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구려 멸망 후 금마저(金馬渚)에 세워진 고구려의 망명정부 보덕국(報德國)의 위치 – 최초공개
[보덕국(報德國)은 발해 북쪽,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시 풍윤현(豐潤縣) 일원에 설치 되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A.D.670) 조를 보면,
“6월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람 모잠(검모잠) 대형이 남은 백성들을 거두어 합해 가지고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패수)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중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新羅)로 향하여 오다가 서해의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安勝)[필자주 : 淵淨土는 연개소문을 말하는 것이다. 안승(安勝)이 연개소문의 아들이라는 이 기록은 오기일 것이다]을 만나 그를 한성(漢城) 안으로 맞아들여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소형 다식(多式) 등을 우리에게 보내 애걸하여 말하기를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왕대를 잇는 것은 천하의 공번된 의리로서 오직 대국(신라를 말한다)에 이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 선왕이 올바른 원칙을 잃고 멸망을 당하였으나 이제 저희들이 본국의 귀족 안승(安勝)을 찾아 받들어 임금으로 삼고 속국이 되어 영세토록 충성을 다할 것을 원하나이다’ 하였으므로 왕이 나라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7월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어 안승(安勝)을 봉하여 고구려왕(高句麗王)을 삼고, 그 책명문에 이르기를
「함형 원년(A.D.670) 경오년 가을 8월1일 신축일에 신라왕의 책명을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安勝)에게 보내노라. 공의 태조 중모왕은 [太祖 中牟王, 필자주 : 북부여 천제 해모수를 말하는지, 고구려의 건국시조 추모왕(주몽왕)을 말하는지, 고씨 최초의 왕인 태조대왕(고궁)을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덕을 북산에 쌓고, 공을 남쪽 바다에 세워 위풍이 청구에 떨쳤고, 어진 교화는 현토(玄菟)를 덮었었다. 자손이 서로 이어 줄기와 가지가 끊어지지 아니하였고, 개척한 땅이 천리나 되어 거의 8백년[?, 필자주 : 900년도 아니고 7백년도 아닌 8백년이라니 선뜻 이해되지 않는 기록이다]이나 내려오더니 남건과 남산 형제 때에 이르러 화가 집안에서 일어나고, 틈이 골육간에 생겨 집과 나라가 부서져 망하고 종묘와 사직이 연기처럼 소멸하여 백성들은 극도로 동요하였고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공은 위험과 곤란을 산과 들에서 피하다가 외로운 몸으로 이웃 나라에 귀순하였으니 그 유랑생활의 고통은 마치 진문공의 사적과 같고, 멸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킨 사실은 위선공의 사실과 유사하다.
무릇 백성이란 임금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며, 하늘은 반드시 운명을 돌보아 주는 것이다.
선왕의 정통 후예는 오직 공이 있을 뿐이니 제사를 주관할 이가 공이 아니고 누가 있으리오.[필자주 : 여기에서는 안승이 고구려 보장왕의 정통후예라고 하고 있다]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어 곧 책명을 전하고 공을 명하여 고구려왕으로 삼으니 공은 마땅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으고 옛 전통을 이어 일으켜 길이 이웃 나라가 되어 형제와 같이 지낼 것이니 삼가고 삼갈지라.
겸하여 멥살 2천석과 갑옷갖춘 말 한 필과 능직비단 다섯필과 견직과 가는베 각 열필과 솜 열다섯 뭉치를 보내니 왕은 이를 받을지라」 하였다.
문무왕 14년(A.D.674) 조를 보면,
“9월 안승(安勝)을 봉하여 보덕왕(報德王)으로 삼았다.[10년에 안승을 봉하여 고구려왕으로 삼았었는데, 지금 (보덕왕으로) 두 번째 봉하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보덕이란 의미가 귀명(歸命)과 같은 뜻인지 혹은 지명인지]”라고 기록되어 있고,
문무왕 20년(A.D.680) 조를 보면,
“3월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잡색비단 1백단을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에게 주고 드디어 왕의 누이로서 아내를 삼게 하고 [혹은 잡찬 김의관의 딸이라고도 한다]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인륜의 근본은 부부가 제일이며, 교화의 기본은 자손을 잇는 것이 중요하다. 왕은 아내가 없으매 어진 배필을 얻어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내조할 자리를 비워두고 가문을 일으킬 도리를 영영 궐하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제 좋은 때 길한 날을 맞아 옛 예절에 따라 나의 누이로서 배필을 삼게 하니 왕은 마땅히 함께 정의를 도탑게 하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자손을 융성토록 하여 길이 반석같이 번창하게 하면 어찌 장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랴」 하였다.”
