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구려 황성(黃城), 장안성(長安城)은 고구려의 도읍이 아니라 도읍인 평양에 있던 왕궁(王宮)의 이름이었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1대 동천왕 21년(A.D.247) 조를 보면, “봄2월 왕이 환도성(丸都城)은 병란을 겪어 다시 도읍하기 불가하다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평양이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인데, 혹은 왕검이 도읍한 곳이기 때문에 왕검성(王儉城)이라고도 한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儉之都王儉城 : 필자가 누락글자 2자 추가]”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가 환도성으로부터 옛 왕검성이었던 평양성으로 완전히 도읍을 옮겼음을 알 수 있다.
☆ 이때 고구려는 조위(曹魏) 관구검의 침공을 받아 도읍이었던 환도성을 함락당했기 때문에 멀리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이다.
그런데 후대인 16대 고국원왕 12년(A.D.342)에, “봄2월 환도성(丸都城)을 보수하고, 국내성(國內城)을 쌓았다. 가을8월 왕이 환도성으로 옮겨 살았다[移居丸都城].”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당시 평양성에 거주하고 있던 고국원왕이 옛 도읍 환도성으로 다시 옮겨와 살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거(移居)”라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이때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 아니라 왕이 거처를 임시로 환도성으로 옮겨 살았던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해 10월 전연(前燕)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또 다시 함락당하게 되자, 다음 해 7월에 이르러 고국원왕은 평양성이 아닌 평양동쪽 황성(黃城)으로 다시 옮겨 살게 된다.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록을 보면, “평양 동쪽 황성(黃城)으로 옮겨 살았다[移居平壤東黃城], 성(黃城)은 지금의 서경(西京) 목멱산 가운데 있었다[城在今西京木覓山中]”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국원왕이 환도성을 떠나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으나 원래 살던 평양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평양성 동쪽 방향에 위치한 황성(黃城)으로 "이거(移居)"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이는 도읍을 옮기는 천도(遷都)가 아니라 왕이 평양성 밖에 "황성(黃城)"이라는 왕궁을 따로 짓고 거주했다는 의미일 것이다.[필자주 : 그랬다가 외적의 침공이 있다거나 할 경우의 비상시에는 평양성으로 들어가 방어하는 것이다. 고구려 초기 국내에 도읍했던 시기에도 왕들이 국내 시가지에 왕궁을 짓고 살다가 외침을 받으면 가까이 위치한 국내위나암성으로 들어가 방어했었고, 후대에 이르러서야 국내성을 쌓았다]
그런데 또 20대 장수왕 15년(A.D.427) 조를 보면, “평양으로 도읍을 이사했다[移都平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장수왕에 앞선 고구려왕들이 살던 곳은 평양성 동쪽 목멱산 중에 위치하고 있던 황성(黃城)이었는데, 황성은 평양성처럼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이 아니라 왕궁만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하여 장수왕은 그곳이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되었는지 다시 평양성 안의 평양궁(平壤宮)으로 들어간 것이라 여겨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같은 평양시내에서 평양성 밖의 황성(黃城)에서 평양성(平壤城) 안으로 왕의 거처를 옮긴 것 뿐이기 때문에 “이도(移都)” 즉 도읍을 이사했다고 기록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또 25대 평원왕 대에 이르면, “8년(A.D.552) 장안성을 쌓았다[築長安城]” “28년(A.D.586) 장안성으로 도읍을 이사했다[移都長安城]”라고 또 한번 도읍을 옮긴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 역시 평원왕이 같은 평양에서 평양성을 나와 장안성(長安城)으로 왕궁 만을 옮겼기 때문에 “이도(移都)”했다고 기록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 천도(遷都)와 이도(移都)의 의미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 여겨진다. 천도(遷都)는 그야말로 도읍지 자체를 옮기는 것이고, 이도(移都)는 왕궁 만의 위치를 바꾼다는 의미로 사용했던 듯하다.
이는 아래 사서들의 기록을 보면 명확해지는데,
사기 조선전의 주에는, "괄지지에는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인데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다. 또 고조선 땅이라고도 했다(括地志云高(句)麗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又古云朝鮮地也)"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조선의 왕검성이 곧 낙랑군의 치소였고, 고구려의 평양성 임을 알 수 있고,
수서 고구려 전을 보면 평양성에 대하여,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북이 6리이고 산의 굴곡을 따라 (성을) 쌓았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구당서 고구려 전에는 고구려의 위치에 대하여, "그 나라의 도읍은 평양성인데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1백 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신당서에는 평양성의 위치와 형태에 대하여, "그 나라의 왕이 살고 있는 곳은 평양성인데 장안성이라고도 부른다. 한나라 때의 낙랑군으로 경사에서 5천리 남짓 떨어져 있다.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浿水)까지이다. 왕은 그 좌측(평양성 내의 동편)에 궁궐을 지어 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의 평양시내에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는 평양성(平壤城)이 있었는데, 그 평양성 내에 궁궐(평양궁이었을까?)이 지어져 있었고, 평양성 밖 동쪽 방향 목멱산에는 황성(黃城, 필자주 : 황궁)이 있었으며,
또 방향이나 거리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평양성 밖에 장안성(長安城, 필자주 : 장안궁)이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고구려는 첫 도읍지 졸본(卒本)에서 건국되었고,
2대 유리왕 때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겼으며[遷都於國內],
다시 10대 산상왕 때에 환도성을 쌓아 두었다가[築丸都城], 그곳 환도(丸都)로 왕궁 만을 옮겼었고[移都於丸都],[필자주 : 이 역시 이도(移都)로 표시되어 있으니, 그렇다면 이는 도읍을 완전히 옮기는 천도(遷都)가 아니라 왕궁만을 옮긴 것 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삼국사기 찬자들이 천도(遷都)와 이도(移都)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사용했다고 보여진다]
또 11대 동천왕 때에 옛 왕검성(王儉城)이었던 평양성(平壤城)으로 도읍을 옮긴 후 멸망할 때까지 평양(平壤)에 계속 도읍했었다는 말이 된다.
즉 평양 동쪽 목멱산 중에 있던 황성(黃城)은 사실 도읍이 아니라 왕이 거처하는 "황궁(黃宮)"이었을 뿐이고, 장안성(長安城) 역시 도읍이 아니라 "장안궁(長安宮)"이었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앞으로는 고구려 도읍지를 졸본, 국내, 평양 세 지역 만으로 한정해야 옳을 것이고, 환도성, 황성(황궁), 장안성(장안궁)을 도읍지에 포함시켜서는 안될 것으로 판단된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