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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화 - 춘향전의 원전은 고구려 안장왕과 백제 처녀 한씨 미녀와의 사랑 이야기인가?

윤여동 2008. 1. 23. 07:51

윤여동설화 - 춘향전은 고구려 안장왕과 백제 처녀 한씨 미녀와의 사랑이야기

 

  

                                                 

                                                                                                 남원 광한루 

 

  삼국사기 권제37 잡지제6 지리4 고구려, 백제 조를 보면,
  "왕봉현[개백이라고도 한다.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만난 곳이라 하여 왕봉으로 불렀다]"
  "달을성현[한씨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올려 안장왕을 맞은 곳이라 하여 후일에 고봉으로 불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고구려 22대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사랑 이야기가 시작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 삼국 역사의 정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전해오기를 옛날 고구려 문자왕의 아들인 흥안이 태자시절 왕명을 받아 신분을 감추고 장사꾼으로 변복하고 백제의 개백현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 적정을 살피다가 백제군에게 발각되어 쫓기게 되었다.

 

☆ 삼국사기 문자왕 7년(A.D.498) 조를 보면, "봄 정월에 왕의 아들 흥안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문자왕 16년(A.D.507) 조에는, "왕이 장군 고로를 보내 말갈과 모의하여 백제의 한성을 치고자 횡악 아래까지 행군하여 주둔했더니 백제가 군사를 출동하여 맞받아 싸우므로 곧 퇴각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문자왕 21년(A.D.512) 조에는, "가을 9월 백제를 침공하여 가불, 원산 두 성을 함락하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태자 흥안은 510년경 백제의 한산 부근에 정보수집 차 상인으로 변장하고 침투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그리하여 도망치다가 급한 나머지 어느 큰 저택의 담을 넘어 들어가 숨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한씨 미녀(漢氏美女: 이름이 한주라고도 한다)라는 처녀의 집이었다.
  한씨 미녀는 쫓기는 흥안을 숨겨주었고, 며칠 함께 지내는 사이 둘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
  얼마가 지난 후 흥안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약속하기를,
  "이제 좀 안전해졌으니 나는 내 나라로 돌아가려 하오.
  지금은 위험하여 낭자와 같이 갈 수가 없으니 우선 혼자 돌아갔다가 머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이 땅을 회복한 후 그대와 정혼하겠오. 기다려 준다고 약속해 주시오"  
  "태자님께서 데리러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태자 흥안은 한씨 미녀에게 그렇게 약속하고는 어둠을 틈타 국경을 넘어 고구려로 돌아갔고, 몇 년 후 문자왕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한편,
  백제의 개백현(왕봉현) 태수가 한씨 미녀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는 청혼을 해 왔으나 한씨 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자 태수는 한씨 미녀를 잡아들여 옥에 가두어 두고는 온갖 협박과 감언이설로 꼬였으나 한씨 미녀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한씨 미녀가 옥에 갇혔다는 소문이 국경을 넘어 고구려 안장왕에게도 전해졌고 그 소식을 들은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만일 개백현을 회복하여 한씨 미녀를 구해오는 자가 있다면 황금 천냥을 주고 만호후에 봉할 것이다" 하였으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장군 을밀이 왕의 여동생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이 을밀의 신분이 낮다고 반대하여 이에 실망한 을밀이 병이 들었다고 핑계하고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왕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황금과 만호후는 필요 없습니다. 신이 한씨 미녀를 구하여 대왕께 올리겠으니 왕의 여동생을 저에게 주십시오" 하여 왕도 허락하였다.
  을밀이 수군 5천을 이끌고 떠나면서 왕에게 말하기를 "신이 먼저 개백현을 쳐서 회복하고 한씨 미녀를 살리겠으니 대왕께서는 대병을 거느리고 천천히 육로로 오시면 한달 이내에 한씨 미녀를 만나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한수 부근에 군사들을 숨겨 놓고는 결사대 20여명을 뽑아 변장시켜 옷 속에 무기를 숨겨 을밀이 이끌고 개백현에 숨어 들어갔다.    
 
