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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원나라가 고려 땅에 설치했던 쌍성총관부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2. 18. 00:26

윤여동설 - 원나라가 고려 땅에 설치했던 쌍성총관부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조선 태조 이성계.
  그의 본관이 전주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조상들은 원래 전주를 본향으로 삼고 그 부근에서 대대로 살아왔을 것이다.
  그의 조상들은 원래 마한 사람이었다가 마한이 멸망하자 백제 사람이 되었고, 백제가 멸망하자 신라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성계의 먼 조상들이 백제나 마한에서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 확실히는 알 수 없고, 한(瀚)으로부터 기록에 나타난다.
  명사 조선 전을 보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유부(柳溥)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개조인 이단(이성계)은 본국 전주인 입니다.
  28세조 한은 신라(필자주 : 통일신라)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이 되었는데, 신라가 멸망하자 6세손 긍휴(兢休)는 고려에 들어갔습니다.
  13세손인 안사(安社)는 원나라에 벼슬하여 남경천호소[필자주 : 발해 때의 남경남해부로서 지금의 내몽골  옹우특기 일원]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이 되었습니다.

  원나라 말에 병란이 일어나자 안사의 증손자인 자춘(子春)이 아들 성계(成桂)와 함께 피난하여 동쪽으로 옮겨갔습니다."라고 말하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이성계의 가까운 조상은 이안사→이행리→이춘→이자춘→이성계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성계의 출생년도가 서기 1335년이므로 그의 아버지 이자춘의 출생년도는 1310년경이었을 것이고, 할아버지 이춘의 출생년도는 1285년경, 증조할아버지 이행리의 출생년도는 1260년경, 고조 할아버지인 이안사의 출생년도는 1235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필자주 : 이안사의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운 점이 많이 있다]
  따라서 이안사가 고려로부터 몽골로 들어간 때는 금나라가 멸망하고 난 이후인 고려 23대 고종(재위기간: A.D.1213∼1259) 때가 아닌가 싶은데, 그들은 원래 전주 부근의 호족으로서 그곳에 계속 살고 있었으나 고려말에 그곳을 떠나 동북쪽의 여진으로 들어갔던 것이 아닌가 싶다. 

 

☆ 여기서 말하는 전주는 한반도의 전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북성 당산 부근의 대륙전주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곳은 원래 마한 땅이었다가 백제 땅이 되었고, 다시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 땅이 되었던 곳이며,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 땅이 되었던 곳이다.

 

 

  그렇게 이안사로부터 아들 이행리, 손자 이춘으로 벼슬이 세습되었고, 증손자인 이자춘은 여진지역에 설치되었던 원나라 쌍성의 천호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공민왕 4년인 1355년 12월에 이르러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이 고려 공민왕을 찾아오게 된다.
  이때 이자춘이 고려로 와서 공민왕을 만났던 것은 모국인 고려로의 귀화를 타진해보기 위함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때 원나라는 원주민과 이주민을 차별하는 정책을 실시했으므로 고려로부터 여진으로 이주해 들어갔던 이자춘을 비롯한 고려유민들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때 원나라가 매우 혼란하여 나라가 오래 유지되기 힘들 것이라는 것도 계산에 넣었을 것이고, 때마침 고려의 공민왕도 반원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로의 귀화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자춘이 고려 공민왕을 찾아오자 왕은 그에게,         
  "네 할아버지(이행리)와 아버지(이춘)가 몸은 비록 원나라에 귀화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이 우리 왕실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조부(충선왕)께서도 총애하고 가상하게 여겼다. 이제 너도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욕되게 하지 않으면 내가 장차 그대를 잘 돌보아줄 것이다"라고 말해주어 이자춘은 이때 고려로의 귀화를 결심하게 된다.
  이때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나라의 지배 하에 있던 쌍성총관부 천호로 있었는데, 그는 공민왕에게 원래 그곳 땅의 주인인 고려가 다시 그곳을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고려가 쌍성을 치게되면 자신도 병력을 동원하여 돕겠다고 약속하게 된다.  
  그러자 공민왕은 그 다음 해인 1356년 7월 쌍성토벌군을 출동시켜 이자춘, 조도치 등과 협력하여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 땅을 되찾게 된다.
  이때 고려는 화주(和州)를 비롯한 쌍성총관부에서 관할하던 모든 지역을 수복했는데, 이 전투에 22세의 이성계도 그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참전했다.
  고려가 고종 45년 무오년(A.D.1258)에 원나라에 빼앗겼다가 실로 99년 만에 수복했던 것이다.

  

   이자춘은 쌍성총관부 탈환에 참여했던 공로로 태중대부 사복경으로 제수되고 집도 한 채 하사 받게 되어 개경으로 왔었으나 다음해인 1357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다시 동북면으로 되돌아가 그 지역을 안정시키다가 1360년에 죽는다.

