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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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을 찾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6. 00:04

 

                           

                                      하가점 선사유적지 

 

                            

                                        내몽골 적봉 홍산

 

윤여동설 -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을 찾았다

 

              

 

                                          

      

                                  

 

  한 민족 마음의 고향이며, 우리 역사의 중심지인 왕검성(王儉城, 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은 과연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이 왕검성을 확실하게 찾지 못한 채 조선 시대에 이르러 역사를 착각한 일부 사람들이 한반도 북한 평양을 왕검성이라 비정해 역사를 해석함으로써 왜곡되고 축소된 역사가 사실인 것처럼 전해진 안타까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역사 인식도 한반도 안에 머무르게 되었고, 거짓 역사가 오랜 세월 진실이라는 탈을 쓰고 세상 사람들을 현혹시켜 지금은 반도사관이 뿌리 깊이 형성되어 필자같은 사람들이 광활했던 우리의 옛 땅이 발해 북쪽 대륙에 있었노라고 진실을 말해줘도 오히려 그것을 의심받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거야 말로 적반하장이다. 
  그러나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져야 하는 것이고, 거짓은 지탄받아야 하는 것은 세상사의 순리이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서야 하고, 옛 역사 기록들을 꼼꼼하게 뒤져 우리 역사의 중심점인 진짜 왕검성(王儉城)을 찾아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옛 강역을 정확히 모르고서는 역사 기록을 바르게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국지 한(韓) 전의 주(註)를 보면, 지금은 전하지 않는 위략(魏略)의 기록을 인용하여,
  "옛 기자의 후손에 조선후가 있었다.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동쪽 땅을 침략하려고 하자, 조선후 역시 자칭 왕이라 하고 주나라의 왕실을 존숭한다고 하면서 병사로서 연나라를 오히려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그 대부 예(禮)가 간하여 중지하고, 예로 하여금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여 중지토록 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사나워져,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어 공격하여 그 서쪽 땅 2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滿潘汗: 滿番汗이라고도 한다)으로 경계를 삼아 조선이 약해졌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 고조선이 고대 연나라의 진개에게 나라서쪽 2천여 리 땅을 빼앗기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이 진개에게 나라 서쪽 2천여 리 땅을 빼앗기기 전의 강역이 어디까지였으며, 만반한(만번한)이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가 하는 것이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르게 되어, 자연스럽게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다.

 

☆ 고대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진개에 대하여 위략은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었는데 조선의 인질이 되었다(燕有賢將秦開 爲質於朝鮮)"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가 고조선에서 인질생활을 하다가 도망쳐 연나라로 돌아간 후 자신이 오랫동안 인질생활을 했던 고조선을 공격하여 만반한 서쪽 2천여 리를 빼앗았다는 말이 된다. 고조선의 지리와 내부실정을 잘 아는 진개의 공격에 당시 고조선은 속수무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검성(王儉城)의 위치

  

  조선시대에는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지금의 한반도 북한 평양이라는 평양왕검성설이 일반적인 상식이었고, 근래에 이르러 왕검성이 한반도 북쪽 요동지역에 위치했다가 북한 평양으로 옮겼을 것이라는 왕검성이동설이 대두되었고, 중국 사서의 기록을 직역하여 하북성 창려가 왕검설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고, 아주 최근에 이르러 필자가 고조선·위만조선의 왕검성이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라는 승덕시왕검성설을 주장하게 되었는데, 왕검성을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연나라에게 빼앗긴 고조선 서쪽 2천리(혹은 1천리) 땅에 대한 해석도 전혀 다르게 된다.

