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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엔닌은 지금의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 7. 01:20

윤여동설 -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엔닌(圓仁)은 지금의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 최초주장

 

 

                                                                연력사 근본중당

 

  고려의 위치를 정확히 밝혀줄 수 있는 기록이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면, 통일신라와 일본의 위치를 정확히 밝혀줄 수 있는 기록은 일본 승려 원인(圓仁: 엔닌)이 쓴 기행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엔닌

 

  원인(엔닌)은 서기 794년에 태어났다.
  15세인 808년에 비예산(比叡山:히에이산)의 천태종 사찰 연력사(延歷寺:엔랴꾸지)에서 창건주인 전교대사(傳敎大師) 최징(崔澄: 사이쪼)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35세 경 한 때 하산하여 포교를 하기도 했으나 곧 다시 비예산으로 돌아와 득도를 위한 참선에 정진하게 되는데, 원인은 이때 삼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 앉아 3년 간이나 용맹정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인명천황(仁明天皇)의 명을 받아 불교 공부를 위해 838년 6월 13일 당나라로 향하게 되었고, 7월에 이르러 양자강 하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중국 관헌들이 절강성 천태산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무려 11개월이라는 오랜 기간을 허송세월하고 있었다. 
  이때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839년 6월 7일 산동반도 끝 적산에 있는 적산승원(적산법화원)에 도착해 그곳에서 다시 7개월을 머무른 후 다음해 봄인 840년 2월 19일 다시 그곳을 출발해 당나라 이곳 저곳에서 불법을 구하다가 적산법화원으로 돌아와 신라 배를 타고 귀국 길에 오른다.

 

                                                                        적산 법화원

 

 

  서기 847년 9월 2일 정오에 적산법화원을 출발해 고이도, 무주 남쪽의 황모도, 안도를 경유해 847년 9월 10일 저녁 때 일본 송포군 녹도에 도착하게 되고, 848년 3월 29일 비예산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원인은 무려 10년 가까이 당나라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런데 원인은 일본을 출발할 때부터 귀국할 때까지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일기형식으로 기행문을 써서 전했는데, 이것이 바로 "입당구법순례행기"이다.
  승려의 눈으로 당시 당나라의 실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 대로 적은 당대의 기록이고, 우리 신라와 일본의 위치를 정확히 밝혀줄 수 있는 아주 귀중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이때 원인이 지금의 일본열도를 출발하여 서남쪽으로 향하여 동중국해를 건너 양자강 하구로 갔을 것이고, 돌아올 때는 산동반도의 적산법화원을 출발하여 동쪽으로 서해(황해)바다를 건너 한반도 서쪽의 연안항로를 따라 전남 무안 앞 바다에 있는 고이도를 통과한 후 진도를 돌아 남해안으로 들어서서 완도를 지나고 여수 남쪽의 안도를 지나 대마도를 경유해 일본으로 갔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원인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의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연 이 기록이 사실일 수 있는지 매우 의문스럽다. 
  기록을 보면,
  원인은 847년 9월 2일 정오에 적산포를 출발한다.
  적산포는 지금의 중국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 적산을 말하는 것으로서 산동반도 끝에 위치한다.
  그리고는 9월 2일 밤을 새워 항해하고 9월 3일을 낮, 밤을 계속 항해하고 9월 4일 낮 동안도 계속 항해하여 밤 2경(밤 10시경)에 고이도에 도착했다고 한다.
  항해 시간을 계산해보면 9월 2일 정오에서 9월 3일 정오까지 24시간, 9월 3일 정오부터 9월 4일 정오까지 다시 24시간, 9월 4일 정오부터 그 날 밤 2경까지 10시간을 계속 항해하였다고 했으므로 적산 출발 후 약 58시간 항해 끝에 고이도에 도착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한반도의 고이도는 전남 무안 앞 바다에 위치한다.
  원인의 기록을 한반도에 적용할 경우 산동반도 끝에서 전남 무안 앞 바다 고이도까지 오는데 58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옛날의 경우에는 돛단배이고 배가 작아 육지와 가까운 연안항로를 타고 항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산동반도에서 일본으로 간다면 동쪽으로 항해해 한반도의 백령도를 경유해 황해도 옹진반도로 건너온 후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인천 앞 바다를 지나고, 충남 태안 앞 바다를 지나, 군산 앞 바다를 지나고 부안, 고창, 영광, 함평 앞 바다를 지나 무안 앞 바다에 위치한 고이도에 도착해야 하는 멀고도 험한 여정으로서 최소한 열흘이상은 걸려야할 거리인데, 이렇듯 먼 거리를 58시간만에 항해한다?  
  그리고 다음 기록을 보면 원인(엔닌)은 9월 5일에 바람이 동남풍으로 변해 출발할 수가 없었다고 하고, 3경(밤 12시경)이 되어서야 고이도를 출발하게 되는데, 9월 6일 묘시(새벽 5시-7시 사이)에 무주 남쪽의 황모도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반도 남해안에 황모도라는 섬은 존재하고 있지 않다.
  다만 황모도가 무주 남쪽에 위치했다고 했으므로 이를 한반도에 비정할 경우 지금의 완도부근에 황모도가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고이도에서 완도부근까지 가는데 6-7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이게 과연 말이 될까?     
  그리고 또 9월 8일 5경(새벽 4시경)에 다시 황모도를 출발하게 되고,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에 안도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하게 되는데, 한반도에는 여수 앞 바다의 금오도와 소리도 사이에 안도라는 섬이 있다.
  기록 속의 안도가 지금 여수 앞 바다의 안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완도부근에서 안도까지 약 6시간쯤 걸렸다는 말이 되는데, 이 역시 말이 될까?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원인은 고이도나 황모도, 안도에서 탐라도가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탐라도가 지금의 제주도를 말한다면 무안 앞 바다에 위치한 고이도에서 어떻게 탐라도가 보일 수 있으며, 남해안의 완도 부근이나 여수 앞 바다 안도에서 어떻게 제주도가 보일 수가 있을까?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기록인 것이다.
 