  원래 쌍성부근의 땅은 매우 비옥하고 풍요로워 동쪽과 남쪽의 백성들 가운데 일정한 생업이 없는 자들이 많이 이곳에 들어와 살았었는데, 원나라에서 백성들을 잘 안무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점점 흩어지고 옮겨갔기 때문에 공민왕은 이자춘이 그 지역을 안정시킬 적임자라 판단하고, 대신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그에게 명하여 그곳을 맡아 다스리도록 하였더니 백성들이 이로 말미암아 생업에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고려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중국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이 고려의 동북쪽 여진 땅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살았으며 이성계의 아버지가 쌍성의 천호로 있었다는 고려의 동북쪽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앞서 서기 1231년 8월 몽골원수 살례탑이 고려를 침공했다가 물러가자 최우(최이라고도 한다)는 이듬해인 1232년 7월 강화도(필자주 : 한반도의 강화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난하 반가구수고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로 도읍을 옮겼는데, 때가 장마철이었던 관계로 비가 열흘동안이나 내려 진흙이 발목까지 빠져 안장을 얹은 말이 쓰러지기도 하고 귀족이나 양반가의 부녀자들도 푹푹 빠지는 진창을 맨발로 지나야 했다고 고려사절요는 적고 있다.   
  이때 최우가 도읍을 강화로 옮긴 것은 몽골에 반대하고 항몽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소식이 몽골에 전해지자 몽골에서는,
  "거란적을 평정하고 차라를 죽인 후에 고려에서 사신을 한 사람도 보내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죄이고, 사신을 보내 훈계하는 말을 전해 반성하도록 하였는데도 번번히 활로 쏘아 돌려보내니 두 번째 죄이다. 너희가 저고여를 모함하여 죽이고도 만노의 백성이 죽였다고 했으니 세 번째 죄요, 너희에게 진군을 명하고 곧이어 너희 대신에게 입조하라 명했으나 너희가 감히 항거하고 바다 섬으로 들어가 숨은 것이 네 번째 죄요, 너희 민호를 현재의 수효대로 보고하지 않고 번번히 거짓으로 아뢰니 다섯 번째 죄다." 하고는 이후 30여 년간 몽고의 고려 침략은 계속되었고, 1258년 4월에 이르러 유경, 김인준(김준), 임연 등이 최의를 살해함으로써 최씨 무신정권은 종말을 내리게 되지만 무신정권은 계속된다.

         
  이에 앞서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이 고주, 화주, 정주, 장주, 의주, 문주 등 15주의 사람들이 옮겨 사는 저도가 성은 크나 사람이 적어서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 하여 그 사람들을 죽도로 옮기자, 용진현 사람 조휘와 정주사람 탁청이 삭방도, 등주, 문주의 여러 성 사람들과 공모하여 몽골병을 이끌고 빈틈을 이용하여 신집평과 등주부사 박인기와 화주부사 김선보, 경별초 등을 죽이고 드디어 고성을 쳐서 집을 불사르고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여 마침내 화주(和州) 이북의 땅을 몽골에 붙였다는 기록과 몽골이 화주 이북 땅을 차지한 후 그곳 화주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여 조휘를 총관으로 삼고, 탁청을 천호로 삼았다는 기록에 따라 쌍성총관부가 고려의 동북쪽에 설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때 설치된 쌍성총관부가 실제 어디에 설치되었었는지는 아직까지 그 정확한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찾고보니 지금의 서랍목륜하 이남, 두만강 이북이 바로 1258년 고려 고종 45년 12월에 설치되었다가 1356년 공민왕 5년 7월에 유인우, 이자춘(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등이 격파함으로써 고려가 99년 만에 다시 수복하는 원나라의 쌍성총관부였던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곧 옥저의 옛 땅이었다.
  따라서 이성계의 출생지라는 화령은 한반도 영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천리장성의 맨 동북쪽 끝인 화주(和州)로서 내몽골 적봉부근일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그  부근이 고려의 동계, 동북면, 안변도호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고려의 위치는 고려 천리장성과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서랍목륜하의 남쪽에 위치해야 한다는 말로서 지금의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이 고려의 중심 강역이었다는 말이 된다.

  고려의 개경은 지금의 하북성 관성현, 서경은 하북성 승덕시, 동경은 요녕성 금주(錦州), 남경은 진황도 도산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곳 서랍목륜하 남쪽이 옛날 원나라가 설치했던 쌍성총관부였음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고려의 천리장성, 동북 9성과 함께 우리의 옛 고려 땅을 찾을 수 있는 움직일 수 없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우리의 대륙역사를 알지 못하고 모든 기록을 한반도에 비정하여 고대 역사를 해석하고 있으니 역사적 장소들을 한반도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