  이때 마침 태수의 생일날이 되자 지방 호족들과 태수의 친구들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모여들었고, 흥을 돋우기 위하여 광대들도 불렀다. 
  태수는 한씨 미녀를 불러내 다시 한번 물었다.
  "네가 나의 청혼을 받아들인다면 평생을 호의호식하고 살게 될 것이요, 만약 거절한다면 오늘로 죽게 될 것이다. 어찌하려느냐?"
  그러자 한씨 미녀는,
  "나는 이미 정혼한 사람이 있소. 나는 그 분과 장래를 약속했고, 지금은 그 분이 멀리 가 있으나 언젠가 돌아오면 그 분과 혼례를 치룰 것이오"
  "정혼을 했다는 놈이 도대체 어느 놈이냐? 신분을 밝혀라"
  "밝힐 수 없오"
  "무어라 밝힐 수 없다고? 저 년이 토설할 때까지 매우 쳐라"
  "윽! 윽! 윽..................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에이 저런 발칙한...... 당장 죽여버려라"

 

☆ 단심가가 원래 백제의 한씨 미녀가 지었고, 정몽주가 그를 인용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이때 사방에서 수십 명의 장사들이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한씨 미녀를 구해주었는데, 고구려 을밀장군 일행이었다.
  을밀은 안장왕의 명을 받고 광대차림으로 한씨 미녀를 구하기 위해 미리 잠입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한씨 미녀에게 말했다.
  "지금 빨리 고봉산에 올라 봉화불을 올리시오"
  그리하여 한씨 미녀는 즉시 고봉산 꼭대기에 올라가 봉화불을 올렸다.
  국경에서 봉화불이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던 안장왕은 군사들을 이끌고 백제를 치고 한씨 미녀를 데리고 돌아가 혼인하였고, 한씨 미녀를 왕비로 삼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7년(A.D.529)조에,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 혈성을 빼앗으므로 왕이 좌평 연모에게 명하여 보·기병 3만을 거느리고 오곡 벌판에서 항전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2천여 명이 전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안장왕이 한씨 미녀를 구하기 위해 직접 출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안장왕과 한씨 미녀는 안장왕의 태자시절인 510년경 헤어진 후 약 19년 만에 재회했고, 재회한지 2년만인 531년 5월에 왕이 죽고 말았다는 말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을 너무도 안타깝게 생각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게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안장왕이 재위 13년 여름 5월에 죽었고, 왕비도 따라 죽어, 도읍인 평양성 부근에 묻히게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 사이에는 아들이 없어 다음 왕위는 안장왕의 동생인 안원왕 보연이 오르게 되는데, 이를 보면 안장왕도 평생 한씨 미녀를 잊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 후에도 혼인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천생 연분이 아니고서야..................     
 

 
☆ 춘향전이 바로 이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사랑이야기를 조선시대에 이르러 새롭게 각색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이 고구려의 흥안태자(후일의 안장왕)와 한씨 미녀가 처음 만났다는 왕봉(개백)이나 고봉이라는 곳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 고양군 조의 건치연혁을 보면, "고봉현은 본래 고구려의 달을성현인데, 신라 경덕왕이 고봉으로 바꾸고 교하현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행주는 본래 고구려의 개백현인데, 신라 경덕왕이 우왕(또는 왕봉)으로 바꾸어 한양군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로부터 그 이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대륙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왕봉현(개백현)이 지금의 한강하류 행주산성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고봉현을 경기도 고양 부근으로 비정하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이때 고구려는 문자왕(재위:492-519) 때였고, 백제는 무령왕(재위:501-523) 때였는데,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이었고, 백제의 도읍은 웅진이었다.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고, 백제의 도읍 웅진은 지금의 충남 공주가 아니라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이다.
  앞서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해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잡아죽이게 되어 문주왕이 왕위에 올라 급히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상태였다.
  따라서 이때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은 지금의 황애관장성, 상관장성, 나문욕장성, 반가구수하장성 정도였을 것인데, 고구려에서 장성을 넘어 쉽게 백제를 공격할 수 있는 곳은 지금의 반가구수고를 통과하는 루트이다.  

  

  따라서 이때 고구려와 백제가 국경을 다투었던 곳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중국 하북성을 지나는 난하 반가구수고 부근이었으므로  왕봉현(개백)이나 달을성현(고봉)은 지금의 반가구수고 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태자 흥안과 백제의 한씨 미녀가 처음 만났던 곳도 지금의 반가구수고 부근이지 한반도 한강하류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지금 대륙에서 전개된 고대 역사는 물론 대륙의 설화까지도 한반도로 가져와 그 모든 것을 한반도에 비정해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 지금 난하 중 반가구수고 북쪽을 고구려에서는 패수라 불렀다.