  그렇다면 원인은 왜 이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왜국의 위치에 대하여 후한서 한전에는,
  "한은 삼종이 있는데 마한, 진한, 변진(변한)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고,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고, 그 북쪽은 예맥과 접했다. 변진(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며, 그 남쪽은 왜와 접했다. 모두 78국이며 백제는 그 중의 한 개 나라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한전 변진(변한) 조를 보면, 
  "그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韓), 예(濊), 왜인(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쇠)로 이루어지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으며, 또 두 군(대방군과 낙랑군)에도 공급하였다................그 중 독로국은 왜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변진(변한)과 왜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변진(변한)의 주변에 한(마한과 진한), 예(예맥), 왜, 대방군, 낙랑군 등이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진서 마한 전에는,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양직공도 왜국사 조를 보면 왜국의 위치에 대하여,
  "왜국은 대방의 동남쪽 대해 중에 있는데, 산과 섬에 의지하고 산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대방군의 동남쪽 바다 가운데에 왜국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수서에는 "왜국이 백제, 신라의 동남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구당서에는 "왜국이 경사에서 1만4천리 떨어져 있고, 신라의 동남 대해 중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구당서에는 당나라의 도읍이었던 장안 즉 지금의 서안에서부터 고구려까지 5100리, 백제까지 620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구당서에는 신라의 위치에 대하여,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먼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다. 동쪽과 남쪽은 큰 바다로 한정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백제와 접했으며,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수서에도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산다. 혹은 사라라고도 부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결국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가를 찾으면, 신라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신라의 위치를 찾으면 그 서쪽에서 백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신라의 서북쪽에서 고구려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라는 곧 옛 진한이고, 백제는 곧 옛 마한이며, 가야는 곧 옛 변진(변한)이니 삼한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한을 찾으면 한의 북쪽에서 대방군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대방군을 찾으면 그 동남쪽에서 왜국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기록들을 종합하여 각 국의 위치를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고구려

 
               대방군                  낙랑군              예              

 

                   마한(백제)                       진한(신라)

 

                                               변한(가야)


                                 왜    

  

  그런데 낙랑의 위치에 대하여, 사마천의 사기에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기록되어 있어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산해관 부근이 낙랑군 수성현이었음을 알 수 있어 그 부근에 낙랑군이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지금 북한의 평양 부근에 낙랑군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알고 있는 우리의 역사 상식과는 완전히 다른데, 거기에 더해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실 이는 한반도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고, 경주가 신라의 천년도읍 금성이었다고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로서,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라가 위치하고 있었을 진황도 산해관 부근으로부터 서쪽방향인 당산과 천진, 낭방, 보정, 창주 일원에 마한과 백제가 있었을 것이고, 산해관의 서남쪽인 창려 부근에는 가야가 있었을 것이며, 산해관의 동북쪽에는 예가 있었을 것이고, 산해관의 서북쪽인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 고구려가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곧 천진·당산 부근이 마한, 산해관 부근이 진한, 창려 부근이 변한이었다는 말이 되는데, 한이 대방군과 낙랑군의 남쪽에 위치했다고 했으니 결국 대방군의 위치는 지금의 북경 동쪽 평곡,계현 부근을 말하는 것이 되고, 낙랑군은 승덕시 부근이 되며, 마한과 변한의 남쪽에 위치했고, 대방군의 동남쪽에 위치했다는 왜국 역시 지금의 발해 부근에 위치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사실이 이러했다면 이것이 바로 역사의 천지개벽이 아니고 무엇이랴!
 