  평양왕검성설은 지금 한반도 북한의 평양이 왕검성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서 이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평양이 왕검성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지금 북한의 평양이 왕검성이라는 것을 불변의 진리로 여겼고, 요수는 지금의 요하를 말하는 것이고, 압록수를 지금의 한반도 북쪽 압록강이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왕검성이동설은 왕검성이 지금의 요양 또는 심양 쯤에 위치했었는데,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서쪽 2천리(혹은 1천리)를 빼앗기게 되어 도읍 왕검성이 변경에 위치하게 되자 북한 평양으로 후퇴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설이다.
  따라서 원래의 요수, 압록강, 살수, 패수는 지금의 요하,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이 아니라 심양이나 요양의 서쪽에 위치한 강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기 조선전의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기 이전 연나라와 고조선의 경계가 패수였다는 기록을 염두에 둘 때 북한 평양을 지나는 대동강이 패수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날 패수와 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왕검성을 공격할 때의 패수가 다르다는 것이다. 즉 왕검성이 지금의 요동에서 북한 평양으로 옮겨오면서 강 이름도 따라서 옮겨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 주장 역시 평양왕검성설의 변형일 뿐 고조선이 한반도와 북쪽 압록강 너머 만주를 중심으로 존속했다고 보는 기본 주장은 같다.

 

☆ 아사달을 조양, 험독을 대안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창려왕검성설은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는 중국 사서들의 기록을 기본으로 삼아 그 부근이 낙랑군이 틀림없고, 낙랑군의 치소는 우거가 도읍했던 곳에 두었다는 자치통감의 기록과 사기의 주에 "昌黎有險瀆縣(창려에 험독현이 있다)"는 기록과 "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요동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기록과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이라는 기록을 그대로 창려에 적용해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이 곧 왕검성이었다고 비정하는 설이다.    
  그러나 지금의 진황도 창려는 지리적 위치상 이후의 역사기록들을 충족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어 지금의 창려가 곧 옛 기록 속의 창려이고, 왕검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창려가 왕검성이라면 창해군의 위치를 설명할 수 없고, 그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야할 한의 위치와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으며, 후일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된 한사군의 위치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고구려의 평양성을 설명할 수 없으며, 평양성의 동남쪽에 위치했던 신라와 평양성의 남쪽에 위치했던 백제의 위치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 진황도 북대하를 왕검성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해변에 나라의 도읍을 정했을 리는 없다. 이는 적군이 바다로 공격해 올 경우 도읍 방어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승덕시왕검성설은 필자가 주장하는 것으로서, 고조선의 중심인 왕검성을 한반도 평양이 아니라 발해의 서북쪽 지역에 위치한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보는 것이다.[승덕시에는 청나라 때 황제들이 연경지역의 더위를 피하여 정무를 보았던 피서산장(열하행궁이라고도 한다)이 있는데, 필자는 바로 이곳을 옛 왕검성터로 본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한반도 평양이 아닌 발해의 서북쪽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산해경의 해내경에,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산해경 속의 북해는 발해를 말하는 것이고, 중국 대륙 동해의 안쪽이면서, 북쪽 바다 모퉁이라고 기록한 것은 곧 발해의 서북쪽지역을 말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고,
  사기 권1 오제본기 제1에도,
  "헌원이 제후들의 군사를 징발해 치우와 탁록의 벌판(涿鹿之野)에서 싸웠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동이족인 치우천왕과 중국의 황제헌원이 탁록(현 탁주시)의 벌판에서 싸웠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황제헌원, 순임금, 맹자가 동이인이라는 기록들이 있으나 지금 중국인들은 그들을 모두 중국인이라 주장하고 있고, 공자 같은 이도 동이를 동경하여, "바다를 건너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는데, 이를 보면 이때 중국 보다 동이지역이 문화적으로 훨씬 앞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요하. 대릉하 주변에서 발견된 홍산문화(내몽골자치구 적봉부근과 요녕성 능원, 조양, 부신부근)는 중국 문명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선 문명이고 질적으로도 우수하여, 지금까지 동양문명의 중심지가 황하나 양자강 부근이라고 주장했던 중국학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많은 국내외 학자들은 이 홍산문화가 곧 동이문명이며, 그 주인공이 바로 우리 환인, 환웅, 고조선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곧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 탁록의 위치가 우리 역사를 해석하는데 중요한 것은 당시 치우와 헌원이 이 탁록의 벌판에서 싸웠다면 탁록(현 탁주시) 부근이 곧 두 나라간의 국경 지역으로서 상호 공수의 요충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그 부근을 중심으로 북쪽은 치우천왕의 환웅국의 강역이고, 남쪽은 황제헌원의 나라 강역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 조에는 "평양이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집이다. 혹은 왕이 도읍했다하여 왕검이라고도 한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儉)" 라고 기록하고 있어 옛 왕검성이 곧 평양성 임을 알게 하는데,
  수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동북이 6리이고, 산의 굴곡을 따라 성을 쌓았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북사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신당서에는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한나라 때의 낙랑군으로 경사(당시 당나라의 도읍이었던 지금의 서안)에서 5천리 남짓 떨어져 있다.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까지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자치통감 권21 한기13 세종효무황제 원봉 3년 조에는, "樂浪郡治朝鮮縣 蓋以右渠所都爲治所也(낙랑군의 치소는 조선현인데, 우거가 도읍으로 하고 다스리던 곳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된 (전한)낙랑군이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을 치소로 사용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따라서 한나라 때의 낙랑군 치소였고, 장안에서 5천여 리 떨어져 있으며, 산의 굴곡을 따라 성을 쌓은 그곳이 바로 왕검성인 것인데,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초기 낙랑군은 62,812호였고, 인구가 406,748명이었으며, 25개 현으로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후대의 역사 기록까지를 충족할 수 있고, 그 부근에서 산의 굴곡을 따라 성을 쌓았으며, 도읍성으로 사용했음직한 성은 중국 하북성 승덕시에 있는 피서산장(열하행궁)이다. 
  승덕시는 동쪽으로는 무열하가 흐르고 있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난하가 지나며, 청나라 때의 열하행궁이 있는 곳이다.  
  열하행궁이란 그곳에 원래 온천이 용출되어 강으로 흘러든다고 하여 그 지명이 열하(熱河)가 되었고, 그곳에 청나라 때 청나라 황제들의 행궁을 짓게 되어 열하행궁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청나라 황제들이 연경의 무더위를 피해 여름철에만 시원한 그곳으로 와 집무를 보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곳을 더위를  피한다는 의미로 피서산장(승덕이궁이라 부르기도 한다)이라고도 불렀는데, 그 성은 둘레가 20km에 이르고, 면적은 564만㎡(약 170만평)에 이를 정도로 넓고 성안에 커다란 산과 호수가 여러 개가 있어 경치도 좋고 환경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인데, 왜 숙신(말갈)의 후예인 청나라는 그곳에 행궁을 지었던 것일까? 

