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백제(온조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겼던 이유 – 최초주장
백제(온조백제, 대륙백제)의 후기 도읍 웅진(熊津)은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도읍인 한성(漢城)을 함락당하고, 개로왕(근개루왕이라고도 부른다)이 잡혀 죽는 비상시국인 475년에 문주왕이 급히 옮겼던 도읍이었다.
그런데 백제는 이 웅진에서 동성왕, 무령왕 대를 거치면서 고구려에 빼앗겼던 땅을 거의 회복함으로써 다시 강국으로 거듭났다.
그렇다면 이때 백제는 굳이 도읍을 옮길 이유가 없었을 것인데, 무령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성왕은 538년에 이르러 웅진(熊津)에서 더 남쪽에 위치한 사비(泗沘)로 다시 도읍을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南扶餘)라 했다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새로운 땅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도 새롭게 정함으로써 처음처럼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볼 수는 있지만, 도읍을 옮기는 일이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어가 결국에는 국력의 소모로 이어지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한 나라의 도읍을 옮기는 일은 매우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성왕은 모든 리스크를 안고 결국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겼다.
왜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이는 당시 함께 존재했던 반도백제(무광왕백제)와 탐라 그리고 왜국과의 지리적 위치를 감안하여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는 교역을 더욱 원활히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때 백제(온조백제, 대륙백제)가 차지하고 있는 땅이 지금의 발해 북쪽 당산, 진황도 일원이었고, 탐라는 산동성지역이었으며, 반도백제는 한반도 서부에 위치해 있었고, 왜국은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위 그림 참조 요망]
☆ 반도백제 건국시조 무광왕은 관세음응험기에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정사(절)를 새로 지었다(百濟武廣王遷都枳慕密地新營精舍)"라고 기록되어 있는 바로 이 무광왕으로서 그는 계왕의 아들로서 대륙백제에서 근초고왕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결국 패하고 365년경 한반도로 건너와 백제(반도백제)를 다시 세운 인물이다. 중국 사서에 언급되는 백제 모도왕(牟都王) 그리고 곤지, 남제왕, 동성왕, 무령왕 등이 그의 직계 후예들이다.
☆ 이때의 왜국은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반도백제의 건국시조였던 무광왕(武廣王)의 아들의 후손이 왕위에 올라 있었을 것이다. 이는 칠지도에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 旨造傳示後世(선세이래미유차도 백제왕세자기생성음고위왜왕 지조전시후세)"라고 상감되어 있는데, 이는 “선세이래 이러한 칼은 없었다. 백제 왕세자가 성음을 터트리며 기이하게 태어나 왜왕이 되었으므로 왕의 뜻에 따라 글자를 새겨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하노라”라는 의미로서 아버지인 무광왕이 칠지도에 글을 새겨 왜왕이 된 그의 아들에게 하사하며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하라며 내려주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를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이때의 왜국은 곧 백제의 분국이었다는 말과 같다.
즉 이때 백제 성왕은 북쪽에는 강력한 세력인 고구려가 있었고, 또 동쪽에는 강성해진 신라가 있었기 때문에, 웅진(필자주 : 진황도 노룡현)보다는 사비(필자주 : 당산 난현)가 더 강 하류에 위치해 있어 고구려와 신라의 급작스런 침공에 대비할 수 있고, 비상시에는 반도백제, 탐라, 왜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기에도 사비가 웅진보다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고, 해상 교역을 하기에도 훨씬 편리하다고 생각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것이 역사적으로 보면, 잘못된 판단이었음이 드러나는데, 결국 백제(대륙백제)는 이 사비에서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678년이나 이어져온 사직을 문닫아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