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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국인은 왜 족보를 만들었을까?

윤여동 2007. 12. 27. 10:38

윤여동설 - 한국인은 왜 족보를 만들었을까? 

 

 

   우리는 지금 족보라는 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나라에서 개인의 신분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서류 두 가지 중 하나가 바로 족보이다. 법적으로는 호적이 있고, 다른 하나는 각 가문에서 기록해 내려오고 있는 족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족보는 부모는 물론 출생년월일, 배우자, 자녀, 관직, 사망일시, 죽어 묻힌 묘의 위치 등이 세밀하게 기록되기 때문에 어찌 보면 호적보다도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족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1천년 내지 2천년 전의 조상들로부터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세밀하게 기록해 온 것이 아주 먼 옛날부터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우리가 현재 보고있는 각 성씨들의 족보는 거의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로서 그리 오랜 옛날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도 간략하게나마 집집마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등 세계(世系)를 기록해 두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이르러 족보를 간행할 때 그 이전의 조상들도 족보에 기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안동권씨의 성화보(成化譜)로서 조선 성종 7년인 1467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하고, 다음은 파평윤씨의 기해대보(己亥大譜)로서 조선 중종 34년인 1539년에 만들어진 것이며, 그 다음이 문화류씨의 가정보(嘉靖譜)로서 조선 명종 17년인 1562년에 만들어졌다.
  안동권씨의 성화보 서문에는 우리나라에는 보첩(譜牒: 족보)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화보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왕실을 제외하고는 족보를 책으로 편찬했던 적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가문 나름대로 간략하게 기록해 내려오는 비전의 세계첩 정도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문화류씨의 가정보 서문에는 가정보가 발간되기 150여 년 전인 명나라 영락(A.D.1403-1424) 연간에 이미 문화류씨의 족보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기록으로만 전할 뿐 실물이 전하지 않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문화류씨의 가정보는 외손까지도 기록하여 가문의 혈손 모두를 기록하고 있어 후세 많은 문중들이 그 체제를 참고해 족보를 편찬하게 된다.    
  세월이 지나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친 후 다른 각 성씨들도 족보 편찬에 열을 올리게 되는데, 대개의 족보가 이때 만들어진다.
  이때 족보를 만들며 집안에 전해지던 세계첩도 참조했을 것이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의 역사서도 참조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각 성씨들이 족보를 만들게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물론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필자는 족보의 원래 편찬 목적이 외래통치세력과 한반도 토착세력을 구분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즉 외래통치세력인 양반과 토착세력인 상민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본 블로그 중 위화도회군과 조선의 개국 그리고 한양천도 참조요망]
  앞서 이성계는 북경 부근의 대륙에서 위화도회군을 감행해 고려를 멸망시키고 개경에서 왕위에 올라 국호를 조선이라 한 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게 된다.
  우리는 지금 이성계가 북한의 압록강에서 위화도회군을 단행했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으나 사실은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에서 회군해 고려를 멸망시키고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고려의 도읍 개경을 황해도 개성이라 생각했으나 사실은 대륙인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을 말하는 것임이 새롭게 밝혀졌다.

  따라서 이때 이성계는 도읍을 대륙의 개경에서 한반도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이지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에서 서울로 옮긴 것이 아니었다.   

 

☆ 고려도경에는 서긍 일행이 고려에 사신으로 가면서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황수양을 지났다고 기록하고 있고, 고려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었으며, 등주, 내주, 빈주, 체주와 정확히 마주보는 곳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등주, 내주, 빈주, 체주와 동시에 정확히 마주볼 수 있는 곳은 만리장성이 시작된 산해관 부근으로서 고려도경은 고려의 도읍 개경이 한반도 황해도의 개성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다.      
 
