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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高句麗)의 도읍이전 위치 비교 - 최초주장

윤여동 2025. 5. 10. 14:29

윤여동설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高句麗)의 도읍이전 위치 비교 - 최초주장

 

[지금의 북경이 고대의 요동이었고, 발해 북쪽에 위치했던 고조선은 점점 서쪽으로, 고구려는 점점 동쪽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조선(古朝鮮)의 도읍이전]

 

1 아사달(阿斯達) : 고조선의 초기도읍지로서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 영성현 대명진토성(大明鎭土城)이다

아사달 동쪽 가까이에 위치했던 장당경(당장경)은 고조선의 도읍지가 아니라 고조선 초기 왕검성에서 수해를 당한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한 곳으로 지금의 내몽골 영성현(寧城縣)이다.

고조선왕실에서는 이곳을 직할지로 정하여 세금을 면제하여 주는 등 각종 혜택을 주는 대신 이곳 장당경(당장경) 백성들로 하여금 첫 도읍성인 아사달성을 관리하게 하였고, 왕실에도 식량을 공급하게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왕검성(王儉城) : 고조선의 두 번째 도읍으로서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이다.

이곳은 후일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으로 거듭나게 된다.

 

3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 : 고구려의 세 번째 도읍으로서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수진(古北水鎭)이다.

이곳은 후일 발해국의 서경압록부가 되기도 하고, 발해국 부흥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으며, 거란()의 녹주압록군절도가 되기도 했다.

 

4 아사달(阿斯達) :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가 권력을 잃고 장당경(당장경)을 거쳐 첫도읍 아사달로 되돌아감으로써 2천년 왕국 고조선의 사직이 문을 닫게 되었고, 고조선은 열국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고구려(高句麗)의 도읍이전]

 

1 졸본(卒本) : 이곳은 본래는 졸본부여의 건국지였으나 후일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주몽이 졸본부여왕의 부마(사위) 자격으로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던 곳이고, 죽어 묻힌 곳이었기 때문에 고구려 왕들은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이곳에 가서 주몽의 사당에 고했다. 지금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이다.

 

2 국내성(國內城) :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으로서 고구려는 이곳에서 대제국으로 발돋움했다.

고구려는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에도 국내성을 부도읍으로서 중요하게 관리하였고, 후일 백제의 한성을 차지한 후에는 평양성, 국내성, 한성을 삼경으로 관리하였다.

고구려 국내성은 지금의 중국 북경시 연경현 영녕진(永寧鎭)이다.

이 부근에 고구려 2대 유리왕릉(두곡동원), 3대 대무신왕릉(대수촌원), 4대 민중왕릉(민중원석굴)이 조성되었다.

 

3 환도성(丸都城) : 환도성을 고구려의 정식 도읍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는데, 이는 2대 유리왕이 졸본으로부터 국내로 도읍을 옮긴 것은 遷都(천도)라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반면, 10대 산상왕 때 환도로 옮긴 것은 移都(이도)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임시도읍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지금의 북경 북쪽 회유현(懷柔縣) 일원으로서 후일 이곳은 요나라의 환주(桓州)가 된다.

 

4 평양성(平壤城) : 이곳은 원래 고조선의 왕검성이었던 곳으로서, 11대 동천왕 때 조위 관구검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자 옮긴 도읍이었다. 고구려는 이후 이 평양을 떠나지 않았다.

16대 고국원왕 때 평양 동쪽 황성(黃城)으로 移居(이거)했다 또는 25대 평원왕 때 장안성(長安城)으로 移都(이도)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같은 평양에서 왕궁의 위치가 바뀐 것 뿐이지 도읍을 천도한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의 평양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를 말하는 것이고, 평양성은 지금의 피서산장(열하행궁) 터를 말하는 것으로서 고구려는 이곳에서 700년 사직을 문닫고 말았고, 후일 이곳은 왕건 고려(高麗)의 서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