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백제(대륙백제, 온조백제) 남한성(南漢城), 한성(漢城) 도읍시기 백제왕릉들은 모두 남한성 동쪽 구성(駒城, 용인의 옛이름)에 조성했을 가능성 – 최초주장
[대륙백제(온조백제) 왕위계승도]
장 시조 온조왕(첫도읍 위례성, 남한성으로 도읍이전)
자 ↓
계 자(실명 :온조왕보다 먼저 죽었다)
승 ↓
기 2대 다루왕
↓
자(실명 : 다루왕보다 먼저 죽었다)
↓
3대 기루왕
↓
자(실명 : 기루왕보다 먼저 죽었다)
↓
4대 개루왕
↓
(장자파) (차자파)
.....................................I...................................
↓ ↓
5대 초고왕 구태 (仇台)
↓ ↓
6대 구수왕 자(실명)
↓ ↓
왕 자(실명 : 구수왕보다 일찍 죽었다) 8대 고이왕
위 .I..........................
다 ↓ ↓ ↓
툼 7대 사반왕 자(실명) 9대 책계왕
기 ↓ ↓
11대 비류왕 10대 분서왕
↓ ↓
13대 근초고왕 12대 계왕
(한성으로 도읍이전)
↓ |
분 대륙백제 반도백제
국 14대 근구수왕 시조 무광왕
기 ............................I.
↓ ↓ ↓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실명)
↓ ↓
17대 아신왕 ?(실명)
↓ ↓
18대 전지왕 ?(실명)
I............................
↓ ↓ ↓
반도백제
19대 구이신왕 20대 비유왕 모도왕
............I.......
↓ ↓ ↓
21대 개로왕(근개루왕) 22대문주왕 곤지
(웅진으로 도읍이전) .........I...................
[이하 대륙백제 파견]
통 ↓ ↓2자 ↓6자
합 23대 삼근왕 24대 동성왕 25대 무령왕
기 ↓ ↓
자 26대 성왕
(사비로 도읍이전)
............I.......
↓ ↓ ↓
자 27대 위덕왕 28대 혜왕
↓ ↓
자 29대 법왕
↓
30대 무왕
↓
대륙백제멸망 31대 의자왕
백제(온조백제, 대륙백제)의 왕릉 조성지에 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에는 왕릉 조성지에 관한 기록을 비교적 많이 남겼으나 유독 백제는 왕릉 조성지에 관한 기록을 단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일부러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것일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지만, 혹시 굳이 왕릉 조성지에 대하여 별도로 기록해서 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백제에서는 처음부터 왕릉을 어떤 일정한 장소에 조성했기 때문에 왕릉 조성지를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없었다고 보면 어떨까?
백제 백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었으므로.......
사실이 그러했다면, 과연 백제(대륙백제)의 왕릉들은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지금의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시 천안시의 관할구역.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으로 밝혀졌고, 중국 사서들에는 요동 동쪽 1천여리에 고구려와 백제가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필자는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가 고구려의 평양성, 진황도 도산 남쪽 당산 천안시 건창영진(建昌營鎭)이 대륙백제 남한성(南漢城, 광주)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사서의 기록과 필자의 주장이 정확히 일치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 : 풍수명당지 死居龍仁(사거용인)의 실제지형, 해발고도가 강이나 주변지형보다 월등히 높아 장마 등 수재에 안전한 곳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건국시조인 온조왕으로부터 20대 비유왕(毗有王)까지의 왕릉을 옛 구성(駒城, 망아지성)이었던 용인(龍仁)에 조성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왜냐하면 건국시조 온조왕으로부터 12대 계왕까지는 남한성(南漢城)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기 때문에 당연히 남한성 부근에 왕릉을 조성했을 것인데, 이는 그 동쪽 가까이에 위치한 풍수명당지인 구성(駒城, 용인)에 백제왕릉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고,
또한 13대 근초고왕이 371년에 도읍을 남한성(南漢城)에서 북쪽의 한성(漢城)으로 옮긴 후에도 구성(駒城, 용인)이 새 도읍 한성에서도 그리 멀리 떨어진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한성 도읍 시기에도 백제왕릉들은 여전히 선왕들이 묻혀 있는 안전한 명당지 구성(駒城, 용인)에 조성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용인[옛 구성(駒城)]이 백제왕들이 죽어 묻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는 말의 어원은, 생거진천은 진천이 물 걱정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으로서 진천에 부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말일 것이고, 사거용인은 풍수명당지인 용인에 영화롭게 살다가 죽은 백제왕들이 묻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므로 이러한 말이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고구려 장수왕에게 도읍인 한성을 함락당하고 잡혀 죽은 21대 개로왕릉이 과연 조성되었는지 아니면 난리통에 시신도 수습할 수 없었는지 알 수 없고,
도읍 한성(漢城)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급히 웅진(熊津, 필자주 : 진황도 노룡현)으로 도읍을 옮긴 22대 문주왕과 23대 삼근왕의 능은 도읍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김으로해서 이제는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에 위치하게 된 구성(용인)의 백제왕릉원에 조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아, 아마 새로 옮긴 도읍 웅진(熊津) 부근에 조성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24대 동성왕부터는 반도백제 모도왕(牟都王)의 후예로서 반도백제에서 대륙백제로 파견, 임명했던 왕들로서 죽어서는 다시 고향 땅인 반도백제 즉 한반도로 돌아와 묻힌 것으로 보인다.
☆ 대륙백제 24대 동성왕은 할아버지인 반도백제 모도왕(牟都王)이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한 후 둘째 손자 모대를 대륙백제로 보내 왕위에 올려 발해 북쪽 대륙백제에서 왕위에 올랐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따라서 25대 무령왕의 예로 본다면 동성왕도 죽은 후 대륙백제에서 육탈시킨 후 그 유골을 반도백제로 가져와 한반도에 왕릉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많고, 그 후의 대륙백제 왕들의 능도 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한반도 공주 송산리고분군이나 수촌리고분군 그리고 부여 능산리고분군이 그들의 능일 것이다.
☆ 대륙백제 25대 무령왕릉은 한반도 공주 송산리고분군에서 발견되었는데, 무령왕은 반도백제 모도왕(牟都王)의 여섯째 손자였다. 첫째 손자는 모도왕의 뒤를 이어 반도백제의 왕위에 오른 남제왕이었고, 둘째는 모대로서 대륙백제 동성왕이었으며, 여섯째는 사마로서 대륙백제 무령왕이었다.
그런데 발해 북쪽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었던 무령왕의 능이 대륙백제 강역이 아닌 한반도 반도백제의 도읍 고마성(固麻城)이었던 충남 공주에서 발견되었다.
이를 보면 무령왕이 비록 발해 북쪽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었지만, 죽어서는 고향 땅인 한반도로 돌아와 묻혔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대륙백제에서 죽은 무령왕의 시신을 육탈시킨 후 그 유골을 반도백제로 가져와 한반도에 능을 조성했다는 말이 되니, 대륙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어 낙양에 묻힌 의자왕을 제외한 대륙백제 무령왕 이후의 대륙백제 왕들의 능도 한반도에 조성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앞으로 발해 북쪽 하북성 당산 천안시(遷安市) 일원에서 백제 건국시조 온조왕릉과 그 어머니인 소서노 태후의 능 그리고 대륙백제 고이왕릉, 근초고왕릉, 아신왕릉 등 백제왕릉들이 다수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기다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