“여름5월 고구려왕[필자주 : 안승을 말하는 것인데, 왜 또 보덕왕이라 하지 않았을까?]이 대장군 연무(고연무) 등을 시켜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안승(安勝)은 말씀 올립니다. 대아찬 김관장이 와서 교지를 삼가 전하고 아울러 교서를 내렸습니다. 왕의 조카[필자주 : 왕의 누이라고 했었는데, 또 왕의 조카라 하였으니 사실을 알 수 없다]로서 우리 지방의 안주인을 삼아 4월 15일에 이곳으로 왔으니 기쁘고 황송한 생각이 교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컨대 요임금의 딸이 순에게 시집가고 주왕의 딸이 제나라에 시집간 것은 본시 그들의 거룩한 덕을 높이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범속한 인물로서 비유할 바는 아니오나 저는 본래 용렬한 편으로서 행실과 재능에 있어서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행이 좋은 운수를 만나 거룩한 교화에 젖게 되어 매번 특별한 혜택을 입으매 그 은혜는 실로 갚을 길이 없아온 바 거듭 왕의 총애를 입게 되고, 왕의 인척을 내려 보내니 드디어 꽃은 만발하여 경사롭고 사람은 화목하여 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좋은 날을 택하여 누추한 집으로 출가를 하게 되어 몇 만년을 살아도 못 만날 일을 하루 아침에 얻게 되매 이런 일은 본래 바라지도 못한 것이요 이 기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 것이며 어찌 저의 한두명 만이 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겠습니까. 선조 이하 모두가 이를 진실로 기뻐할 것입니다.
저는 아직 왕의 지시를 받지 못하여 감히 직접가서 뵙지는 못하지만 지극한 기쁨을 이길 수 없어 삼가 대장군 태대형 연무(高延武)를 보내어 글을 바쳐 아룁니다.」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원년(A.D.681) 조를 보면,
”8월 13일에 보덕왕(報德王)이 사신 소형 수덕개(首德皆)를 보내어 역적을 평정한 것을 치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문왕 3년(A.D.683) 조를 보면,
”겨울10월 보덕왕(報德王)을 불러 소판(蘇判)으로 삼고 성씨를 주어 김씨(金氏)라 하고, 서라벌에 머물게 하고 제일가는 집과 좋은 밭을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문왕 4년(A.D.684) 조를 보면,
”11월 안승(安勝)의 조카뻘 되는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형을 당했다. 남은 사람들이 대문이 사형 당해 죽는 것을 보고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하고 반역하므로 왕이 장병들로 하여금 이를 토벌하는데, 맞아 싸우던 당주 핍실(逼實)이 여기서 죽었다. 그 성을 함락하고 그곳 사람들을 나라 남쪽에 있는 주와 군에 옮기고 그 땅으로 금마군(金馬郡)을 만들었다.[대문(大文)을 혹은 실복(悉伏)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보덕국(報德國)이 설치된 지 15년 만에 없어지게 되었고, 금마군(金馬郡)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금마저(金馬渚)”라는 곳은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지금의 한반도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왕궁면)이 위 기록 속에서 언급되는 금마저였을까?
아니다.
[금마저의 마룡지 추정지(풍윤 조설근문화공원) : 우리 상고사, 고대사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중국 하북성 당산에 가실 기회가 있으시면 풍윤현이 그리 멀지 않으니 꼭 한번 찾아가 보시기를 권합니다, 경치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금마저(金馬渚)는 원래 마한의 월지국(月支國, 目支國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곳으로서 옛날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단군 준왕(準王)이 갑작스런 위만(衛滿)의 공격을 받고 도읍인 왕검성(王儉城)을 빼앗긴 후, 급히 좌우궁인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패수를 타고 내려와 남하하여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卞韓)을 합하여 월지(또는 목지)에 도읍하고 한왕(韓王)에 올랐던 역사 깊은 곳이었고, 백제 의자왕의 아버지인 30대 무왕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도 한 곳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백제(온조백제, 대륙백제)는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상식처럼 한반도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라 사실은 발해 북쪽 난하하류 부근의 대륙에서 건국되고, 멸망한 나라라는 것이다.
백제의 북한산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 도산(都山)을 말하는 것이고, 웅진성(熊津城)은 진황도 노룡현의 노룡고성을 말하는 것이며,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성(泗沘城)은 난하 하류 강변에 위치한 하북성 당산시 난현(난주)을 말하는 것이고,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唐山市)가 바로 완산(完山)이요 전주(全州)였다.
[필자주 : 전주이씨(완산이씨)의 원래 본향은 한반도 전주가 아니라 발해 북쪽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이다]
그리고 신라의 천년도읍지 서라벌(徐羅伐)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였고, 고구려의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承德市)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대륙 고대사의 진실이다.
따라서 “금마저(金馬渚)”는 발해 북쪽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풍윤현(豐潤縣)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의 진실을 찾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발해 북쪽 대륙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 우리의 옛 땅이 있으니............
이렇게 하여 아리송하기만 했던 마한 월지국(목지국)의 위치를 찾은 것이고, 고구려의 망명정부였던 안승(安勝)의 보덕국(報德國) 위치도 찾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