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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은 하북성 역현(易縣)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 2007. 10. 6. 08:27

윤여동설 -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은 하북성 역현 부근 - 최초공개

 

 

 

   전설 속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은 과연 어디에 위치했던 나라였을까?
  특히 우리는 고죽국이 기자조선의 위치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위치를 찾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이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고죽국의 위치를 확실하게 밝혀 줄 유물이 출토된 적이 없다.
  그리하여 고죽국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옛날 은나라 말기 고죽국(孤竹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는 큰 왕자 백이, 둘째 왕자 숙제 그리고 또 하나의 셋째 왕자가 있었다.
  그런데 왕이 죽으면서 둘째 왕자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노라 하고는 죽게 되었는데, 둘째인 숙제는 "형이 있는데 내가 어찌 왕위에 오를 수가 있는가?" 하면서 왕위를 형인 백이에게 양보하였다.
  그러자 그 형인 백이는 "아버지가 이미 동생에게 물려주신 왕위에 내가 오르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하면서 다시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여 결국 두 사람이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가 함께 수양산으로 들어가 버려 고죽국의 대신들은 할 수 없이 셋째 왕자를 왕위에 올려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백이와 숙제는 함께 수양산에 들어가 살다가 주나라의 서백 창(昌)이 덕으로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는 주나라로 가서 살려고 갔는데, 마침 서백 창이 죽고 그 아들 주 무왕이 왕위에 올라 상제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은나라를 치려고 출전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백이와 숙제는 그것은 돌아가신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이고, 신하가 군주를 치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라 하면서 주 무왕에게 간했으나 주 무왕은 그를 뿌리치고 결국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자 백이와 숙제는 다시 수양산으로 들어가 효와 인이 없는 나라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는다 하여 산나물인 고비를 뜯어먹다가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백이와 숙제를 현인이라 추앙하게 되었는데, 백이와 숙제가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가 떠나온 고죽국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해 있던 나라였을까?

 

  사기 권28 봉선서 제6의 주에는,
  "[正義]括地志云 孤竹故城 在平州盧龍縣南一十里 殷時孤竹國也([정의]괄지지에는 고죽 옛 성이 평주 노룡현 남쪽 십리에 있다고 했다. 은나라 때의 고죽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죽국의 위치를 찾으려 하게 되었는데, 옛 기록들이 말하는 평주 노룡현이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 없어 고죽국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고죽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개 요하 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요하고죽국설, 대릉하 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대릉하고죽국설, 그리고 중국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난하 부근의 노룡고죽국설, 필자가 주장하는 역현고죽국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요하고죽국설은 옛 기록 속에 나타나는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대개의 경우 요수였던 점에 착안하여 지금의 요하가 곧 옛 기록 속의 요수라고 생각하고 당시 고조선과 중국 세력들 간의 국경이 지금의 요하 부근이었을 것으로 보고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고,


  대릉하고죽국설은 연나라가 원래 지금의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고, 진개가 고조선 서쪽 2천리(또는 1천여 리)를 빼앗게 되어 지금의 대릉하 쯤을 고조선과 연나라가 국경으로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그 북쪽 대흥안령산맥에 산융(山戎)이 위치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대릉하의 최상류인 요녕성 능원에서 언후(偃侯)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양식이 서주 초기 양식이었다고 하는 것에 근거를 두어 그 부근까지가 연나라의 강역이었고, 고죽국이 고조선의 서쪽변경인 대릉하 하류쯤에 위치했다고 보는 것이며,   

 

