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조선(왕검조선) 초기 첫 도읍 아사달(阿斯達)에서 왕검성(王儉城)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가 밝혀졌다 - 최초주장
[위 : 고조선의 첫 도읍 아사달성(阿斯達城) : 내몽골 적봉시 영성현 대명진토성]
[위 : 고조선의 두 번째 도읍 왕검성(王儉城) :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고조선(왕검조선)의 첫 도읍은 아사달(阿斯達)이었다고 전해온다.
그 위치에 대하여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고조선(왕검조선)은 첫 도읍 아사달(阿斯達)에서 건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평양 왕검성(王儉城)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 백제의 경우에도 건국한 지 10여년 만에 첫 도읍 위례성(慰禮城)에서 남한성(南漢城)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 이유는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변경을 자주 침공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백제는 애초에 첫 도읍의 위치를 잘못 정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여러 신하들이 “이 하남의 땅은 북대한수(北帶漢水)하고, 동거고악(東據高岳)하며, 남망옥택(南望沃澤)하고, 서조대해(西阻大海) 하였으니 그 천험의 지리가 얻기 어려운 지세로서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는 말은 말짱 헛소리였다는 말이 되고, 그 말에 따라 위례성(慰禮城)에 첫 도읍을 정했던 온조왕 역시 여러 사항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오판하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쩌면 가장 중요시 해야 했을 이웃 나라의 침공을 고려하지 않고, 나라의 첫 도읍지를 정하여 결국에는 건국한 지 10여 년 만에 다시 도읍을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왕건조선)의 건국시조 단군왕검(단군왕검)은 무슨 이유로 첫 도읍 아사달(阿斯達)에서 10여년 만에 왕검성(王儉城)으로 다시 도읍을 옮겨야만 했던 것일까?
고조선(왕검조선)도 건국 후 이웃 나라의 침공이 심해져 어쩔 수 없이 바로 도읍을 옮겨야 했던 것일까?
아니면 나라의 강역이 갑자기 많이 넓어졌기 때문이었을까?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를 보면,
고조선(왕검조선)의 첫 도읍 아사달(阿斯達)의 위치에 관하여,
“여러 고을 땅의 길흉을 판단하여 도읍을 태백산 동남쪽 우수하벌판[牛首河之原]에 정하고 아사달(阿斯達)이라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첫 도읍 아사달이 우수하지원(牛首河之原)에 위치했고, 그곳의 길흉을 꼼꼼하게 따져 첫 도읍을 정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어서
“우수하(牛首河) 가에 산 지 10여년에 도읍을 태백산(太白山)의 남쪽, 패수(浿水)의 북쪽으로 옮기니 이곳이 평양(平壤)이며 두번째 도읍 왕검성(王儉城)이다.
지금의 속말 땅은 기후가 춥고 토질이 나빠서 들이 넓기는 하나 농사짓기가 남쪽보다 좋지 않았고, 속말수가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가니 남쪽과의 교통이 불편하여 도읍을 옮기게 된 것이다”라고 두 번째 도읍 왕검성(王儉城)의 위치와 도읍 이전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즉 속말수가 흐르는 그 부근의 땅이 기후가 춥고, 토질도 별로 좋지 않고, 또 강물이 북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남쪽과의 교통이 불편하여 도읍을 옮겼다는 것인데,
날씨가 추운 것과 토질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은 익히 아는 것이었을 것이고, 강물이 북쪽으로 흐른다는 것도 물론 익히 아는 사항이었을 것인데, 길흉을 꼼꼼히 따져 그곳에 도읍해 놓고는 왜 뒤늦게 남쪽과의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도읍을 옮긴다고 했던 것일까?
길흉을 따져 첫 도읍지를 아사달(阿斯達)에 정했다고 하였으니, 그때는 나라의 강역을 다스리는데 아사달이 중심지로서 최적지라고 판단했을 것인데,
이웃 나라의 침공을 당했다는 기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도읍을 옮겨야 했다면,
이는 나라의 강역이 갑자기 남쪽으로 많이 넓어졌기 때문에 그 넓어진 남쪽 강역을 통치하기 편리한 곳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으로 밖에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종합해보면, 이때 고조선(왕검조선)은 태백산(太白山) 동남쪽에 위치했던 아사달(阿斯達)에서 태백산(太白山) 남쪽에 위치한 왕검성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이고,
첫 도읍 아사달(阿斯達)은 강물이 북쪽으로 흐르는 속말수 가에 위치했었고, 두 번째 도읍 왕검성(王儉城)은 남쪽으로 흐르는 패수(浿水) 가에 위치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먼저 태백산(太白山)을 찾고 그 동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속말수가 지금의 어느 강을 말하는지 알게 되면, 아사달(阿斯達)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태백산 남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패수(浿水)를 찾으면 왕검성의 위치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옛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칠로도산(七老圖山) 산맥 중 최고봉인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 2,067m)을 말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첫 도읍 아사달(阿斯達)은 그 동남쪽인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 영성현 대명진토성[필자주 : 지금 중국에서는 그곳을 요(거란) 중경대정부터라 한다]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속말수는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의 노합하(老哈河)를 말하는 것으로서 북쪽으로 흘러 음하(필자주 : 두만강)와 합류하여 서랍목륜하(필자주 : 혼동강)로 들어가 동쪽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고조선(왕검조선)의 왕검성(王儉城)은 옛 태백산인 지금의 대광정자산 남쪽에 위치한 하북성 승덕시(承德市)를 말하는 것으로서, 난하(필자주 : 옛 패수)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난하는 내몽골 다륜, 정람기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왕검성(王儉城)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남쪽을 지나 발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규원사화에서 말한 아사달(阿斯達)과 왕검성(王儉城, 중국 사람들은 왕험성이라고도 한다)에 관한 기록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곳이다.
이렇게 천년의 수수께끼(千年之謎) 고조선(왕검조선)의 아사달(阿斯達)을 찾은 것이고, 왕검성(王儉城)도 찾은 것이며, 왕검조선이 아사달에서 왕검성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도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