  그들은 그 부근이 옛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따라서 승덕시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을  왕검성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기원전 194년 위만에게 그곳을 빼앗기게 되어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으로도 사용되다가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인 기원전 108년에 이르러 한 무제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전한낙랑군의 치소로 사용되다가 145년이 지난 서기 37년에 이르러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전한낙랑군이 멸망하고 그곳이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때 백제는 그 남쪽 난하 하류 도산(都山) 남쪽에, 신라는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동옥저는 내몽골 옹우특기, 적봉 부근에, 예는 내몽골 오한기, 고륜기 부근에 위치했다.
  이때 동이와 중국 세력들과의 국경은 서북쪽으로는 내몽골 섬전하 부근이었고, 서쪽으로는 양하, 관청수고, 영정하,해하 정도였다.   

 

☆ 지금까지 아무도 필자에 앞서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조선시대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도 그곳까지 갔었으면서도 그곳이 왕검성이요, 평양성 임은 알지 못했다.


  요즈음 역사연구자 중에 낙랑군은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진황도 창려 부근에 위치했었고, 최리의 낙랑국은 한반도 평양 부근에 위치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지를 한반도로 놓고 삼한과 삼국역사를 짜 맞추기 위해 한반도 평양에 최리의 낙랑국을 임의로 이동시켜 설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최리의 낙랑국은 낙랑군 태수가 전한 말에 왕망의 신나라 건국과 후한 복원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틈타 스스로 칭왕을 했다가 서기 37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멸망했고, 서기 44년에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를 침공해 전한낙랑군 땅의 일부인 살수이남 땅 즉 지금의 고북구 남쪽 흥륭 일원을 탈환해 다시 낙랑군(필자는 이를 후한낙랑군이라 한다)을 설치했고, 대방은 지금 북경 동쪽  준화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북성 부근에 위치했던 낙랑군의 일부가 한반도 평양으로 옮겨와 낙랑국을 세우고 왕위에 올랐던 것이 아니다. 한반도에 낙랑국은 없었고, 대방군도 없었다.    

       

만반한(만번한이라고도 한다)의 위치

 

  고조선의 왕검성이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비정되므로   고조선이 고대 연나라의 진개에게 서쪽 2천여 리를 빼앗기고 국경으로 했다는 만반한(만번한) 역시 옛 왕검성인 지금의 승덕시 서남쪽 지역 어딘가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역사적으로 대개의 경우 동이와 중국 세력과의 국경선 역할을 했던 강은 요수(遼水)였다.

 

※ 동이 세력이 강할 때는 요수를 건너 서쪽으로 유주, 영주까지를 차지했고, 중국 세력들이 강할 때는 요수를 건너 동쪽의 요동과 대방을 차지했기도 했다. 
 
  요수에 대하여 한서 지리지에는,  
  "대요수는 요새 밖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안시성(안평성의 오기가 아닐까?)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길이가 1,250리이다.(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城入海 行千二百五十里)"라고 기록하고 있고,
  신당서 고구려 전에는,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의 서남쪽 산에서 나와 안시성남쪽을 지나고, 소요수는 요산의 서쪽에서 나와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水有大遼少遼 大遼出靺鞨西南山 南歷安市城 少遼出遼山西 亦南流)"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수경에는,
