕왕과 김수충은 숙부와 장조카 사이인 것이다.

  그리고 성덕왕이 재위 35월에 이르러 김원태의 딸을 첫 왕후(배소왕후로서 시호는 엄정왕후)로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곧 성덕왕의 장자인 중경이었다.

  그런데 이때까지도 죽은 효소왕의 왕후였던 성정왕후(成貞王后)가 궁중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고,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는데 성덕왕은 재위 13(A.D.714) 2월에 이르자 죽은 형 효소왕의 유복자인 왕자 김수충(金守忠)을 당나라에 숙위로 보내고는 재위 14(A.D.715) 12월에 자신의 장자인 중경을 태자로 봉한다.

  그리고는 재위 15(A.D.716) 3월에 형수인 효소왕비 성정왕후(成貞王后)를 궁에서 내보내게 되는데, 이때 성덕왕은 성정왕후에게 비단 5백필, 200, 1만석을 주고 집 한 채를 사서 주어 궁 밖에서 생활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조치한다.

  객관적으로는 전왕의 왕후였던 성정왕후에 대하여 나름대로 예를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사실 이때 성정왕후로서는 성덕왕을 많이 원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정왕후로서는 비록 자신의 아들인 김수충이 유복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효소왕의 뒤를 이어 바로 왕위에 오를 수는 없었지만, 태자로 봉했다가 성덕왕의 뒤를 이어 다음 왕위에 올리는 것이 목표였을 것인데,(필자주 : 아마 성덕왕이 효소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때 다음 왕위는 효소왕의 아들로 하여금 잇게 하겠다고 약속하였고 그리하여 성정왕후가 왕궁에서 계속 머무르며 살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성덕왕이 마음이 변해 효소왕의 유복자인 김수충을 당나라로 보내버리고는, 자신의 아들인 중경을 태자로 봉하고는 성정왕후를 궁에서 나가 살도록 조치했기 때문이다.

  성정왕후로서는 세가 불리하여 어쩔 수 없이 궁 밖으로 나가야 했지만, 자신의 아들 김수충을 왕위에 올리겠다는 일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이때 성덕왕이 효소왕의 유복자이며 장조카인 김수충을 제켜두고 자신의 아들인 중경을 태자로 봉한 것에 대하여 반발하는 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성덕왕의 조치에 반발하는 세력은 7176월에 이르러 쿠데타를 일으켜 태자 중경과 그 어머니 즉 성덕왕의 첫 왕후인 엄정왕후(배소왕후)까지는 죽여버렸으나 성덕왕까지는 죽이지 못해 결과적으로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던 듯한데, 이때 쿠데타를 앞장서서 진압한 일등공신이 바로 이찬 순원이었을 것이다.

 

순원이라는 사람은 효소왕 9(A.D.700) 조를 보면, “여름5월 이찬 경영(영을 현이라고도 한다)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사형을 당하고, 중시 순원이 연좌되어 파면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효소왕파와는 적대적인 사이였고, 그렇기 때문에 성덕왕은 생명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순원의 딸을 두 번째 소덕왕후(점물왕후)로 맞아들이게 되고, 또 성덕왕의 둘째아들인 34대 효성왕도 순원의 딸 혜명을 왕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의 최고 실권자는 순원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717년 가을 9월에 이르러 당나라에 가 있던 김수충이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 김수충은 공자와 그의 제자 10철과 72제자를 그린 초상화를 들고 귀국하여 성덕왕에게 바쳤고, 그를 대학에 비치했다는 기록을 끝으로 성정왕후(成貞王后)와 김수충에 관한 기록은 역사서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성정왕후(成貞王后)와 그 아들 김수충(金守忠)이 어떠한 삶을 살다가 죽었는지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나 아마 원망에 가득찬 삶을 살다 죽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성덕왕의 첫 왕후 엄정왕후(배소왕후)와 그 아들 김중경 역시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다음 왕위를 잇게 하려는 성덕왕의 욕심 때문에 비명에 죽었던 것으로 보이고, 성덕왕은 두 번째 왕후 소덕왕후(점물왕후)와의 사이에서 승경(34대 효성왕)과 헌영(35대 경덕왕) 두 아들을 낳아 다음 왕위를 이었으나, 효성왕은 아들없이 일찍 죽었고, 경덕왕은 순원의 동생으로 보이는 순정의 딸 삼모부인과 첫 혼인을 하였으나 폐출시켰고, 의충의 딸 경수왕후(만월부인)와 다시 혼인하여 아들을 낳아 다음 왕위(36대 혜공왕)를 이었으나 혜공왕을 끝으로 성덕왕의 후손들은 더 이상 신라의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성덕왕이 형수인 성정왕후(成貞王后)와 장조카인 김수충(金守忠)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가며 빼앗아 자신의 직계혈손으로 영원히 이어가고자 했을 왕위였지만 겨우 손자 대까지만 이어졌을 뿐이었다.

