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어디에 장성을 쌓았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3. 00:34

윤여동설 - 한반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장성(長城)의 흔적 - 최초주장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장성(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한반도에서 장성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후대인 고려시대에 천리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역시 한반도에서는 찾을 수 없다.  
  고려가 서기 1033년에 천리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을 보면,     
  "서해 바닷가의 옛 국내성과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의 중간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덕(寧德), 영삭(寧朔),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새(淸塞), 평로(平虜), 영원(盈遠), 정융(定戎), 맹주(孟州), 삭주(朔州) 등 13주를 거치고 요덕(耀德), 정변(靜邊), 화주(和州) 등 3성에 대어 동쪽으로 바다에 닿으니 길이가 1천여 리에 뻗치고, 돌로 성을 쌓았으며,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는 이 기록을 보고 고려가 천리장성을 쌓았음을 알게 되었고, 역사 학자들의 저작물이나 교과서, 지리부도 등에도 고려가 압록강 하류에서부터 동해안 함흥까지 성을 쌓았다고 표기해 놓았기 때문에 그곳에 정말로 고려 때 쌓은 천리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고려의 천리장성 축성]

압→위 →흥→정→영→영 →영→운 →안→청→평→영 →정→맹→삭 →요→정→화→바
록   원   화   주   해   덕   삭   주   수   새   로   원   융   주   주   덕   변   주   다

 

 

그러나 실제 한반도에서는 압록강 하류 부근으로부터 동해바다까지 천리나 뻗쳤고, 돌을 다듬어 성을 쌓았으며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약 7.5m)에 이르는 장성은없다.
  이 정도 규모라면 중국의 만리장성에 비할 만한 규모의 장성인데, 중국에는 지금 2000년 전 진시황 때 쌓았다는 장성이 남아 있고, 그 후대에 고쳐 쌓은 장성들도 건재한데 한반도에는 무너진 장성의 흔적 하나가 없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고려의 역사서에 쌓지도 않은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기록했던 것일까? 
  아니다.
  고려는 한반도에 천리장성을 쌓은 적이 없으므로 한반도에서 고려 천리장성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온 국민을 속이고 학생들을 속이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고구려 천리장성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7대 영류왕 14년(A.D.631) 조를 보면,
  "봄2월 왕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그 성은 동북쪽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서남쪽의 오기)으로 바다까지 1천여 리였는데, 시작한지 16년 만에 준공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에서도 적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구당서 고구려전 정관5년(A.D.631) 조를 보면, "건무(영류왕의 이름)는 그 나라가 침입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동북쪽 부여성으로부터 서남쪽 바다에 이르기까지 1천여리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 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부여의 동쪽에는 말갈(숙신, 읍루, 물길, 여진)이 위치하고 있었고, 서쪽에는 거란이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가 나라의 부여성에서부터 바다까지 성을 쌓았다면 이는 주로 거란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았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 압록강 북쪽 환인이 아닌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 부근이고, 고구려의 평양성은 북한 평양이 아니라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서 영류왕 때 고구려의 도읍은 바로 그곳 이었다.
  승덕시 부근이 바로 고구려의 평양성이었고, 고조선의 왕검성이었다.
  그렇다면 영류왕은 평양성의 북쪽에 있는 옛 동부여의 도읍성으로부터 서남쪽으로 바다(또는 큰 호수)에 닿도록 천리장성을 쌓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때 영류왕은 점점 강해져가는 거란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에서부터 서남쪽으로 오란찰포시에 있는 대해(岱海)까지 천리장성을 쌓았을 것이다. 

 

 

☆ 대흥안령산맥에는 지금 언제 누가 무슨 목적으로 쌓았는지 알 수 없는 징기스칸루지(成吉思汗壘址:징기스칸변장이라고도 한다)라고 부르는 수백 리에 이르는 성의 흔적이 있고, 내몽골 적봉 부근에도 그 연대를 잘 알 수 없는 옛 성의 흔적들이 많고, 지금 내몽골 지역에는 연대와 축성목적을 잘 알 수 없는 고구려식 성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신라의 3백리 장성

 

  삼국사기 신라본기 41대 헌덕왕 18년(A.D.826) 조를 보면,
  "가을 7월 우잠태수 백영을 시켜 한산 북쪽의 여러 주와 군 사람들 1만을 징발하여 패강에 장성 3백리를 쌓았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 기록을 우리의 역사 상식에 맞추어 한반도에 비정한다면 신라의 헌덕왕은 300리나 되는 장성을 대동강 남쪽에 쌓았어야 한다.

