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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팔만대장경이 한반도 강화도에서 판각된 것이 아니라고라?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 2. 02:06

윤여동설 - 팔만대장경이 한반도 강화도에서 판각된 것이 아니라고라? - 최초주장

 

 

                                   

  우리는 지금 한반도 황해도가 옛 대방군이었고, 고려가 황해도 개성을 도읍으로 하고 500년 왕조를 존속했던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서의 기록들은 우리의 상식과는 너무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구오대사 고려 전을 보면,
  "고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 하였는데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으로서 경사의 동쪽 4천리쯤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닿으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닿고 북쪽으로는 말갈에 닿는다.
  (강역의 크기가) 동서 3천1백 리이고, 남북 2천리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 고려가 동서의 강역이 길고, 남북의 강역이 짧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고려와 관계가 밀접했던 송사 고려 전을 보면,
  "고려의 본래 이름은 고구려이다.
  우(禹)가 9주로 나눌 적에 기주 땅에 속했고, 주나라 때에는 기자의 나라가 되었으니 한나라의 현토군이다.
  요동에 있었는데 부여의 별종으로 평양성을 도읍지로 삼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원사 고려 전에는,
  "고려는 본래 기자가 봉해졌던 땅이다.
  그리고 부여의 별종으로서 일찍부터 살았던 땅이기도 하다.
  그 땅이 동쪽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백제에 이르는데 모두 큰 바다를 건너야 한다.
  서북쪽으로는 요수를 지나 영주에 인접하고 말갈이 그 북쪽에 있다.
  그 나라의 도읍지는 평양성으로 곧 한나라 낙랑군이다.
  말갈의 백산에서 시원하는 강을 압록강이라 부르는데, 평양은 그 동남쪽에 위치하여 이를 믿고 의지하면서 요해지로 삼았다.
  뒤에 땅을 더욱 넓혀 옛 신라, 백제, 고구려의 세 나라를 통합하여 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 임금의 성은 고씨로 처음 나라를 세워 당나라 건봉 초기에 이르러 나라가 망했다.
  수공 이후 자손들이 다시 그 땅에 봉작되어 차츰 자립했다.
  5대 시대 때에 이르러 고씨를 대신하여 그 나라의 임금이 되어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사람의 성은 왕씨이며, 이름은 건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명사 조선 전에는,
  "조선은 기자에게 봉한 나라였다.
  한나라 이전에는 조선이라 하였다.
  앞서 연나라 사람 위만에게 점거되어 있었으나 한 무제가 이를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토의 4군을 설치하였다.
  한 나라 말기에 부여 사람 고씨가 그 땅을 차지하여 국호를 고려로 고쳤다. 고구려라고도 하고, 평양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곧 낙랑 땅이었다. 그 후 당나라에 격파되어 동쪽으로 옮겨갔다.
  후당 때 왕건이 고씨를 대신하여 신라, 백제의 땅을 겸병하고 송악으로 옮겨 (금성을) 동경이라 불렀고, 평양은 서경이라 하였다.
  그 나라는 북쪽(서쪽의 오기)으로 거란과 인접하였고, 서쪽(북쪽의 오기, 거란과 여직의 방향이 바꾸어 기록된 듯 함)에는 여직, 남쪽에는 일본이 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 기록들을 읽으면서 중국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고구려와 고려를 혼동하고 있어 고구려에 관한 기록과 고려에 관한 기록을 뒤섞어 기록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기록에 신빙성이 없다고 치부했다.
  당나라를 이어 일어났던 송나라는 고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요, 금, 원, 명 역시 고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고려와 그들은 바로 이웃한 나라였다.
  수시로 사신이 오가고, 어떤 때는 전쟁을 하기도 했다.
  서로가 이웃한 나라의 역사나 실정을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와 이웃했던 나라의 사가들은 고려에 대하여 왜 이렇게 혼란스럽게 기록했던 것일까?

 

☆ 중국 세력들은 고려가 고구려를 직접 계승한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이 남겨 질 수 있었을 것인데, 이는 고려가 실제 옛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려가 옛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었고, 평양성을 도읍으로 했다?
  그리고 고려 태조 왕건은 자신의 딸을 낙랑공주라고 불렀는데, 이는 고려가 실제 낙랑 땅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 고려가 평양성을 도읍으로 했다는 말은 옛 고구려가 평양성을 도읍으로 했다는 말일 수도 있고, 고려가 평양성을 서경으로 했다는 말일 수도 있는데, 고려 성종 때인 993년에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과 강동 6주를 놓고 담판을 할 때, 소손녕이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를 침식하고 있다" 라고 말하자 서희가 그에 반론을 제기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리하여 나라 이름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실제 이때 고려의 도읍은 개경이었고, 평양은 서경이었다.

