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청나라는 신라 마의태자의 후예가 세운 나라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1. 30. 01:25

윤여동설 - 청나라는 신라 마의태자의 후예가 세운 나라인가? - 최초주장

 

 

   고려사절요 고려 예종 을미 10년(A.D.1115) 조에는,
  "생여진의 완안아골타가 황제라 칭하고, 이름을 민(旻)이라 고쳤으며,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그 풍속이 흉노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 성곽이 없고, 산과 들에 흩어져 살며, 문자가 없어 끈을 매어 의사소통을 했다. 
  그 지방에 돼지, 양, 소, 말이 많은데, 말은 준마가 많다.
  사람들은 사납고 날래며 어릴 때부터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기 때문에 장성하여 활을 쏘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말달리는 전쟁연습을 해 경병이 되는데, 여러 부족이 제각각 우두머리라 하여 통일되지 못했다.
  그 땅의 서쪽이 바로 거란이고, 남쪽은 바로 우리나라(고려)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부터 거란과 우리 조정을 섬겼는데, 조회하러 올 때마다 부스러기 금과 담비가죽, 좋은 말을 바쳤다.
 우리(고려) 조정에서도 은과 폐백을 후하게 내려주었는데, 해마다 그렇게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앞서 예종 4년(A.D.1109)에 여진의 요불이 입조하여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쌓은 동북 9성을 돌려주기를 청원하면서 말하기를,
  "옛날 우리 태사 영가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국(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기까지 귀부해야 한다 하였고, 지금 태사 오사속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라고 했고, 금사 태조본기에는 시조 함보가 고려로부터 왔다고 기록하고 있어 금나라 왕실이 우리와 혈통이 닿아 있음을 알게 한다.

 

☆ 금나라는 서기 1115년에 건국되었고, 고려는 신라 54대 경명왕 2년인 918년에 건국된 나라인데, 홍호의 송막기문에는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감복이고, 이가 금 태조의 9대조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금사에는 금나라 왕실의 세계를 시조 함보→오로→발해→수가→석로→오고내→핵리발→아골타로 기록하고 있어 시조 함보가 아골타의 7대조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함보가 여진으로 간 때는 금나라가 건국되기 200여년 전으로서 고려가 건국되기 전이므로 신라인이라고 기록한 송막기문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우리 한민족을 통칭할 때 "고려인"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감안하면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에도 함보를 고려인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흐른 1616년에 이르러 누루하치(애신각라 노이합적)가 만주족(여진족)을 통합하고, 앞서 여진족이 세웠다가 원나라에 의해 소멸했던 금(金)나라의 맥을 잇는다는 의미로 다시 금(후금)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이 후금이 곧 후일의 "청(淸)"나라이다.
  그런데 바로 이 청나라가 신라의 마지막 태자로서 신라가 멸망하자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산나물을 뜯어먹으며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지는 마의태자(이름은 김일이라 한다)의 후손이 세운 나라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청나라 황실의 성씨는 "애신각라(愛新覺羅)"인데, 그 의미가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라"는 의미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니 청나라 황제들이 정말로 신라 마의태자의 후손들이었다면 신라의 멸망을 안타까워했을 마의태자가 그 후손들에게 삼국통일을 이루었던 영광스런 신라를 잊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예 성씨를 애신각라라고 했을지도 모르는데, 청나라 황실에서는 자신들의 시조를 "애신각라 포고리옹순" 이라 했다.

 

☆ 애신각라(愛新覺羅)를 직역하면 "새로움을 사랑하고 널리 깨우치다"라는 의미로서 신라와 연관짓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앞서 서기 935년 가을 10월에 이르러 신라의 경순왕은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보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들어 바치고 천년 사직을 문닫게 되는데, 이때 그에 반대했던 태자는 통곡을 하며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산나물을 뜯어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졌고, 사람들은 그가 삼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하여 마의태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금강산을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라 달리 부른다.

     
        
  그런데 신라가 한반도 경주 부근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낙랑 땅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 때의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한나라 때의 낙랑군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며, 낙랑동부도위는 지금의 칠로도산 동쪽 적봉, 객라심기 일원을 말하는 것인데, 신라는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동부도위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고, 후세 그 땅의 일부를 차지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신라의 왕들에게 낙랑군공 또는 낙랑군왕이라는 작위를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우리의 역사상식과 달리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서 건국되어 그곳을 중심으로 존속하다가 천년사직을 문닫았다. 그 부근이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강역이었다. 즉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부터 요하 부근까지가 우리 삼국의 기본 강역이었다.


 

  그렇다면 마의태자가 세상을 등지고 들어가 살았다는 개골산(금강산)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물론 마의태자가 전설대로 그곳 개골산에서 산나물을 뜯어먹으면서 일생을 마쳤는지, 그후 다시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가 보기 싫다하여 그곳을 떠나 더 멀리 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북보타산에 이를 수 있고, 동북쪽으로 가면 북진 의무려산에 이를 수 있으며, 북서쪽으로 멀리가면 노로아호산 산맥에 이를 수 있는데, 모두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산이고, 곧 여진 땅에 가까운 곳이다.
  만약 마의태자가 금성을 떠나 지금의 노로아호산에서 살았고, 1616년에 이르러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웠으며, 신라의 후예가 세웠던 금나라의 맥을 잇는다는 의미로 후금이라 했다면 혹시 누루하치가 신라 마의태자의 먼 후예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라 마의태자의 후예들은 700년 가까운 기간동안 잃어버린 신라의 고토 회복을 지상 목표로 삼고 살다가 힘을 모아 나라를 세웠고, 결국 옛 대륙신라 땅 모두를 되찾았고, 더 나아가 중국 전체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추측일 뿐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신라의 후예가 세운 나라 임이 확실한 금나라, 청나라의 역사가 중국 역사일 수만은 없고, 당연히 우리 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

  청나라의 역사가 우리 역사의 일부라면, 청나라가 차지했던 그 땅은 모두 우리의 옛 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만주 벌판이나 연해주, 간도 만이 아니라 중국 대륙 전체가 결국 우리의 옛 땅이라는 말이다. 
  청나라의 시국처는 영고탑(寧古塔)이라 한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은 그 영고탑을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이라 하지만 이는 사실 청나라 때 지금의 백두산을 옛 장백산으로 착각(?, 혹은 고의)하고 그렇게 비정한 것일 뿐 정말로 그곳이 원래의 영고탑은 아니다.

  원래의 영고탑은 발해의 상경용천부였고, 금나라의 상경회령부였던 곳으로서,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를 말하는 것이고,

  원래의 장백산(옛 불함산, 옛 태백산, 옛 도태산)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에 위치한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을 말하는 것이지 한반도의 백두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내몽골까지 우리의 옛 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