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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이왕은 백제판 수양대군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6. 01:01

윤여동설 - 고이왕은 백제판 수양대군인가? - 최초주장

 

백제 8대 고이왕은 왕위에 올라 백제의 기초를 충실하게 닦아 놓은 왕이다.
  그리하여 어느 역사학자는 수서와 북사에 기록되어 있는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비로소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 강국이 되었다" 라는 기록과 연관시켜 백제가 실제 고이왕 때 건국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백제의 왕위 계승에 대하여 세밀하게 연구해보지 않고 말하는 엉터리 같은 주장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8대 고이왕 조를 보면,
  "고이왕은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왕이 왕위에 있은 지 21년에 죽고 그의 장자 사반이 왕위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처리할 수 없으므로 초고왕의 동복아우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11대 비류왕 조에는 "비류왕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다" 라고 함으로써 초고왕과 고이왕이 동복형제였고, 사반왕과 비류왕이 형제사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이들의 세계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이 된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한 백제의 왕위 계승도]


                       4대 개루왕

                 ...............|................
                 ↓자                         ↓자
             5대 초고왕                   8대 고이왕           
                 ↓장자                      
             6대 구수왕

          ...........................
          ↓장자                 ↓차자 
      7대 사반왕    11대 비류왕

   

기록대로라면 손자인 사반이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 그를 퇴위시키고 작은 할아버지가 대신 왕위에 올랐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백제 초기 역사를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해석할 경우 앞뒤가 영 맞아떨어지지를 않아 학자들마저도 고이왕의 신분에 대하여 아직까지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조금만 세밀히 보면 삼국사기 기록에 오류가 있음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인데도, 학자들이 지금까지 이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록에 따라 각 왕들의 생몰연대를 따져 삼국사기 기록 중 어디가 잘못되어 있는지를 알아보자.
  백제 4대 개루왕은 재위 39년인 서기 166년에 죽었고, 그 아들이었다는 5대 초고왕이 죽은 때는 재위 49년인 214년이었으며, 8대 고이왕은 재위 53년인 286년에 죽었다.
  고이왕과 초고왕이 동복형제였다면 이 두 사람의 생몰 연대는 비슷해야 마땅한데, 무려 72년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백제 초기 기록이 이상하다고 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람의 명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동복형제가 72년이나 차이가 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평균연령을 살았다고 보고 생몰연대를 따져 1세대를 약 30년 정도로 계산한다면 고이왕은 초고왕의 손자뻘쯤 된다는 말이 되어 4대 개루왕의 증손자라고 할 수 있어 실제 고이왕은 4대 개루왕의 작은 아들의 손자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초고왕과 고이왕이 형제라고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잘못되어 있다는 말로서, 고이왕은 초고왕의 동복동생의 손자쯤이라고 해야 생몰연대가 맞게 되는 것이다.
  또한 5대 초고왕과 6대구수왕 7대 사반왕 11대 비류왕과의 관계를 삼국사기는 초고왕의 장자는 구수왕, 구수왕의 장자는 사반왕이고 둘째 아들은 11대 비류왕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 역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구수왕이 재위 21년인 234년에 죽었는데, 이때 구수왕의 장자인 사반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처리할 수 없어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했고,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 비류왕은 서기 304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 41년인 344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반왕과 비류왕이 정말 형제사이였고, 구수왕이 죽었을 때 사반왕이 나이가 어렸었다면 사반왕은 그 아버지인 구수왕이 죽기 전에 이미 태어나 있어야 하고 그 동생인 비류왕 역시 아주 어렸거나 최소한 입태되어 있어야만 그들이 구수왕의 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비류왕은 최소한 그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는 구수왕이 죽은 해인 서기 234년쯤에는 태어나야 하는 것인데, 그가 왕위에 오른 때가 304년이었으므로 비류왕은 71세에 왕위에 올라 재위 44년인 115세에 죽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구수왕의 아버지인 초고왕은 왕위에 올라 재위 49년에 죽었으므로 초고왕이 죽고 그 장자였다는 구수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구수왕의 나이가 이미 꽤나 많았을 것인데, 그는 재위 21년에 죽고, 그 장자인 사반왕이 나이가 어려 정사를 처리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초고왕이 약 30세쯤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약 80세쯤의 나이로 죽고, 이때 50세쯤의 구수왕이 그 왕위를 물려받아 70세쯤의 나이로 다시 죽었을 때 10세쯤의 사반왕이 왕위에 올라야 했다면 실제 사반왕은 구수왕의 장자가 아니라 구수왕의 장자의 아들 즉 구수왕의 장손자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구수왕의 장자는 그 아버지인 구수왕 보다 일찍 죽게 되어 구수왕의 나이 어린 손자인 사반왕이 왕위에 올랐었다고 정리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수서나 북사에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과 혼인을 하여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구태라는 인물은 이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공손도라는 인물은 후한 시대 사람으로서 후한은 광무제가 서기 25년에 왕망의 신나라를 없애고 한나라를 다시 복원하여 서기 220년까지 존속했던 나라였고, 공손도는 3세기 초에 죽었다.
  따라서 공손도의 딸과 혼인했다는 구태라는 인물은 공손도보다 약 30세 정도는 아래였을 것이므로 구태가 혼인한 때는 대략 서기 170년경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때는 백제 5대 초고왕 때에 해당하므로 구태라는 인물은 바로 초고왕과 비슷한 나이였다고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때는 백제의 왕위가 시조 온조왕 → 2대 다루왕(삼국사기는 다루왕이 온조왕의 장자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온조왕의 장손자였다) → 3대 기루왕(삼국사기에는 다루왕의 장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다루왕의 장손자였다)  → 4대 개루왕(삼국사기에는 개루왕이 기루왕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손자였다) → 5대 초고왕으로 이어져 내려와 이미 초고왕이 왕위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구태라는 인물이 대방 옛 땅에 다시 백제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을 리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구태라는 인물은 초고왕의 동생쯤으로 추정이 가능해지고, 실제 그는 백제의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나 그의 후손들이 백제의 왕위에 올라 나라를 부흥시켰기 때문에 나라가 점점 번성하여 동이 중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이는 수서나 북사에 동명의 후손인 구태라는 인물이 대방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잘못 전해졌다는 말이다.

