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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북경 동북쪽 고북수진(古北水鎭)이 고조선(古朝鮮)의 세 번째 도읍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이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24. 10. 26. 06:25

윤여동설 북경 동북쪽 고북수진(古北水鎭)이 고조선(古朝鮮)의 세 번째 도읍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이었다 - 최초주장

 

 

 

[사마대장성여유구라는 관광지구로 지정되어 있는 고색창연하고 풍광이 수려한 고북수진(古北水鎭). 바로 이곳이 고조선의 세번째 도읍 백악산아사달이었고, 고구려의 고국이었으며, 발해의 서경압록부였고, 거란의 녹주압록군절도였으며, 정안국의 도읍이었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의 현장은 영원히 미로를 헤맬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위 : 사마대장성, 금산령장성이 지나고 있으며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에 위치한 고색창연한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수진(古北水鎭)]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수진(古北水鎭)이 우리 고조선(古朝鮮)의 세 번째 도읍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이었고,

[고조선은 태백산 동남쪽 우수하지원의 아사달(阿斯達)에서 건국된 후 10여년 만에 태백산 남쪽의 평양왕검성(平壤王儉城)으로 도읍을 옮겼고, 다시 나라의 강역이 점점 서쪽으로 넓어지자 요동(遼東)에 가까운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로 옮겨 오랜기간 도읍으로 삼았다가, 고조선 말기에 이르러 권력을 잃은 47대 고열가단군이 장당경(당장경이라고도 한다)으로 갔다가 첫 도읍 우수하지원의 아사달성(阿斯達城)으로 들어감으로써 고조선의 왕통이 끊기고 말았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후일 우수주의 맥국(貊國)이 그 명맥을 이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로 이 고북수진(古北水鎭)이 고구려 왕릉들이 다수 조성된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이었으며,

[고구려는 8대 신대왕부터 왕릉을 고구려고국에 모두 조성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고구려는 그 땅을 매우 중요하게 관리하였을 것인데, 그렇다면 고국(故國)”이라는 지명은 고조선의 옛 땅 또는 고조선의 옛 도읍이었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북부여 해모수 천제가 태어난 고향일까? 졸본부여 동명왕의 고향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주몽왕(추모왕)의 어머니 유화태후의 고향이었을까?]

 

바로 이 고북수진(古北水鎭)이 해동성국 발해국의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였으며,

[발해국(渤海國)5(五京)을 두었다고 전해졌다.

 

                                      상경용천부

 

     서경압록부              중경현덕부               동경용원부,

 

                                     남경남해부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 숙신의 옛 땅(肅愼故地)으로 상경(上京)을 삼고 용천부(龍泉府)라 하니,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 3주를 다스리고,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 그 남쪽을 중경(中京)으로 삼고 현덕부(顯德府)라 하니,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 6주를 다스리고,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 예맥(동예와 맥국)의 옛 땅(濊貊故地)으로 동경(東京)을 삼고 용원부(龍原府) 또는 책성부(柵城府)라고 하였는데,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 4주를 다스리고,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 옥저의 옛 땅(沃沮故地)으로 남경(南京)을 삼고 남해부(南海府)라 하니,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 3주를 다스리고,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 : 고구려 옛 땅(高句麗故地)으로 서경(西京)을 삼고 압록부(鴨淥府)라 하니,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豐州), 정주(正州) 4주를 다스린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규원사화에는 “청평[필자주 : 진역유기를 집필한 이명(李茗) 선생]은 단군 때에 4번이나 도읍을 옮겨 나라를 새롭게 했는데, (첫 도읍은 아사달이었고), 두 번째 천도는 패수의 북쪽 (왕검성이었으며), (세 번째는) 곧 발해의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 땅인 신주(神州)가 바로 그곳이라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필자의 주장과 일치한다.]

 

바로 이 고북수진(古北水鎭)이 거란()의 녹주압록군절도(綠州鴨淥郡節度)가 위치하고 있던 신주(神州)였으며,

[요사(遼史) 동경도 녹주압록군절도(渌州鴨渌軍節度)조를 보면, “녹주압록군절도는 본래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인데, 발해에서는 서경압록부(西京鴨渌府)라고 불렀다. 성의 높이는 3장이고 광륜(둘레)20리이다. 신주 환주,풍주,정주 4개주를 다스린다(渌州鴨渌軍節度 本高()麗故國 渤海號西京鴨渌府 城高三丈廣輪二十里 都督 神,,,正 四州事)”]라고 기록되어 있어 거란의 녹주압록군절도가 있던 신주(神州)가 곧 고구려고국, 발해의 서경압록부와 동일한 장소라고 기록되어 있어, 필자의 주장과 일치한다]

 

바로 이 고북수진(古北水鎭)이 발해 유민들이 발해국의 부흥을 꿈꾸었던 정안국(定安國)의 건국지로 나타나는 곳이다.

[정안국은 거란() 동경요양부에서 가까운 옛 발해의 서경압록부를 근거 삼아 나라를 세워 거란에 대항했으나 결국 거란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50여년 만에  소멸한 나라였는데, 만약 이때 우리 고려에서 정안국을 지원하여 발해국을 복원했었더라면 우리 고대사가 어떻게 변화되었을지 궁금하긴 하다]

 

이렇듯 북경 동북쪽 풍광이 아주 좋은 곳에 자리한 지금의 고북수진(古北水鎭)”은 고조선으로부터 수천년 간 우리 상고, 고대 역사가 면면히 서려 있는 곳이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우리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한반도 만이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의 중심이라 여기고는, 한반도 내에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의 지명들을 모두 대입시켜 그 현장을 찾고 있으나, 비슷하긴 하나 역사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곳은 한 곳도 없다보니,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의 현장찾기는 가설의 역사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역사적 진실을 말해주는 필자의 주장을 귀담아 듣지 않는 한,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의 현장은 절대 찾을 수 없을 것이니, 필자는 매우 안타까운 것이다. 해는 저물어 가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