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신라 혁거세거서간의 첫 왕비는 알영(閼英)이 아니었다 알영은 둘째 왕비였다 – 최초주장
[혁거세거서간의 어머니 천후성모 사소상]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은 기원전 69년에 서라벌(徐羅伐)의 동쪽알천양산촌 부근의 양산 나정(蘿井)에서 태어나 13세 때인 기원전 57년에 이르러 신라의 첫 왕위에 올랐다가 서기 4년에 73세의 나이로 죽어 탄생지 나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릉(蛇陵)에 묻혔다.
☆ 사릉원(蛇陵園)은 알천양산촌과 담암사(담엄사라고도 한다) 사이에 위치했고, 혁거세거서간을 비롯한 신라 박씨왕들의 왕릉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혁거세거서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혁거세거서간의 왕비로 기록되고 있는 알영(閼英)이 사실은 혁거세거서간의 첫번째 왕비가 아니라 두 번째 왕비였음을 밝혀 보려 한다.
이는 우리 역사상 필자가 최초로 주장하는 것인데, 오로지 역사적 인물인 알영왕비에 관한 순수한 역사 연구일 뿐 특정성씨와는 관련이 없음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알영(閼英)의 탄생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혁거세거서간 재위 5년 봄 정월에 용이 알영우물[閼英井]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보고 기이하게 여겨 이를 거두어 기르고 우물 이름으로서 이름을 지었다. 그가 성장하니 모습이 덕스러웠다. 시조가 듣고 데려와 왕비를 삼았는데, 행실이 어질고 내조에 능하여 당시 사람들이 두 성인이라고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알영의 모습을 덕스럽게 생겼다고 한 것으로 보아 예쁘기보다는 마치 부잣집 맏며느리감처럼 좀 통통하고 후덕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볼 수 있고, 알영의 출생년도를 혁거세거서간 재위 5년 즉 기원전 53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 삼국유사에는 아이영(娥伊英), 아영(娥英), 아리영(娥利英)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혁거세거서간(기원전 69년생)과 알영(기원전 53년생)왕비의 연령차이가 무려 16세 즉 열여섯살이나 되는 셈인데, 정상적인 첫 혼인의 경우 남자의 나이가 무려 16세나 많다는 것은 선뜻 이해되기 어렵다.
대개 남녀가 첫 혼인을 할 때는 동갑이거나 한두 살 차이 혹은 서너 살 차이까지는 있을 수 있지만 첫 혼인에서 남자의 나이가 열여섯살이나 많은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이거나 첫 부인이 죽어 새로이 처녀장가를 들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알영(閼英)도 혁거세거서간의 첫번째 왕비가 아니라 두번째 왕비였던 것은 아닐까?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알영을 왕비라고만 기록했고 첫번째 왕비인지, 두번째 왕비인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사소(파소)태후
↓
시조 혁거세거서간
첫번째 왕비 두번째 왕비
=?(실명) = 알영부인
↓ ↓
? 2대남해왕
잘 생각해 보자.
옛날의 경우 대개 16 - 18세 전후에 혼인을 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그리 먼 옛날도 아닌 우리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대부분 20세 이전에 혼인을 했었다.
그렇다면 혁거세거서간도 13세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늦어도 2-3년 후에는 혼인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알영(閼英)의 출생연도는 혁거세거서간 재위 5년인 기원전 53년으로서, 이때 혁거세거서간의 나이는 17세였다. 따라서 이해에 태어난 알영이 성장하여 혼인을 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14-15세는 되어야 하는데, 이때에 혁거세거서간의 나이는 30-31세가 되는 것이다.
당시 일반 서민들도 15∼20세 사이에는 거의 혼인을 했는데, 왕의 혈손이 번성하기를 바랬을 신라왕실에서 왕이 30세가 될 때까지 노총각으로 놔두었을 리는 없는 것이다.
추정해보면,
혁거세거서간은 왕위에 오른 후 곧 혼인을 하였을 것이다.
첫 왕비가 누구였는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아마 서라벌 6부 촌장의 딸 또는 손녀딸과 혼인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6부의 촌장들이 혁거세거서간을 추대하여 왕위에 올렸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왕의 어머니인 사소태후(娑蘇太后, 파소라고도 한다)나 혁거세거서간의 입장에서도 6부 촌장들의 보호막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혁거세거서간 재위 17년인 기원전 41년경(알영 13세시)에 이르러 첫 왕비가 아들없이 죽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천명이 짧아 죽었을 수도 있고, 병에 걸려 죽었을 수도 있으며, 어떠한 사고로 죽었을 수도 있고, 또는 아이를 출산하다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자 신라 왕실에서는 다시 혁거세거서간의 두번째 왕비를 간택하려 했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이때 13세쯤의 처녀로 성장한 알영(閼英)을 혁거세거서간의 두번째 왕비로 맞아들였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아마 고허촌장 소벌도리의 추천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알영이 태어났다는 알영정(閼英井)이 경주부의 남쪽 5리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금오산(金鼇山, 남산)이 경주부 남쪽 6리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알영정(알영우물)이 남촌인 돌산고허촌(남촌, 후일의 사량부)과 가까이 위치해 있어, 소벌도리가 알영의 성장과정과 품행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알영부인은 혁거세거서간의 왕비가 된 후 신라 초대 왕의 왕비로서의 역할을 아주 잘 수행했던 듯한데, 이는 “행실이 어질고 내조가 능하여 당시 사람들이 두 성인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다.
혁거세거서간은 13세에 왕위에 올라 재위 61년(A.D.4) 3월에 죽었는데, 이때 혁거세거서간의 나이 73세였다. 당시의 평균수명과 비교하여 매우 오래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왕위를 이은 2대 남해차차웅(남해왕)의 나이는 이때 약 40여세쯤이었을 것인데, 남해차차웅(남해왕)을 “혁거세거서간의 적자(嫡子)이고,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혁거세거서간의 첫 왕비는 아들을 낳지 못하고 일찍 죽었기 때문에 신라의 첫 왕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알영왕비는 혁거세거서간의 첫번째 왕비가 아니라 두번째 왕비였음에 틀림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고,
첫번째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두번째 왕비였던 알영왕비의 소생인 남해차차웅(남해왕)이 다음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혁거세거서간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2대 남해차차웅(남해왕)은 서기 4년에 왕위를 이어받아 재위 21년인 서기 24년에 약 60여세 정도에 죽었던 것으로 보이고, 또 남해왕의 아들인 3대 유리이사금(유리왕)은 기원전 5년생으로서 서기 24년에 왕위를 이어받아 재위 34년인 서기 57년에 역시 60여세에 죽었다.
☆ 혹시 2대 남해차차웅(남해왕)이 혁거세거서간과 알영왕비의 손자였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혁거세거서간이 당시로서는 매우 오래 살아 그 아들이 일찍 죽은 경우 손자가 왕위를 이어받은 경우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삼국사기 신라왕위계승 기록을 보면 손자 또는 증손자 심지어 고손자가 왕위를 이은 경우에도 전왕의 아들로 기록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