 

 

☆ 일부 역사학자들 중에는 구태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밝혀보지도 않은 채 그 기록을 검토없이 받아들여 이를 근거로 삼국사기의 백제 초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백제의 건국시기를 고이왕 때쯤으로 내려 잡는 우를 범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수서나 북사의 기록이 잘못된 기록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고, 백제의 왕위 계승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시조 온조왕으로부터 백제의 왕위 계승도를 수정하여 그려보면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수정된 백제 왕위 계승도]
                         시조 온조왕
                             ↓자
                             ?(실명) 
                             ↓자
                          2대 다루왕
                             ↓자
                            

                            ?(실명)

                             ↓자                            
                         3대 기루왕
                             ↓자
                             ?(실명) 
                             ↓자                                                        
                         4대 개루왕
          

            ................................................ 
           ↓장자                                       ↓차자
       5대 초고왕                                  구태
           ↓장자                                       ↓자
       6대 구수왕                                    ?(실명)
           ↓자                                          ↓자         
           ?(실명)                              8대 고이왕 
           ↓장자     ↓차자                         ↓자 
       7대 사반왕   ?(실명)                9대 책계왕
                        ↓자                            ↓장자
                 11대 비류왕                 10대 분서왕
                        ↓자                            ↓장자
                13대 근초고왕               12대 계왕

 

  이것이 백제 초기의 왕위 계승도로서 결국 고이왕은 조카인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자신의 후손으로 왕위를 이어갔으나 후일 사반왕의 동생의 아들인 비류왕이 자라서 왕위를 되찾아갔고, 다시 계왕이 왕위를 빼앗아 갔고, 근초고왕이 다시 왕위를 되찾아 가게 되는, 뺏고 빼앗기는 왕위다툼을 벌였던 것이다.
  즉 백제는 장자파와 차자파 간에 약 100여년 간 왕위 다툼을 벌였던 것이고, 그 시작이 바로 고이왕 때부터였던 것이다.
  고이왕은 조선 초기 세조(수양대군)가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조선의 기틀을 튼튼하게 다졌던 것과 같이 그 역시 조카인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백제의 기틀을 튼튼하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고이왕은 백제판 수양대군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되면 백제 초기 왕위 계승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백제 초기의 역사를 부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역사학자들은 이 수정된 왕위 계승도를 놓고 백제 초기의 삼국사기 기록을 다시 한번 세밀하게 검토해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