  또한 순원 역시 성덕왕 대와 효성왕 대까지는 절대 권력을 휘둘렀겠으나 그 이후 35대 경덕왕 대에 이르자 순원, 순정의 가문도 쇠퇴하여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한 편의 드라마나 소설의 모티브로서 충분한 내용이고, 학사나 석사 논문자료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드라마로 만들면 재미있는 한 편의 드라마가 될 것이고, 소설로 쓴다면 재미있는 한 권의 소설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도움이 필요할 경우 필자에게 연락하시라.

 

 

[참고]

윤여동설 -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신라왕자 김수충(金守忠)의 후손이 아닐까?

 

[사계 김장생 선생 묘비 : 유명조선국 가의대부 형조참판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시문원공 사계 김선생지묘]

 

[사계선생 묘역]

 

  신라의 왕자 신분이라고 역사서에 확실하게 기록이 전하나 그 후의 행적이 묘연한 신라왕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김수충(金守忠)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33대 성덕왕 3(A.D.704)조를 보면, “여름5월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를 보면 이 왕비는 배소왕후이고 시호가 엄정왕후(嚴貞王后)였다.

  그리고 13(A.D.714)조를 보면, “2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하게 하니 당나라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고 그를 총애하여 조회청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4(A.D.715)조를 보면, “왕자 중경을 태자로 봉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5(A.D.716)조를 보면, “성정왕후(成貞王后)를 궁에서 내보내는데, 비단5백필, 200, 1만석, 1구역을 주었는데,집은 강신공의 옛 집을 사서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16(A.D.717)조를 보면,

“6월 태자 중경이 죽었다.시호를 효상이라 하였다

가을9당나라에 갔던 대감 수충이 돌아와 문선왕(공자)1072제자의 초상을 바치매 곧 대학에 비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사건 정황이 아주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때 성덕왕은 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숙위 보낸 후에 왕자 중경을 태자로 봉했고, 성정왕후에게 많은 재물을 주어 궁에서 내 보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 태자로 봉했던 중경이 죽자, 당나라에 가 있던 왕자 김수충이 다시 돌아온다.

[필자주 : 이때 김수충이 공자와 그 제자들의 초상을 가지고온 것을 보면 김수충은 당나라에 가 있는 동안 유학에 심취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 기록들을 세밀히 보면, 이때 신라왕실에서 성덕왕의 태자 자리를 놓고 다투는 상황을 기록한 것임에 틀림없고, 김수충이 신라의 왕자 신분이었음은 확실하다.

  그런데 김수충에 관한 기록은 위 기록이 전부이고, 이후에는 더 이상 역사서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김수충이 과연 신라 어느 왕의 왕자였을까 설왕설래가 많았는데, 위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33대 성덕왕 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김수충이 실질적인 성덕왕의 장자가 아닌가 하기도 하였고, 성정왕후를 성덕왕의 실질적인 첫 왕비로 인식하기도 하였었다.

 

김수충이 중국 구화산에 들어가 지장왕보살이 된 김교각스님이라고 주장한 중국 학자도 있었으나 김교각스님은 태종무열왕의 왕자 김문주임이 밝혀졌다.

 

  그러나김수충은 33대 성덕왕의 장자가 아니라 사실은 그 동복형인 신라 32대 효소왕의 유복자로서 그 아버지 효소왕이 죽은 후인 702년 말경에 태어났고,성정왕후(成貞王后)는 바로 그 효소왕의 왕후로서 김수충의 어머니였고, 33대 성덕왕의 형수였음을 필자가 우리 역사상 맨 처음으로 앞서 밝혀냈었다.

  왕자 김수충은 32대 효소왕 김리홍(金理洪혹은金理恭이라고도 한다,생몰 : 687.2-702.7, 16세훙)의 외동아들로서 효소왕이 죽었을 때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고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삼국사기에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었던 것이고, 후손이 없었던[필자주 : 사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었다] 효소왕의 뒤를 이어 그 동복동생인 김흥광(金興光)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신라 33대 성덕왕이었다.