☆ 이렇듯 수많은 기록들이 한나라 때의 낙랑군 위치를 말해주고 있고,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알려주고 있으나 대개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라가 한반도 경주에 도읍하고 있었지, 무슨 만리장성이 시작되었고 갈석산이 있는 중국 하북성 진황도 부근에 신라가 위치했겠느냐며 말도 안된다고 펄펄 뛴다.
  물론 한반도 경주가 신라의 서라벌(금성)이라고 세뇌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 와서 사실은 그게 아니라 신라가 중국 진황도 부근에 있었던 것이라고 사실을 밝혀준다 해도 그것을 선뜻 받아들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고, 우리가 한반도 삼국의 기록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삼국사기 기록들이 사실은 중국 난하를 중심으로 위치했던 대륙삼국의 기록이라고 말해 준다해도 역시 선뜻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을 비롯한 고려의 학자들도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했고,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있고, 남쪽에 가야가 있다고 했으며, 마한의 동북쪽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하고 있으니 결국 삼국사기는 한반도가 아닌 북경 동쪽 난하 부근의 대륙에 위치했던 삼국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삼국사기 기록을 한반도 삼국의 역사서로 인식하고 있으니 우리 모두는 지금 엉터리 역사 교육을 받고 세뇌되어 있는 역사바보들인 것이다.

 
    
  왜국(일본)이 지금의 일본열도가 아닌 발해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원인은 일본으로 귀국하기 위해 산동반도 끝에 위치한 적산법화원을 떠나 남쪽으로 향할 것이 아니라 그 반대방향인 북쪽으로 향하여 산동반도를 돌아 발해를 건너야 했을 것인데, 그는 58시간의 항해 끝에 무주의 서남쪽에 있는 고이도에 도착했다고 한다.
  무주란 옛날 백제의 동성왕이 탐라에서 조공을 바치지 않아 그를 치려고 무진주(무주)까지 가자 탐라에서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했다는 기록 속의 장소이고, 후백제의 견훤과도 관련 있는 장소인데, 옛 백제(대륙백제)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하류 일원이 중심 강역이었고, 탐라는 그 남쪽에 있는 조비전을 말하는 듯 하며, 무주(무진주)는 지금의 당산시 당해 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통일신라는 지금의  당산시, 진황도시, 호로도시, 승덕시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인은 무주의 서남쪽에 위치한 고이도에서 탐라도가 보인다고 했고, 필자는 탐라도가 지금의 당산 남쪽 조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했으므로 이때 원인은 산동반도 끝의 적산법화원을 출발해 연안항로를 따라 산동반도를 돌아 위해, 연대, 봉래, 내주 앞 바다를 지나고 황하구를 지나 천진신항 부근을 통과한 후 고이도에 도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원인은 고이도에서 바람이 동남풍으로 불어 출발을 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바람방향이 바뀐 삼경 즉 밤 12시쯤에야 고이도를 출발하게 된다. 
  당산 남쪽의 발해에서 서북쪽이나 북쪽은 육지이므로 동남풍이 불때 항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밤 12시가 되어서야 바람이 서풍으로 바뀌자 고이도를 출발해 동쪽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고, 6-7시간의 항해 끝에 무주 남쪽 황모도에 도착하게 되고, 다시 황모도를 출발해 6시간 정도 항해하여 안도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무주는 당산시 당해 부근을 말하는 것인데, 황모도가 그 남쪽에 위치했고, 황모도와 안도에서도 탐라도가 보인다고 했으므로 황모도와 안도는 지금의 당해 남쪽 바닷가에 위치했을 것이다. 원인은 안도에서 다시 약 30시간 항해 끝에 일본 송포군 녹도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원인은 이때 안도를 출발하여 지금의 난하구를 지나고 북대하 앞 바다를 지나, 진황도 앞 바다를 지나고 수중, 호로도 앞 바다를 지나, 대릉하구를 지난 후 요하구 부근의 녹도에 도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고대 일본은 지금의 일본열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발해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고, 통일신라 역시 진황도와 호로도, 당산 부근의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황당한 이야기라서 믿어지지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대역사와 일본의 고대역사가 처한 상황이다.
  일본인들이 왜곡된 우리 고대역사를 빌미로 삼아 자신들의 역사를 일본열도에 적용해 해석하려 애쓰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조선은 대륙의 개경에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된 후 한반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지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역사를 왜곡했고,

  일본인들은 만세일계라고 자랑하는 천황이 사실은 600여년전 대륙으로부터 일본열도로 건너간 도래인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자신들의 고대역사를 왜곡해야만 하는 것이고,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고 해야 하는 것이며, 낙랑이 한반도 평양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고, 신라, 백제, 고구려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왜국도 아주 먼 옛날부터 지금의 일본열도에서 역사를 이어온 것으로 역사를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가 대륙의 역사임이 사실대로 밝혀지면 일본의 대륙역사 역시 밝혀져 천황이 도래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기를 쓰고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와 진황도, 요녕성 호로도시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한나라 때의 낙랑군, 낙랑동부도위가 한반도의 평양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원인(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필자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 읽어본다면 그 기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원인(엔닌)이 왜 그렇게 기록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일본은 지금의 일본열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요동반도부근에 위치했었다.
  따라서 원래 원인이 출가했던 비예산(히에이산)의 연력사(엔랴꾸지) 역시 지금의 일본 쿄토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 지금 일본 쿄토의 비예산은 후대에 이르러 붙여진 이름이고, 지금의 연력사는 후대에 이르러 일본이 대륙으로부터 열도로 옮겨간 후 그곳에 절을 새로 짓고 대륙 연력사의 연혁을 열도에 새로 지은 연력사에 그대로 적용시켜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