  "대요수는 요새 밖 백평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요새로 들어가 요동 양평현 서쪽을 지나고, 또 동남쪽으로 흘러 방현 서쪽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흘러 안시현(안평현의 오기?) 서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또 원토(현토)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는데, 소요수가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大遼水 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又 東南過房縣西 又 東過安市縣西南 入於海 又 元 高句麗縣有遼山 小遼水所出 西南至遼隊縣 入於大遼水也)"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대요수란 옛 요동군이었던 지금의 북경 부근을 흐르던 강으로서 지금의 영정하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하북성 보정시 역현 부근에 위치했을 연나라는 동북쪽으로 향하여 이 요수를 건너 만반한(만번한)까지 진출했을 것이다. 따라서 만번한(만반한)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 고북구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고조선이 연나라의 진개에게 서쪽 땅 2천여 리(1천여리 정도이다)를 빼앗기기 전에는 지금의 밀운 부근에서 서남쪽으로 1천여 리를 나아간 하북성 보정 부근까지 차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기 조선전을 보면,
  "조선왕 만(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연나라가 전성기 때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켜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요동 외곽에 소속시켰는데, 한나라가 흥기하자 그곳이 멀어 수비하기가 곤란하자 다시 요동고새를 수리하고는 패수를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했는데, 연왕 노관이 반역하고 흉노로 망명하자 만(위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수천 인을 이끌고 추결을 하고 만이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도망쳐 요새를 넘고, 패수를 건너 (망명한 후) 옛 진나라의 빈 땅인 상하장에서 살았다.
  점차 진번조선과 만이들을 복속시키고, 연나라, 제나라의 망명자들을 모아 왕이 되고, 왕검성에 도읍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패수는 지금의 난하 중 반가구수고 북쪽을 말하는 것이고, 연나라는 지금의 하북성 역현 일원, 제나라는 산동반도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고대 연나라는 선비족으로서 원래는 지금의 하북성 역현부근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이 서쪽 2천여 리(1천여리?)를 빼앗겼을 때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이었던 요동고새란 요동성 즉 북경 부근의 옛 장성을 말하는 것일 수밖에 없고, 요수, 압록강, 살수, 패수 역시 그 부근에 위치한 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원 번이부 고구려(翰苑 藩夷部 高[句]麗) 조를 보면,
  後漢書曰 地理志曰 玄토郡 西蓋馬縣 馬縣 馬자水 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行 二千一百里 應邵云 馬자水 西入鹽澤 高[句]麗記云 馬자水 高[句]麗 一名 淹水 今名 鴨록水 其國相傳云 水漁出 東北靺鞨國 白水色 似鴨頭 故俗名 鴨록水 去遼東五百里 經國內城南 又 西與一水合 卽鹽難也 二水合流 西南至安市城入海 (후한서와 그 지리지에는 '현토군 서개마현 마현의 마자수는 서북쪽에서 흘러 염난수로 들어와 서남쪽으로 안평 서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길이가 2천1백 리이다' 라고 하였고,
  응소(應邵)는 말하기를 '마자수는 서쪽에서 염택(鹽澤)으로 흘러 들어온다'고 하였다. 고(구)려기에도 '마자수(馬자水)를 고구려에서는 일명 엄수(淹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이름은 압록수라고 하고, 물고기가 떠올랐다'고 하는 이야기가 그 나라에 전해진다. 동북쪽 말갈국 백수(白水)의 물이 오리의 머리색깔과 비슷하므로 속명으로 압록수라고도 하는데, 요동에서 5백 리 떨어져있다. 국내성(國內城) 남쪽(북쪽의 오기이다)을 지나 서쪽에서 흘러드는 또 한 강과 합하여 염난(鹽難)을 이룬다. 두 강이 합해져 서남쪽의 안시성(안평성의 오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마자수, 엄수, 압록수가 같은 강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마자수(압록강)는 지금의 북경 북쪽, 동북쪽을 흐르는 백하를 말하는 듯 하다. 