     
   
  그런데 낙랑의 위치에 대하여 태강지리지에는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 라고 했고, 진서에는 "낙랑군 수성현은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 라고 했으며, 통전에는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고,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낙랑군이 한반도의 평양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갈석산 부근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고려 역시 한반도 황해도의 개성을 중심으로 존속했던 나라가 아니라 갈석산 부근의 대륙에 위치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으므로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경 역시 그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인데, 개경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으로 비정된다. 


  그렇다면 팔만대장경이 과연 한반도의 강화도에서 판각했는지도 의문스러워지는 것이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 각판(해인사 고려대장도감각판)은 이제 우리만의 문화재가 아니라 세계인의 문화재가 되었다.  
  고려에는 원래 지금의 팔만대장경이전에도 대장경과 속장경이 있었다.
  고려의 초조대장경은 고려 성종 10년(A.D.991)에 한언공이 송나라에서 귀국하면서 북송관판대장경을 가져오자 그를 저본으로 하여 서기 1019년부터 판각을 시작하여 1031년에 완성했고, 속장경은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조성되었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 19세 때인 문종27년(A.D.1073)부터 교장(불교에 관련된 서적)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선종 7년(A.D.1090)에 이르러 그 동안 수집한 불교전적을 정리하여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을 완성한다.
  그리고는 선종 8년(A.D.1091)에 흥국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총록에 수록된 저술들을 판각하기 시작하여 그가 열반에 들기 전에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 판각들은 부인사로 옮겨 보관하게 되는데, 후일 불타 없어지게 된다.
  지금 합천 해인사 장경각에 보존되고 있는 팔만대장경판은,

  당시 부인사에 보관되고 있던 초조대장경과 속장경이 고려 고종 19년(A.D.1232)에 몽고군의 침입 때 불타버리자 부처님의 위력을 빌어 외적을 퇴치하려는 발원으로 서기 1236년에 강화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또 분사도감을 두어 나누어 판각하게 된다.
  판각에 앞선 내용의 교정은 개태사의 승통 수기대사가 맡았는데, 이 팔만대장경은 16년만에야 완성할 수 있었다.
  이때 고려는 몽고군의 침공을 받아 온 나라가 짓밟히고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어수선한 때였다.
  그러한 어려운 때 어떻게 그 일을 시작하고 마무리 할 수 있었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다.
  특히 8만여 경판에 틀린 글자가 한자도 없으며, 모두 동일 한 서체로 판각되어 있다는 것은 신기하다 하겠다.
  경판을 새기기 전에 원문을 쓰는 것만 해도, 8만 장에 양면으로 새겼으니까 결국 16만 면 분량만큼을 써서 판에 붙인 후 돋을 새김으로 새겼다는 말이 된다.
  각자를 하는 것이야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겠지만, 원문을 쓰는데 만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1면를 쓰는데 1시간쯤 걸린다고 보면 16만 시간을 꼬빡 써야했다는 말이 된다.
  16만 시간이라면 하루 10시간씩을 쓴다해도 16,000일 분량이다.   
  16,000일은 약 44년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이 경판을 한 사람이 쓴다면 하루 10시간씩 하루도 쉬지 않고 44년 간을 써야 하는 분량인 것이며, 하루 24시간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쓴다해도 18년 이상을 써야 되는 분량인 것이다.
  따라서 이는 혼자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분량으로서 여러 사람이 나누어 썼을 텐데 어떻게 모두가 동일한 서체로 판각되어 있는지 불가사의라 하겠다. 
 
