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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근초고왕을 알면 백제가 보인다(3)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 31. 07:03

윤여동설 - 근초고왕을 알면 백제가 보인다 (3) - 최초주장

 

[2편에서 계속]

 

백제의 근초고왕은 실제로 요서 진평현 땅을 차지했었다
 

송서 백제국전을 보면,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고,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 백제가 다스리던 곳을 소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백제가 요서 진평군 진평현 땅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고,   

양직공도 백제국사를 보면,
"百濟舊來夷馬韓之屬 晉末駒麗略有遼東樂浪 [百濟][略]有遼西晉平縣 自晉已來常修蕃貢
(백제는 옛날에 왔던 마한의 속국이었다.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 낙랑을 차지했고, [백제는]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 진나라 이래 항상 번국으로서 조공을 바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은 이 기록의 진위여부를 가지고 논란이 많다.
  왜냐하면 백제가 한반도에서 건국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서는 어떻게 백제가 서해 바다를 건너가 요서에 진평현을 설치할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백제가 대륙에서 건국되었고 그곳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이를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전한낙랑군은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었다가 서기 37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일단 소멸하고 그 땅은 고구려의 소유가 된다. 그러자 후한의 광무제가 서기 44년에 다시 그 낙랑 땅을 침공하여 살수 이남을 고구려로부터 되찾아 다시 낙랑군을 부활시키게 되는데, 필자는 이를 후한 낙랑군이라 부르고, 그 위치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으로서 서기 313년까지 존속했다.  

 

  고구려 미천왕은 서기 311년에 요동 서안평을 쳐서 빼앗고, 313년에는 후한 낙랑군을 쳐서 그 땅을 고구려의 강역으로 편입시키게 되며,  314년에는 대방군을 고구려 땅으로 편입시킨 후 현토군과 요동군을 수시로 공격하다가 331년에 죽고, 그 아들인 고국원왕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는데, 이때는 서진이 쇠약해져 동진과 5호16국 시대가 전개되던 때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중국 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평양성으로부터 환도성으로 옮겨 살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이때 고구려의 서쪽에 위치했던 연나라 역시 남쪽의 중국 쪽으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후방의 고구려가 있어 마음놓고 남하할 수가 없게 되자 연나라는 먼저 고구려를 쳐 약화 시켜 놓은 후 남하할 작전을 세우게 되는데, 이때 고구려는 연나라의 기만전술에 속아 환도성을 함락 당하게 되어 왕이 거처를 급히 평양 동황성으로 옮기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되고, 이때 대륙백제는 근초고왕과 계왕의 아들이었던 무광왕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내란으로 번져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서기 369년에 이르러 내란을 승리로 이끈 근초고왕의 대륙백제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직접 보기병 2만을 이끌고 침공하게 되는데, 근초고왕은 태자인 수(후일의 근구수왕)를 보내 그를 맞받아쳐 승리하게 되고, 371년에 고구려가 다시 침공해 오자 근초고왕이 직접 출전하여 패수가에 군사들을 매복 시켜 놓았다가 갑자기 나아가 쳐 승리하게 된다.
  그러자 근초고왕은 10월에 이르러 군사 3만을 몰아 고구려의 옛 도읍인 평양성을 향하여 진군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 이 전쟁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게 되어 백제가 승리하게 되고, 백제는 도읍을 한산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 대륙백제의 원래 강역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하류 일원이었고, 고구려의 평양성은 난하의 중류인 하북성 승덕시였으며, 옛 후한 낙랑군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곳은 당산 바로 북쪽인 승덕시 흥륭현 일원이었다.
  따라서 이때 고구려와 대륙백제는 지금의 만리장성인 황애관장성, 상관장성, 나문욕장성, 반가구수하장성 등을 국경으로 하고 있었을 것인데,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바로 도읍을 북쪽으로 전진 배치한다는 것은 이때 대륙백제가 꽤나 넓은 땅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았다는 말이 된다.
  즉 대륙백제는 이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쪽으로 강역을 넓히고 도읍을 지금의 도산 부근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는 내친 김에 요서로도 진출하여 그 땅도 고구려로부터 빼앗았기 때문에 백제가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고 기록하여 전해지게 되었을 것이다. 
  동진은 420년에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데, 대륙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로부터 많은 땅을 빼앗은 시기는 서기 371년이었을 것이고, 진나라의 말기에 해당하므로 백제가 진(晉)나라 말기에 요서의 진평현을 빼앗아 차지했다는 기록은 바로 근초고왕 때가 틀림없고, 근초고왕은 백제 최초로 동진 간문제 때 "진동장군 영낙랑태수 백제왕"이라는 작위를 받은 왕이다. 
  따라서 양직공도 백제국사의 기록 중 "백제가 진나라 말에 요서 진평현을 빼앗았다"는 기록은 이때 대륙백제가 요서의 진평현 지역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차지했다는 기록이고, 이때 대륙백제가 요서지역을 실제로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요동 낙랑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요서 진평현이란 지금의 북경 서남쪽 방산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후대 동성왕 때 북위의 수십만 기병이 백제를 침공했고, 동성왕이 장수들을 보내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 역시 대륙백제와 북위가 대륙의 북경 부근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근에서 일어났던 일이었지 북위가 서해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백제를 공격했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 그랬다가 백제는 서기 502년인 무령왕 2년에 요서, 진평의 백제군을 고구려에게 빼앗겼다가 20여년 후인 521년경에 다시 그 땅을 회복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