  중국 사람들이 장강, 황하와 함께 천하의 큰 세 강 중의 하나로 인식했던 압록강이 지금의 백하였던 것인데, 지금은 강수량이 줄어 그리 큰 강이라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패수(浿水)란 수경(水經)에,
  "浿水 出樂浪鏤方縣 東南過於臨浿縣 東入於海(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강인데, 이는 지금 난하의 흐름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로서 우리 역사에서 지금까지 그 위치를 정확히 찾지 못해 애만 태우던 요수, 압록수, 패수를 찾은 것이다. 

  

☆ 우리는 지금 대개 한반도의 대동강을 패수라고 인식하고 있으나, 대동강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흘러가는 강으로서 수경에서 말하는 패수와는 강물이 반대로 흐르고, 또한 우리는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는 압록강을 옛 기록 속의 압록수로 인식하고 있으나 강물이 오리의 머리색깔과 비슷해 압록수라 불렀다는 강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따라서 한반도의 압록강은 옛 기록 속의 압록수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위만조선 이전 연나라가 강성할 때 진번조선까지 복속시키고 요새를 쌓았다고 기록한 것은 사실은 진번조선을 직접 빼앗아 차지했다는 말이 아니라 연나라가 지금의 북경 부근까지 진출하여 진번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까지 진출하고 있었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후세 위만의 급작스런 공격을 받고 왕검성을 빼앗긴 고조선의 준왕은 좌우궁인을 이끌고 바로 남쪽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다시 한왕(韓王)에 오를 수 있었는데, 진개에게 요동 땅을 빼앗기게 되는 것을 시작으로 그때부터 요동 땅은 진(秦)나라 땅이 되기도 하고, 한(漢)나라 땅이 되기도 하며, 고구려 땅이 되기도 하고, 후세에도 발해, 요, 금, 원, 청나라 땅이 되는 것이다.