  대장경판의 판각을 마치자,

  처음에는 강화 서문밖에 판당을 짓고 보관했다가 얼마 후 강화 선원사로 옮겨 보관하게 된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선 태조 7년에 이르러 강화 선원사로부터 한양의 지천사로 옮겼다가 해인사에 영구 보존하게 되는데, 이 경판이 강화에서 한양 지천사로 옮기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태조7년(A.D.1398) 5월 10일과 12일 조에 나타난다.
  기록을 보면,
  "5월 10일 왕이 용산강에 거둥하였다.
  대장경의 목판을 강화의 선원사로부터 운반하였다.
  5월 12일 군사 2천명으로 하여금 대장경의 목판을 지천사로 운반하게 하였다. 검교참찬문하부사 유광우에게 명하여 향로를 잡고 앞서게 하고, 5교 양종의 승려들에게 독경하게 하며, 의장대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대장경판을 옮기는 일이 왕이 직접 참관할 정도로 중요한 국가 대사 중의 한 행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판은 한양의 지천사에 오래 보관되지 않고 다시 합천의 가야산 해인사로 옮겨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데, 지천사로부터 해인사로 옮긴 시기나 방법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지금의 한강을 타고 남한강으로 올라가 문경 새재를 넘어 합천 해인사로 운반했거나, 서해안과 남해안을 빙 돌아 낙동강을 타고 올라가 고령 동쪽의 개포나 옥포쯤에 도착한 후 육로로 합천 해인사까지 운반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사실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정종 1년(A.D.1399) 정월 9일 조에 "경상도 삼사에게 명하여 불경을 인쇄하는 승도에게 해인사에서 식량을 공급하게 했다. 태상왕(이성계)이 사재로 대장경을 인쇄하고자 하니 동북면에 저축한 콩과 벼 5백 4십 석을 잔주·길주 두 고을 창고에 납입하게 하고 해인사 근방 여러 고을의 쌀, 콩과 그 수량대로 바꾸게 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398년 6월부터 12월 사이에 해인사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서기 1398년 8월 25일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태조 이성계는 그해 9월 둘째 아들이었던 정종 방과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추측해 보면 팔만대장경 판은 1398년 5월에 강화의 선원사로부터 일단 한양의 지천사로 옮겼다가 곧바로 다시 합천 해인사로 옮겨 보관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국보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 팔만대장경판을 새긴 곳이 정말로 한반도의 강화도인가 하는 것이 의문으로 대두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반도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흔적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고, 고려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자리잡고 있다가 조선이 개국하면서 대륙의 개경으로부터 한반도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팔만대장경을 만든 장경도감이 설치되었던 강화도는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 조를 보면,
  "본래 고구려 혈구군(穴口郡)이다.[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부른다]
  신라 경덕왕이 해구(海口)라고 개칭했고, 원성왕이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했다.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꿔 현이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 때의 혈구가 지금의 한반도 강화도를 말하는 것일까?
  필자는 앞에서 고려의 도읍 개경이 지금의 중국 하북성 관성현으로 비정된다고 했는데, 강화도를 해구라고 했다는 것으로 보면 바다(또는 큰 호수)로 나아가는 입구쯤에 해당하는 곳에 강화도가 위치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고려의 도읍 개경으로 비정되는 중국 하북성 관성현(寬城縣)에서 폭하(瀑河)를 타고 내려오면 반가구수고(潘家口水庫)에 닿게 되는데, 옛 사람들은 내륙의 큰 호수도 해(海)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의 반가구수고 부근이 바로 팔만대장경판을 판각했던 고려의 강화도로 비정되는 곳이다.    
  따라서 팔만대장경은 한반도의 강화도에서 판각된 것이 아니라 지금 난하 중 반가구수고 부근에서 판각되었고, 그곳의 선원사에 보관되었다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도읍을 대륙의 개경(현 관성)으로부터 한반도의 한양으로 옮기게 되면서 팔만대장경 경판도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로 옮겨졌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강화 선원사로부터 팔만대장경판을 옮기는 것을 구경했다고 한 것은 사실은 지금 중국 북경 동쪽 난하의 반가구수고 부근의 강화 선원사로부터 발해와 서해를 건너 한반도의 한강을 타고 올라와 용산나루에 도착한 팔만대장경판의 운반작업을 지켜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한반도의 강화도에서 고려 때의 대장도감의 흔적을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시각을 돌려 지금 중국 하북성 반가구수고 부근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지금 대흑정수고 동쪽 하북성 천서현 청산관장성이 옛날 단군의 세 아들이 갑비고차에 쌓았다는 삼랑성으로 밝혀졌고, 그부근에 백제의 관미성이 있었다. 갑비고차는 혈구, 해구라고도 불렀고, 후일 강화로 바뀌었다. 지금의 청산관장성 부근이 원래의 강화인 것이다. 또한 고려때의 삼별초도 바로 이곳에서 대몽항쟁을 했었는데, 한반도의 강화도에서 그 모든 역사를 찾으려 하고 있으니 흔적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곳에 가서 찾아보면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한반도의 강화도에서 천년을 찾아도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대장도감 터는 찾지 못할 것이고, 팔만대장경과 관련 있는 선원사나 개태사는 원래 대륙에 있던 절이지 한반도에 있던 절들이 아닌 것이다.
  지금의 한반도 강화도는 팔만대장경이 판각된 곳이 아니며, 고조선의 단군과 관련 있는 곳도 아닌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한반도 강화도의 제천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낸 곳도 아니며, 단군이 세 아들을 보내 갑비고차에 쌓았다는 삼랑성도 한반도 강화도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지금 한반도 강화도에는 조선시대에 잘못 전해진 전설이 있을 뿐이다.  
 

☆ 지금 대구 팔공산에 부인사가 있고, 충남 논산 연산에 개태사라는 절이 있으나 사실 이 절들은 대장경과 직접 관련 있는 절들이 아니라 조선초기에 대륙의 부인사나 개태사와 동일한 이름으로 새로 지어진 절들이다.

 
  어찌되었든 팔만대장경 경판들이 대륙에서 만들어지고, 온갖 우여곡절을 모두 견디고 조선 초에 한반도로 옮겨져 지금까지도 뒤틀리거나 벌레 먹지 않고 건재하고 있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이를 얼마나 정성 들여 만들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고, 그의 보관 방법도 과학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부처님의 가호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