[필자주 : 삼국사기 신라본기 33대 성덕왕 20년(A.D.721) 조에도, "가을7월 하슬라길 장정 2천명을 징발하여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북한 평양의 대동강을 패수, 패하, 패강으로 인식하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인데, 지금 대동강 남쪽에서 장성의 흔적은 발견된 적이 없다.
  그러나 신라의 위치에 대하여 신·구당서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고,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갈석산은 지금 중국에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 역시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에 있다.   
  따라서 낙랑군 역시 그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신라도 그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므로 결국 백제는 지금의 난하 중하류 일원을 차지하고 있다가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신라 헌덕왕은 패강에 3백리 장성을 쌓았다고 했으므로 패수(패강)를 찾으면 바로 그 부근에 장성을 쌓은 장소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패수를 북한 평양을 지나는 대동강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서 사실 패수(패하, 패강)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에 있는 난하를 말하는 것이고, 신라가 쌓은 장성은 지금의 반가구수고 부근의 장성을 말하는 듯 하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헌덕왕이 쌓은 3백리 장성은 지금의 난하 반가구 수고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

 

☆ 우리는 지금 진시황 때 쌓은 장성이 산해관 노룡두에서부터 쌓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진시황 때 쌓은 진장성의 동쪽 끝은 북경부근까지였고, 그 동쪽에 쌓은 장성들은 우리 삼국이 쌓고, 고려가 고쳐 쌓고 명나라 때 또 고쳐 쌓은 것이다. 북경 부근은 우리의 옛 땅이었다.

     

백제 장성

 

  백제 16대 진사왕 2년(A.D.386) 조를 보면,
  "봄 국내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관방을 설치했는데, 그 길이가 청목령으로부터 북쪽으로 팔곤성에 닿고, 서쪽으로 바다까지 이르렀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 백제에서도 장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는데, 장성의 길이가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백제가 국내의 15세 이상 되는 백성들을 총동원하여 성을 쌓았다면 그 성 역시 최소한 수백리 정도는 되었을 것인데 한반도에 또 이러한 규모의 장성은 흔적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사왕은 최소한 수백 리에 달했을 장성을 도대체 어디에 쌓았기에 장성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이는 기본적으로 이때 백제의 위치와 상황을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371년에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며 승리하여 강역을 북쪽으로 넓히고 도읍을 남한성에서 북한성(한성)으로 옮겨 놓고 죽고, 그 아들인 근구수왕이 왕위에 올라 재위 10년 만에 죽고, 다시 근구수왕의 장자인 침류왕이 왕위에 올라 재위 2년에 죽었는데 이때 태자가 어렸으므로 침류왕의 동생인 진사왕이 왕위에 오르는데, 바로 이 사람이 나라 북쪽에 장성을 쌓는 것이다.
  이때 백제(대륙백제)는 지금의 중국 북경부근까지를 차지하고 있었고, 요수를 건너 그 서남쪽 요서 진평현 땅도 가지고 있었는데, 백제의 진사왕은 근초고왕이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땅을 지키기 위한 장성을 쌓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금 밀운수고로부터 동쪽으로 반가구수고 부근까지 장성이 이어지는데, 이 장성들이 바로 백제 진사왕 때 백제의 북쪽에 쌓았던 백제장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 이때 백제는 지금의 밀운수고로부터 동쪽으로 반가구수고 부근까지 약 5백여리쯤 되는 장성을 쌓았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10년 후인 396년 백제 아신왕 때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58개 성, 7백개촌을 빼앗아 갔다. 따라서 진사왕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쌓았던 장성 축성 작업은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옛날 백제의 진사왕은 국내의 15세 이상되는 백성들을 총동원하여 그 험준한 곳에 장성을 쌓았던 것이라 생각되고, 조선시대 박지원은 북경에서 열하(현 하북성 승덕시)까지 가기 위해 바로 그 장성을 넘었지만 그 장성이 옛날 대륙백제 사람들이 쌓은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사람들도 그 장성이 우리의 대륙백제 사람들이 쌓았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