       
 
[참고]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고구려 안장왕과 백제여인 한주의 사랑이야기

 

  고구려 안장왕은 문자왕의 태자로 태자시절에 상인의 모습을 하고 백제 땅인 개백에 들어가 백제의 사정을 염탐하다가 수상하게 여긴 백제군사들의 눈을 피해 그곳의 어느 큰집에 들어가 몸을 피했는데, 그 집은 한(韓)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으로 딸 주(珠)가 절세의 미녀였다.
  안장왕이 한번보고 반하여 주에게 접근하여 서로 마음이 통하여 사랑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로 정을 나누고 안장왕이 주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구려 대왕의 태자인데 귀국하면 대군을 일으켜 이곳을 취한 후 그대를 아내로 맞아들이겠다" 약속하고는 그 날로 도망쳐 고구려로 돌아갔다.
  문자왕이 죽고 서기 519년 안장왕이 왕위에 올라 한주를 데려오려고 수 차례 장수를 보내 개백을 쳤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개백의 태수가 한주의 미모를 듣고 주의 부모에게 청하여 주와 혼인하려 했으나 주가 죽기를 각오하고 거절하니 부모의 강요와 태수의 진노가 심하였다.
  이에 주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부모에게 이실직고하여 말하기를 "저는 이미 정을 준 남자가 있어 지금 먼 곳에 나가 있어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먼저 그 분의 생사나 알고 나서 혼인 여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니 태수가 더욱 화를 내며 "그 남자가 누구냐? 어찌하여 바른대로 말하지 못하느냐? 이는 필시 고구려의 첩자일 것이니 적국의 첩자와 통하였으니 너의 죄는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다" 하고 옥에 가두어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한편으로는 온갖 감언이설로 설득하려 했으나 주가 옥중에서 노래하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니 듣는 자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태수가 이 노래를 듣고는 더욱 노하여 한주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한편 안장왕은 한주가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스러워 신하들을 모아 놓고 말하기를 "만일 누구든지 개백현을 회복하여 한주를 데려오는 자가 있으면 황금 천냥과 만호후로 봉하겠다" 하였으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장군 을밀이 왕의 여동생 안학을 사모하여 서로 사랑을 하였는데, 안장왕이 을밀의 출신이 낮다고 반대를 하는 바람에 을밀이 실망하여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왕에게 나아가 "황금과 만호후는 다 필요없고 오로지 안학을 제 아내로 삼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신이 안학을 사랑함이 왕께서 한주를 사람함과 같아오니 대왕께서 만일 신의 소원을 들어 주신다면 신이 한주를 구하여 대왕께 올리겠습니다" 하니 왕이 동생 안학을 아끼는 마음이 한주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못함을 깨닫고 하늘에 맹세하고 을밀의 조건을 허락하였다.
  을밀이 수군 5천을 거느리고 떠나면서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먼저 백제를 쳐서 개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살리겠으니 대왕께서는 대병을 이끌고 천천히 육로로 오시면 한달 이내에 한주를 만나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는 출전하여 한수에 군사들을 숨겨 놓고, 비밀리에 결사대 20명을 뽑아 변장하고 옷 속에 무기를 숨겨 을밀이 이끌고 개백현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때에 마침 태수의 생일이 되어 근처의 관리와 친구를 불러 잔치를 베풀고 다시한번 한주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한주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오늘 너를 죽이기로 정하였으나 네가 마음을 돌리면 곧 너를 살려 줄 것이니 그리하면 오늘이 바로 너의 생일도 되지 않겠느냐?" 하자 한주가 대답하기를 "태수가 주의 뜻을 뺏지 않으면 태수의 생일이 되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태수의 생일이 곧 주의 죽은 날이 될 것이요, 반대로 주의 생일이 되면 곧 태수의 죽은 날이 될 것입니다" 하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에 태수가 대노하여 사형을 집행하라 하니 이때 춤추는 무객으로 변장한 을밀과 부하들이 즉시 무기를 빼어 하객들을 죽이고 고구려군 십만이 입성하였다고 소리치며 소란을 피우니 성안이 이 소식에 당황하여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옥을 부수고 한주를 구하는 한편 성밖의 군사들이 개백현을 공격하니 성이 쉽게 함락되었다.   을밀이 성안을 점령하고 창고를 봉한 후 안장왕이 오기를 기다리며 한수 일대의 각 성읍을 쳐서 항복을 받으니 백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안장왕이 이에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백제의 여러 고을을 지나 개백현에 이르러 한주와 감격의 재회를 하고 그 자리에서 아내로 삼고, 을밀에게도 약속대로 여동생 안학과의 혼인을  허락하니 이로써 두 쌍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