지금의 북경 부근은 본래 고조선의 땅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은 모두 고조선의 고유유물인가?

 

  고인돌은 대개 큰 덮개 돌을 여러 개의 받침돌로 고인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의 조성 목적에 대해서는 제단 또는 무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주로 요하 동쪽에서부터 한반도를 지나 일본까지 발견되고, 드물게 중국 동쪽해안 부근에서도 발견되고 유럽에서도 소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는 지점은 동일 문화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소수가 발견되는 것은 일부 사람들이 그곳으로 이주해 가게 되어 그곳에 고인돌을 조성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고인돌을 무덤이라고 보는 견해는 그 속에서 인골이 출토되기도 하고, 각종 석기유물과 청동기 유물들이 출토되기 때문이고,
  제단으로 보는 견해는 원래 고인돌이 무덤으로 조성된 것이 아닐 것이라는 시각인데, 고인돌이 무덤으로서 덮개 돌이나 받침돌이 시신을 보호할 목적이었다면 받침돌을 잘 다듬은 후 덮개를 덮어 외부에서 침입할 공간이 없도록 만들어야 사람이나 동물들로부터 시신을 보호할 수 있을 텐데 우리나라에 주로 분포되어 있는 북방식 고인돌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북방식 고인돌은 대개 다듬지 않은 자연석의 받침돌을 받치고 큰 경우는 수백 톤이나 되는 돌을 운반해 덮개 돌로 덮었는데, 이 덮개 돌이 시신만을 보호할 목적이었다면 그렇게 크고 무거운 덮개 돌을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을 동원해 힘들여 운반해 덮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인돌은 무덤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복을 빌기 위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남보다 큰 제단을 만들고 그곳에 제물을 푸짐하게 차려 놓고 천지신명께 빌어야 남보다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므로 경쟁적으로 많은 비용과 인력을 동원하여 서로 큰 고인돌을 조성하려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서 고인돌이 제단이냐 무덤이냐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인돌이 과연 우리 고조선 문명의 대표적 유물이냐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다. 
  고인돌이 고조선의 대표적인 표지유물이라 하는 것이 기존의 주장이고, 고인돌은 고조선과는 무관하게 한반도 일원에서 자생하여 주변으로 퍼져나간 한반도 고유의 문명일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고인돌이 고조선의 표지유물이라 하는 것은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한반도 평양이라는 전제 하에서 주장하는 것인데, 사실 고조선의 왕검성은 한반도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므로 그 옛날 과연 고조선의 정치력이 멀리 떨어진 한반도까지 직접 영향력을 뻗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고 따라서 한반도가 고조선의 강역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 지금 요하 부근에서 오래된 신석기 문명인 홍산 문화가 발견되자 그곳이 원래 환인국, 환웅국의 중심 강역이었는데, 점점 동쪽으로 이동해 요동에서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가 연나라의 진개에게 서쪽 2천여 리를 빼앗기게 되어 결국 한반도 평양에 도읍하게 되었으며 그곳이 고조선의 왕검성이었는데, 준왕이 그곳을 위만에게 빼앗기게 되어 위만조선의 도읍이 되었다가 낙랑군의 치소가 되었고, 그 남쪽에 삼한이 위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고조선으로부터 삼한, 삼국, 고려까지의 중심 강역은 한반도가 아닌 난하 부근이었다.  

  고조선 당시 한반도에는 대륙의 고조선과는 전혀 별개의 정치집단이나 문명이 존재했을 것인데, 한반도에서 대륙 고조선의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대륙의 고조선과 한반도에 자생했던 나라사이에 어떠한 형태로든 문화의 교류는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환인 천제가 환국을 세워 온 세상을 통치하고 있었다. 도읍을 환도(桓都)라 하고 7대를 전했다.  