  그리하여 대륙으로부터 통치세력들이 한반도로 건너오게 되었고, 그들은 한반도 땅을 나누어 차지하게 된다.
  전주이씨는 전주부근을 차지하게 되고, 안동권씨는 안동부근을 차지하게 되고, 광산김씨는 광주부근을 차지하게 되고, 파평윤씨는 파주부근을 차지하게 되고, 강릉최씨는 강릉부근을 차지하게 되고, 경주김씨는 경주부근을 차지하게 되고, 진주강씨는 진주부근을 차지하게 되는 등 한반도를 통치세력 들이 나누어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그 숫자가 많지 않아 통치세력들간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 양반들끼리만 혼인관계를 맺었으나, 세월이 좀 지나자 숫자가 많이 늘어나게 되고, 전쟁이 지나고 나니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기가 매우 어려워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양반들은 자신들의 혈족만을 기록한 족보를 만들게 된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족보가 지금의 호적역할을 했고, 족보가 있어야 양반행세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때까지 상민들은 족보라는 것이 없었다.
  하루하루 끼니 때우기도 어려운 판국에 족보를 기록할 여력이 어디 있었을 것이며, 남의 집 종 신세에 글을 배울 수나 있었겠는가?
  그저 남종으로 살다가 여종과 혼인해 자식을 낳게 되어 다시 그 자식이 또 종이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장사를 하는 상인 그룹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들은 돈을 많이 벌어 먹고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양반들 중에는 몰락하는 사람도 생겨나게 된다.
  몰락한 양반은 끼니 걱정을 하게 되었고, 돈 많은 상인들은 신분 상승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양반족보를 사고 파는 경우도 생기게 되어 상인이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고, 때로는 종들이 양반집 족보를 훔쳐 멀리 달아나 양반행세를 하기도 했다고 하니 상민으로 분류되어 핍박받던 토착세력이 양반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에는 소수만이 양반계급에 속했으나 세월이 갈수록 양반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어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한 민국 사람 누구나 족보를 가지게 되었고 양반 아닌 사람이 없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족보는 지금도 여전히 한민족의 혈통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기록되어 갈 것이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지금에 이르러 자식들이 아버지의 성씨를 따르기도 하고, 어머니의 성씨를 따를 수도 있게 한다고 하니 수천 년 간 이어져온 부계혈통 중심주의가 파괴되어 우리는 머지 않은 장래에 혈통을 구분할 수 없게 되어 같은 할아버지 후손끼리 또는 같은 부모 소생의 남매끼리도 혼인을 하게 되는 극한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고, 그 법을 만들 때 과연 그러한 폐해까지도 깊이 검토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한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른 사람은 어느 집안 족보에 기록해야 할까?
  만약 어느 사람이 있어 아버지는 김씨이고, 어머니가 박씨인데 그 자녀가 어머니 성을 따라 박씨라는 성씨를 자신의 성씨로 등록했다면 그는 어느 집안 족보에 기록될 수 있을까?
  지금의 기준으로는 그 사람은 아버지의 성씨를 따라 김씨가 되었을 것이고 김씨 족보에 기록되어야 마땅할 것이지만 아버지의 김씨 가문에서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박씨 성을 따른 그 사람을 김씨 족보에 올려 줄 리도 없을 것이고, 외가인 박씨 집안에서도 비록 그 사람이 외가 성씨인 박씨를 따랐다 해도 그 아버지가 김씨이기 때문에 박씨 족보에 기록해 줄 리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시 옛날과 같이 족보가 없으면 상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족보에 기록되지 못하면 문제 있는 집안의 후손이라는 표시가 될 수도 있어 결혼을 할 때 큰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다. 
  또 어느 사람은 남녀평등을 내세우며 부모의 성씨를 한자씩 따서 성씨로 삼게 하자는 사람도 있으나 정말 바보 같은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10세대만 지나면 성씨만 1천자에 해당하는 사람도 생길 것이고, 족보라는 것은 존재할 수도 없게 된다.

 

☆ 모든 사람이 부모의 성씨를 따서 성씨로 삼는다면, 다음 1세대는 2자 성씨가 되고, 2세대는 4자 성씨가 되며, 3세대는 8자 성씨, 4세대는 16자 성씨, 5세대는 32자 성씨, 6세대는 64자 성씨, 7세대는 128자 성씨가 되어, 10세대가 되면 1,024자 성씨가 된다.

 

  우리는 지금 한민족이 앞으로도 혈통을 계속 지켜갈 것인가, 족보도 없는 상민으로 전락할 것인가 심각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