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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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의 도읍 황성과 장안성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2. 3. 03:27

윤여동설 - 고구려의 도읍 황성과 장안성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공개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부근의 지형도인데, 이 부근이 고조선의 왕검성, 고구려의 평양성, 황성, 장안성 그리고 고려의 서경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중심 강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 북경 동쪽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이었고, 난하가 옛 패수이다. 


  백제는 대륙인 발해 북쪽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에서 13대 근초고왕과 12대 계왕의 아들이었던 무광왕이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패한 무광왕이 서기 365년경 한반도로 건너와 지모밀지에 도읍하고 다시 백제(반도백제)를 건국함으로써 한반도에 백제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고,

  대륙백제는 근초고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가다가 삼근왕 때 반도백제에 흡수 통합되어 반도백제의 건국시조 무광왕의 후손인 동성왕이 대륙으로 건너가 왕위에 오르고,

  신라는 옛 진한이었던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서 건국되었고, 가야는 옛 변한이었던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시 흥성 부근으로부터 산해관 사이에서 건국되었다.
  고구려는 졸본 즉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 부근에서 건국되어 2대 유리왕 때 국내성 즉 지금의 북경시 연경현 영녕진 부근으로 도읍을 옮겼고, 10대 산상왕 때 다시 환도성(회유 발해진 부근)으로, 11대 동천왕 때 평양성(하북성 승덕시)으로, 16대 고국원왕 때 또 다시 환도성으로 갔다가 연나라의 견제침공으로 환도성이 함락되자 바로 평양 동쪽 황성으로 갔다가, 20대 장수왕 때 평양성으로 또 도읍을 옮겼으며, 25대 평원왕 때 다시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한반도 압록강 북쪽 집안은 고구려의 국내성이 아니다

 

  ☆ 평양성은 청나라 때의 행궁이었던 피서산장(열하행궁이라고도 한다)이 있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평양 동쪽의 황성은 지금의 열하행궁 동쪽에서 찾아야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지리지의 주를 보면, "혹자는 말하기를 고국원왕 13년에 평양 동쪽 황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지금 서경의 동쪽 목멱산 가운데에 있다고 하니 그 옳고 그른 것을 알 수 없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사기 편찬 당시 이미 평양동황성은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학자들은 고려의 서경을 한반도 북한 평양으로 알고 그 동쪽에서 황성을 찾으려 해 그곳의 대성산성이 고구려의 황성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부식이 말한 고려의 서경은 한반도 북한 평양을 말한 것이 아니라 청나라 때 청나라 황제들의 여름 행궁인 피서산장(옛 고조선의 왕검성이었으며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다)이 있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를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우리의 고대역사를 찾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 연나라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현 북경 북쪽 발해진 부근)이 함락되자 바로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옮겨 살았는데,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무열하 동쪽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은 311년에 서진으로부터 요동 서안평을 빼앗았고, 313년에는 후한 광무제가 서기 44년에 살수 이남 땅에 설치했던 후한낙랑군을 쳐서 빼앗았으며, 314년에는 대방군을 쳐서 빼앗음으로 해서 고구려의 강역을 무척 많이 넓힌 왕이었다.

  그리하여 그 땅을 이어받은 고국원왕도 강역을 넓히고자  평양성으로부터 환도성으로 옮겨온다.

  이때의 환도성은 고구려의 도읍은 아니고 임시도읍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모용황도 중원으로 진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구려가 연나라의 후미를 칠까 염려되었으므로 먼저 고구려를 무력화 시켜 놓은 후 중원으로 진출하려고 고구려를 먼저 침공하게 된다.  

  이때 고구려는 연나라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을 함락 당했고, 왕의 아버지 유골(이는 왕의 선조인 10대 산상왕의 유골이었을 것이다)을 탈취 당하였고, 또 왕의 어머니와 왕후가 볼모로 잡히는 수모를 당하게 되어 중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 급히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옮겨 살게 된다.

  이때 고국원왕이 왜 평양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옮겨 살게 되었는지 의문이지만 어찌되었든 고구려는 이 황성에서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 19대 광개토대왕 대를 지나 20대 장수왕 15년까지 고구려를 통치하였다.

 

한반도 북한 평양은 고구려의 평양성도 아니고 장안성도 아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4대 양원왕 8년(A.D.552) 조를 보면, "장안성을 쌓았다"라는 기록이 보이므로 이때 장안성을 쌓았을 것이고, 25대 평원왕 28년(A.D.586) 조를 보면,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가 이때 황성으로부터 다시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 편을 보면 "당서에는 '평양성을 장안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는데, 고기에는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하였으니 두 성이 같은지 다른지, 멀리 떨어져 있는지 가까운지 알 수가 없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삼국사기 편찬 시에 이미 장안성의 위치도 잃어버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고구려 장안성(長安城)의 위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필자가 밝혀본 바에 의하면 고구려의 첫 도읍 졸본은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 부근이고, 국내성은 지금의 중국 북경 북서쪽 연경현 영녕진 부근이며,  환도성은 북경 북쪽 발해진 부근이고,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며, 평양 동쪽의 황성은 승덕시 열하행궁에서 동쪽으로 무열하를 건넌 곳에 위치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장안성의 위치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다만 중국 사서들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이 곧 장안성이라는 기록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는 고구려 평양성과 장안성이 아주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황성과 장안성은 결국 평양성과 함께 평양 시내에 함께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지금까지도 대고구려가 유지되었다면 우리는 지금 대륙에 엄청 큰 땅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인데,

  깨우친 일부 사람(본 블로그를 읽는 사람들은 아마 깨우친 사람일 것이다)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옛 땅이 최소한 북경부근까지,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내몽골까지였음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으니

  광개토대왕이 이러한 사실을 아신다면 과연 무어라 말할까? 
  "내 나라의 옛 땅이 어디까지였는지도 모르는 이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 하지 않으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