  세월이 흘러 환웅천왕이 새롭게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배달국이라 하고 신시(神市)에 도읍을 정하고 18대를 전했다.    
  다시 요 무진년(B.C.2333)에 이르러 단군 왕검이 태백산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 고조선)이라 하고, 도읍을 태백산 동남쪽 우수하 벌판에 정했다가, 백산 남쪽이며 패수 동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이 곧 왕검성(王儉城)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왕검성을 왕험성(王險城) 또는 험독(險瀆)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 험독과 왕험성은 그 위치가 다른 곳이다. 험독은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왕험성(왕검성)은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불함산, 장백산, 태백산은 지금의 대흥안령산맥 중 칠로도산의 대광정자산을 말하는 것이고, 왕검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承德市)피서산장이다. 47대를 전했다.
                  
☆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 동북쪽 적봉에서 하가점 선사유적지가 발견되었는데, 하층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 기원전 24세기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이 유적지가 왕검조선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 지역은 고조선 때의 옥저,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숙신(읍루, 물길, 말갈, 여진)의 후예인 청나라 황제들은 온 중국을 손에 넣고 북경에 도읍하고서도 승덕시에 열하행궁을 또 지었는데, 필자가 보기에 청나라에서는 이곳이 바로 옛 고조선의 단군들이 살았던 영광스런 왕검성이라는 것을 알고 여름철이면 그곳으로 찾아와 머무르며 천하의 주인임을 과시했다고 생각된다. 이를 보면 우리 동이 문명의 한 갈래는 대흥안령산맥에서 점점 서남쪽의 중국 쪽으로 진출했다고 볼 수 있고, 다른 한 갈래는 한반도로 진출했을 것인데, 우리 고조선의 중심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난하 부근이었고, 한반도로 진출한 한 갈래는 고조선과는 별도의 문명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고인돌을 고조선의 고유 유물이라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한반도에는 전국에 걸쳐 고루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고, 특히 전북 고창 지역에는 고인돌이 밀집되어 조성되어 있고, 전 세계에서 발견된 고인돌의 약 75% 정도는 한반도에 위치한다고 한다.  
  그런데 고조선의 고유묘제는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드는 적석총 또는 석곽묘로 생각되고, 지금 요하 동쪽은 고조선의 중심 강역으로 보기 어려우므로 그곳에서 발견되는 고인돌 역시 고조선의 고유유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요동지역과 한반도 지역은 별도의 문명권을 형성하고 있다가 후세에 이르러 대륙 세력의 한반도 진출로 통합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한반도 서북쪽 요하부근 지역에서 발견되는 비파형동검의 편년이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세형동검보다 오랜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보면 비파형동검의 최초 발생지는 요하부근이었는데, 점점 동남쪽으로 남하하여 한반도까지 전파되었고, 그 형태가 변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칼날의 모양이 비파의 모양 같다하여 붙여진 비파형 동검은 주로 지금의 중국 요하, 대릉하 부근지역에서 많이 출토되고, 가까운 요하 동쪽지역에서도 많이 발견되며, 한반도에서도 가끔 발견된다.
  그렇지만 한반도에서는 비파형 동검보다 시기적으로 늦은 세형동검이 주로 출토된다.
  지금 비파형 동검이 가장 많이 출토되는 곳은 한반도의 평양이나 압록강 북쪽이 아니라 요하 서쪽 조양·부신 부근이고 내몽고자치구 적봉 부근에서도 거푸집과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었고, 영성에서도 많이 출토되었다.
  비파형 동검의 출토실태를 본다면 홍산문화권 지역을 비파형 동검 문화의 중심 강역이었다고 해야 합리적인데, 그곳에서 가까운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필자가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이다.

 

☆ 비파형 동검이 고조선 시대의 유물임에는 틀림없지만 엄밀하게 세분한다면 고조선의 제후국이었을 동옥저 또는 예(濊)의 대표적 유물이 아닌가 싶다.
    
