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화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피서산장 현판
피서산장(열하행궁) 상제각
우리는 지금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매우 안타까워하는데, 삼국사기를 잘 읽어보면 호동왕자의 아버지인 대무신왕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을 역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이었던 호동왕자가 남옥저에 놀러 갔는데, 낙랑왕 최리가 그를 보고 "그대의 용모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대가 북국 신왕(대무신왕)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는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자기의 딸로써 아내를 삼게 하였다.
뒤에 호동이 본국으로 돌아와 가만히 사람을 보내 낙랑공주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무기고에 들어가 (낙랑국의) 북과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당신을 부인으로 맞아들일 것이요, 만약 그렇지 못하면 맞아들이지 못할 것이오" 했다.
옛날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만일 적병이 쳐들어오게 되면 스스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낙랑공주가 예리한 칼을 가지고 가만히 자기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을 부수어 버리고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이 아버지인 대무신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했다.
낙랑왕 최리는 북과 나팔이 소리를 내지 않으므로 방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고구려 군사가 성 밑에까지 이르러서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수어진 것을 알고 드디어 자기의 딸을 죽인 후에 나와서 항복했다』
[혹자는 말하기를 낙랑을 쳐 없애기 위하여 미리 혼인하기를 청하여 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다음 그녀를 본국에 돌려보내 그 병기를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위 글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조의 기록을 약간 각색한 것으로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앞서 기원전 108년 전한의 무제가 순체와 양복이라는 두 장군을 보내 위만조선을 쳐 멸망시키고 그 땅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한사군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임둔군, 진번군, 낙랑군, 현토군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기원전 82년에 이르자 임둔군을 예가 차지하고 동예를 재건하게 되고, 진번군은 맥족이 차지하고 맥국으로 독립하게 되어 두 군은 폐지되기에 이르고, 낙랑군과 현토군 두 군만이 남게 되자 기원전 75년에 이르러 한(漢)나라에서는 본국의 방어를 위해 현토군의 관할지를 낙랑군으로 이관하고,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이동시키게 된다.
한편 현토군의 관할지를 넘겨받은 낙랑군에서는 그 땅이 단단대령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직접 관할하기가 매우 불편하자 그곳을 따로 떼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고 도위로 하여금 그곳을 관할토록 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서기 8년에 이르자 왕망이 전한을 없애버리고 국호를 "신(新)"이라 하게 되어 한(漢)나라가 혼란기에 접어들게 되자 그 기회를 틈타 "최리"라는 사람이 그 땅을 차지하고는 스스로 칭왕을 하게 된다.
☆ 최리가 낙랑태수였다가 스스로 칭왕을 했는지, 우리 고조선 사람이 낙랑 땅을 차지하고 칭왕을 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다가 서기 30년에 이르러 고구려가 낙랑동부도위를 쳐서 복속시키게 됨으로써 낙랑동부도위의 관할하에 있던 동옥저와 예가 고구려에 속하게 된다.
그러자 고구려의 대무신왕은 내친김에 낙랑국 마저 복속시킬 계획을 세우게 되고, 왕자인 호동을 낙랑국과 이웃한 남옥저로 보내 낙랑의 정세를 살피게 하는데, 마침 이때 낙랑왕 최리가 남옥저에 왔다가 호동왕자를 만나게 되고 최리는 호동을 낙랑으로 데리고 가 자신의 딸을 주고 사위로 삼게 된다.
☆ 우리는 지금 낙랑군이 북한의 평양 부근인 것으로 이해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낙랑군은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그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부근으로부터 그 서북쪽의 승덕시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 사람은 한사군의 낙랑군은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진황도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최리의 낙랑국은 한반도 평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고, 낙랑군 땅을 차지한 최리가 스스로 칭왕을 했던 것이므로 낙랑군과 최리의 낙랑국은 동일한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치소는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이었다.
그러자 대무신왕은 그 기회를 역이용해 낙랑국을 병합시키기 위해 낙랑공주로 하여금 그 나라에 있는 비밀병기인 자명고를 찢어 버리게 했다고 하는데, 낙랑에는 적군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려 위험을 알려주는 자명고가 정말로 있었을까?
옛날에는 일반적으로 적군의 침입을 왕궁에 전달하는 방법으로서 봉화를 이용했으나, 당시 낙랑에서는 봉화 대신 변경으로부터 왕궁에 이르기까지 중간 중간에 북을 매달아 놓고 줄로 그 북들을 연결해 놓고는 비상시에 그 줄을 잡아당겨 북이 울릴 수 있게 장치를 해놓았던 듯 하다.
따라서 왕궁에는 적군이 침입했음을 알려주는 맨 마지막 북이 매달려 있었을 것이고, 왕궁에서 본다면 비상시에 그 북은 사람이 직접 두드리지 않는데도 저절로 북을 치고 있는 형상이었을 것이고, 이렇게 북이 울리면 적군의 침입을 알게 되어 미리 방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러한 낙랑의 북을 보고 사람이 직접 치지 않는데도 스스로 소리를 내어 위험을 알려준다고 생각해 자명고라 불렀고, 사람들은 낙랑에는 적군의 침입을 알려주는 자명고가 있다고 전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호동왕자와의 사랑에 눈이 먼 낙랑 공주는 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적군의 침입을 알려주는 그 중요한 자명고를 찢어버리고 줄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변경에서는 줄을 열심히 잡아 당겨 왕궁에 고구려군의 침입을 알려주었을 것이나 줄이 끊어지고 북이 찢어져 정작 왕궁의 북은 소리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낙랑왕 최리는 고구려군의 침입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고, 비상 사태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어, 고구려군이 성을 포위한 후에야 사태를 파악했던 것이다.
낙랑왕 최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이고, 북을 찢어버리고 줄을 끊어 북이 울리지 못하게 만든 범인을 색출해보니, 바로 자기가 그토록 귀여워했던 공주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최리는 나라를 망친 자기의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함으로써 서기 37년에 낙랑국은 고구려에 복속되고 만다.
그런데 호동왕자 역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바로 누명을 쓰고 죽게 된다.
대무신왕의 맏왕비는 모본호족의 딸이었고, 둘째 왕비는 동부여 금와왕의 막내아들이 세운 갈사국왕의 손녀 해씨였다.
둘째 왕비 해씨는 맏왕비 보다 일찍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호동왕자였고, 맏왕비는 후에 모본왕 해우를 낳았다.
호동에 관한 기록을 보면 "그의 얼굴이 아름답고 곱게 생겨 왕이 몹시 귀여워하였기 때문에 호동이라고 불렀다" 고 전한다.
그러자 맏왕비는 호동이 자신의 아들인 해우를 제치고 태자로 봉해질까봐 전전긍긍 하다가 호동을 제거할 계략을 꾸미게 되는데, 호동이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고 참소하여 결국 호동을 죽이고야 만다.
이 두 사람,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는 이렇게 어이없이 죽어갔고, 이들의 못 이룬 사랑이야기는 설화가 되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내생에는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