  성덕왕 김흥광은 서기 702년에 10여세 정도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704년에 첫 혼인을 하였다.삼국사기에는성덕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흥광(興光)이다.본명이 융기(隆基)였는데 당나라 현종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선천년간에 고쳤다[당서에는 김지성이라 하였다].신문왕의 둘째아들이요,효소왕의 동복동생이다.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매 백성들이 이를 왕으로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는 재위3(A.D.704) 5월에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맞아들여 첫왕비(엄정왕후)로 삼았고,장자인 김중경(金重慶)을 낳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7142월에 이르자 성덕왕은 장조카인 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숙위로 보내고는, 71512월에 자신의 장자인 김중경을 태자로 봉한 다음 7163월에는 죽은 효소왕의 왕후였으며,자신의 형수인 성정왕후(成貞王后)를 궁에서 내보내는 것이다.

  죽은 전왕의 왕후가 궁중에 머물러 살고 있는 것이 결코 득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록을 보면, 효소왕비 성정왕후는 효소왕이 죽은 후에도 무려 14년 가까이 신라의 왕궁 안에 그대로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추정해보면 이는 효소왕이 죽고 성덕왕이 왕위에 오를 때 아직 뱃속에 있었던 장조카인 김수충이 태어나 성장하면 그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돌려주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했기 때문에 성정왕후는 그때까지 효소왕의 유일한 혈손인 왕자 김수충을 왕궁 안에서 키우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덕왕은 이 때에 이르러 그 약속을 깨고 자신의 장자인 김중경을 태자로 봉해버리는 것이다.

  김수충의 어머니인 성정왕후로서는 당연히 강하게 반발했을 것이지만,어찌되었든 성덕왕은 많은 재물을 주어 성정왕후를 왕궁에서 내 보내는데 성공한다.

  물론 이때 성정왕후로서는 왕궁에 계속 머무르며 버티고 싶었겠지만, 태자가 봉해진 상황에서 대세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왕궁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7176월에 이르러 성덕왕이 태자로 봉했던 장자 김중경이 갑자기 죽는 불상사가 발생하게 되는데,아마 이때 성덕왕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어 성덕왕을 제거하려다가 태자 김중경과 그 어머니 엄정왕후 만을 죽이고 실패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태자 중경이 죽자 시호를 효상(孝殤)이라 하였다고 하였고,3년 후인 7203월에 성덕왕이 다시 이찬 김순원의 딸을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한편 이렇게 태자 중경이 죽자 효소왕비 성정왕후는 당나라에 가 있던 김수충에게 빨리 귀국하라는 연락을 취하였고, 9월에 이르러 김수충은 공자와1072제자의 초상을 가지고 돌아와 대학에 비치하게 되는데, 이때 효소왕비 성정왕후가 김수충을 급히 귀국시킨 것은 그를 태자로 봉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성덕왕은 성정왕후의 바램과 달리 왕자 김수충을 태자로 봉하지 않는데, 아마 이때 성덕왕은 성정왕후가 자신을 시해하려했던 세력과 연루되어 있었던 것으로 의심하지 않았나 싶은데,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는 성덕왕은 3년이 지난7203월에 이르러 다시 이찬 김순원의 딸을 맞아들여 두 번째 왕비로 삼았는데,이가 소덕왕후(炤德王后)로서 김승경(金承慶),김헌영(金憲英),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왕자1명 이렇게 세 아들을 낳았는데,성덕왕은724년 봄에 이르자 이제 겨우 3살쯤에 지나지 않았을 김승경을 새로이 태자로 책봉하게 되고, 후일 이 김승경이 성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이가34대 효성왕이었다.

  그런데 이 효성왕이 후손없이 일찍 죽자 다시 그 동복동생 김헌영이 왕위를 잇게 되고,이가35대 경덕왕이었다.

  경덕왕은 다시 그 아들 김건운(金乾運)에게 왕위를 전했는데,이가 신라 36대 혜공왕이었고, 성덕왕의 혈손들은 이 혜공왕을 끝으로 더 이상 신라의 왕위에 오르지 못한다.

  성덕왕이 그렇게 형수인 효소왕비 성정왕후와 죽은 형의 유복자인 왕자 김수충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가면서 빼앗은 왕위였지만 겨우 손자 대에 이르러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관심은 성덕왕의 후손들이 아니라 이때 왕궁에서 쫓겨났던 효소왕비 성정왕후와 효소왕의 유복자 왕자 김수충이 그 후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갔을까이다.