  삼국지 예 전을 보면,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접했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다. 지금 조선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백성이 2만 호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고구려             옥저


                   조선             예(동예)         대해
  

                                    진한

 

☆ 규원사화를 보면, 단군 왕검 때 "여수기를 예의 임금으로 삼았다" 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濊)는 아주 먼 옛날부터 있던 유서 깊은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 동옥저 전에는,
 "동옥저는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동예), 맥과 접했다. 백성이 5천 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부여         읍루


                             동옥저


                              예(동예), 맥

 

  삼국지 부여 전에는,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토에서 1천리 거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땅이 사방 2천리이며 백성은 8만 호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약수 


           선비               부여              읍루   
  

  
                         현토            고구려

 

  삼국지 고구려 전에는,
  "고구려는 요동 동쪽(사실은 동북쪽) 1천리에 있다.
  남쪽(사실은 동쪽)은 조선과 예, 맥, 동쪽(사실은 동북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했다.
  땅은 사방 2천리이고, 백성은 3만 호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여

                                                   (동옥저)

                                                                                예(동예)    

                                                                  

                                                                     맥
                          고구려                조선                           

                           

       요동


  지금의 승덕시 부근은 원래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고,  위만조선의 치소였는데, 한 무제의 침공을 받아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전한 낙랑군의 치소로 사용되다가 서기 37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빼앗기게 되어 후일 고구려의 평양성이 되는 곳이고, 승덕시의 동쪽에 위치한 지금의 내몽골 옹우특기, 오한기 부근은 동옥저 또는 예였다.
  후한서 예전을 보면,
  "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서쪽은 낙랑까지이다. 예·옥저·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 땅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예와 옥저 그리고 고구려가 본래는 고조선의 땅이었음을 알게 하는데, 바로 그 옥저와 예, 진한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조양·부신 부근에서 비파형 동검이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옥저
                                                   예(동예)                대해


          낙랑                   
         (조선)


                                                진한

 

  이를 보면 비파형 동검은 예 또는 옥저, 진한의 대표적 유물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후한서에는 "예가 보병전에 능숙하며 길이가 3장이나 되는 창을 만들어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서 사용하기도 하는데, 낙랑 단궁이 그 지방에서 만들어진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지에는 "동옥저가 창을 잘 다루어 보병전을 잘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기도 한데, 그렇다면 예와 동옥저가 만들어 사용했다는 긴 창의 날이 혹시 비파형태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명도전이 연나라의 화폐냐 고조선의 화폐냐 하는 것을 가지고 논란들이 많다.

  그런데 필자가 고조선의 중심지 왕검성으로 주장하는 승덕시의 동쪽 또는 동북쪽인 적봉, 조양 부근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고, 그 땅은 연나라가 차지할 수 없는 곳이다.

  따라서 명도전은 연나라의 화폐로 보기보다는 고조선의 화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 다만 화폐라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유통이 매우 심한 물건이라서 그 화폐의 출토지 만을 가지고 어느 나라의 화폐라고 결정지을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적봉, 영성, 능원, 객라심좌익, 조양 부근에서 청동기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표지유물로 볼 수 있겠으나, 비파형 동검보다 시기적으로 후대에 제작되었고 한반도에서 주로 출토되는 세형동검은 꼭 고조선의 유물이라고 할 수는 없고, 고조선에서 비파형 동검이 한반도로 전해진 후 후대에 한반도에서 개조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파형 동검이 중심지로 보이는 적봉, 조양부근으로부터 수 천리 떨어진 한반도 남쪽에서도 가끔 출토된다는 것은 일부집단의 이동에 의해 이루어졌거나 어떠한 형태로든 대륙과 한반도 사이에 물건의 교역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한반도가 고조선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겠다.
  결국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표지유물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고인돌은 고조선의 고유문명이라 하기보다는 한반도에서 자생한 별도의 문명으로 구분하는 것이 옳을 것이고, 옹관묘 역시 한반도 자생 문명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