  이후 기록이 없어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미루어 생각해보면,

  33대 성덕왕이 왕위에 있던 36년 내내 김수충은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아야 했을 것이고, 34대 효성왕 재위기간 6년 그리고35대 경덕왕 재위기간 24년 동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김수충은 신라 효소왕의 왕자였으므로 언제라도 왕으로 추대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김수충은 평생동안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야 했을 것인데,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그 이후의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김수충이 후손도 없이 쓸쓸히 살다가 죽어 갔는지, 아니면 세상을 원망하며 어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살다 죽었는지, 신라가 싫어져서 멀리 다른 곳으로 이사 가서 신분을 숨기고 살았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다시 당나라로 가 버렸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광산김씨시조 신라왕자유허비]

 

  그런데 지금 명문거족이며, 유학자가 많이 배출된 광산김씨(光山金氏)들은 그 시조가신라왕자였다는 것만 전해졌을 뿐 그 확실한 신분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시조의 신위에 신라왕자라고만 표기한다고 한다.

 

광산김씨들은 지금 후대의 기록들을 근거 삼아 시조가 신라왕자 김흥광(金興光)이라 하기도 하고, 45대 신무왕의 3자라고도 한다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라 한다. 신라33대 성덕왕 김흥광(金興光)과는 동명이인이라고 하는데, 과연 신라왕조에서 선왕의 이름자를 후대의 왕자 이름에 붙일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혹시 광산김씨들이 행방이 묘연해진 비운의 신라왕자 김수충의 후손일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왜냐하면 왕위를 빼앗기고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을 효소왕의 왕자 김수충이 신라 서라벌(금성)을 떠나 멀리 나라의 서쪽 끝 무진주[光山]로 옮겨 가서 신분을 숨기고 서민처럼 조용히 살았고, 그 후손들 역시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살다가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 시대가 되자 그때에 이르러서야 다시 세상에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주김씨가 아닌 광산김씨로.................

  만약 이것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광산김씨의 선세는 족보가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효소왕,신문왕,문무왕,태종무열왕,진지왕,진흥왕,지증왕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선세가 아니라 오히려 신라말 혼란스런 시기에 해당하는 중대의 족보가 전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는 그 시절에 신분을 기록으로 남겨 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참고로 신라왕자 김수충과 광산김씨 사계선생 가계의 족보를 연결시켜 보면 아래와 같이 된다.

 

[광산김씨(光山金氏) 혈통 찾기]

 

세대 휘 추정출생연도 신분 및 관직

 

왕자 김수충(702- ) 신라 32대 효소왕의 왕자로서 유복자로 출생. 효소왕의 동생이 33대 성덕왕 김흥광이었다.

?(725- ) (실전)

? (750- ) (실전)

?(775- ) (실전)실전시기는 무진주로 이주하여 신분을 숨기고 살며,

?(800- ) (실전)족보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족보를 알 수 없게

?(825- ) (실전)되었을 것임

? (850- ) (실전)

?(875- ) (실전)

자 김흥광(900- ) 현재 광산김씨 시조라 함(신라왕자 김수충의 후손으로서 실제 신라왕자가 아니라 왕자의 후손일 것임)

자 김식(925- )각간

자 김길(950- )삼중대광공신: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시대가 되자 출사한 것으로 추정됨

자 김준(975- )좌복야

자 김책(1000- )평장사 증문정공

자 김정준(1025- )평장사

자 김양감(1050- )문하시중 증문안공

자 김의원(1075- )평장사 증충정공

자 김광준(1100- )비서감(대균,용 형제가 있었음)

?(1125- ) (실전)

자 김주영(1150- )호부상서 증동지추밀원사

자 김광존(1175- )증지문하부사

자 김대린(1200- )판병부사 증문하시중평장사

자 김련(1225- )첨의시랑찬성사 판판도사사 증양간공

자 김사원(1250- )첨의찬성사 증정경공

자 김진(1275- )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 증장영공

자 김영리(1300- )판군기사사

자 김정(1325- )추성보리공신 광성군

자 김약채(1350- )충청도관찰사 증예조판서:충청도연산현입향조

자 김문(1375- )예문관검열 증좌찬성배위 증정경부인 양천허씨:조선시대

자 김철산(1400- )광성부원군 사헌부감찰증영의정(김문의 유복자)

자김국광(1425- )좌의정 광산부원군

자 김극뉴(1450- )대사간

자 김종윤(1475- )진산군수 증병조참의

자 김호(1500- )지례현감 증좌찬성

자 김계휘(1525- )예조참판 증이조판서(실제생몰연도1526-1582)

자 김장생(1550- )형조참판증영의정 증문원공(실제생몰연도1548-1631). 이분이 사계선생이다.

자 김집(1575- )판중추부사 증문경공(실제생몰연대1574-1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