  노룡고죽국설은 지금 중국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으로서 연나라가 북경 부근에 위치했었고, 사기의 주에도 괄지지의 기록을 인용하여 고죽고성이 평주 노룡현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하북성 진황도시에 노룡(盧龍)이란 곳이 있으므로 고죽국이 갈석산 부근인 진황도시 노룡에 위치했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지금 노룡에는 벽돌을 구워 쌓은 오래되고 매우 큰 옛 성이 있는데, 당나라 시기의 성이라고 전해져 최근에 이르러 그곳에 영평부(永平府)라는 표지석과 노룡서성서제(盧龍西城西堤)라는 표지석을 세워 놓았고, 성문 위에는 청나라 때 또는 근래에 부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망경(望京)이라 새긴 석판도 붙여 놓았는데, 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이 쌓은 성일 것이다.[사실 그곳은 백제의 도읍 웅진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그리고 부근에는 백이 숙제의 고사를 인용해 이제고리(夷齊故里 : 백이와 숙제의 고향 동네라는 의미), 청절묘유지(淸節廟遺址) 등의 비석을 세워 놓았고, 백이와 숙제가 마셨다는 이제정(夷齊井)이라는 우물도 만들어 놓았는데,그 부근은 낮으막한 야산 밖에 없다. 
역사를 잘못 이해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역현고죽국설은 필자가 주장하는 설인데, 이는 본래의 연나라가 지금 하북성 남부 일부를 말하는 것이고, 조나라가 산서성 태원 부근, 제나라가 산동반도 일원을 말하기 때문에 지금 하북성 역현부근에 고죽국이 위치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전국책 권제29 연1에,
  "蘇秦將爲從 北說燕文候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呼 易水 地方二千餘里 帶甲數十萬 車七百乘 騎六千疋 粟支十年 南有碣石 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由田作 棗栗之實 足食於民矣 此所謂天府也
(소진이 장래 합종을 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서 연나라 문후에게 말하기를,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요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누번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운중구원이 있고, 남쪽으로는 호타역수가 있어 땅이 사방 2천여 리입니다. 갑옷 입은 병사가 10만이요, 전차는 7백대이며, 말은 6천 필이고, 10년 간 풍년이 들었습니다. 남쪽으로는 갈석·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으로는 대추, 밤의 이로움이 있으니 백성들이 무슨 일이 있어 농사를 짓지 못한다 해도 대추와 밤을 먹는다면 식량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니 이를 소위 하늘이 내려주었다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연나라의 강역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위치]     
                                                                   임호누번
                                                              (현 산서성 대동부근)

 

 

     운중구원                                                      연                                                                         조선요동
(현 내몽골 호화호특 부근)                                                                                                           (현 북경 부근)

 

 

                                                안문                                             갈석(하북성 보정부근)
                                          (안문관 부근)      
                    
 
                                                                    호타역수
                                                                (현 호타하, 역하)      

      


                                         

   당시 연나라의 강역이 사방 2천리 쯤 되었다고 하므로, 지금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일부를 말하는 것이라 여겨지고, 남쪽의 호타수와 역수란 산서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석가장을 지나는 지금의 호타하와 북경 서남쪽 역현 남쪽의 역하(易河)를 말하며, 또 남쪽의 갈석·안문에서 안문이란 산서성 대현과 산음의 중간에 있는 안문관(雁門關) 부근의 대현에서 원평을 지나 태원에까지 이르는 대평원지역을 말하는 듯 하다.

  그리고 이 기록 속 갈석의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낭아산을 말하는 듯하다. 

 

☆ 사기 권2 하본기 제2에는,  "[正義] 黃河自勝州東 直南至華陰 卽東至懷州南 又東北至平州碣石山 入海也([정의] 황하는 승주 동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직선으로 흘러 화음에 이르고, 동쪽으로 흘러 회주 남쪽에 이르며,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 평주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옛날 황하의 흐름이 아무리 변화가 매우 심했다고 해도 지금 진황도 갈석산으로 흐를 수는 없다.     "夾右碣石 【集解】孔安國曰 碣石 海畔之山也
   入于海 【集解】徐廣曰 海 一作 河
 【索隱】地理志云 碣石山 在北平驪城縣西南,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又 水經云 在遼西臨 縣南水中蓋碣石山有二 此云 夾右碣石入于海 當是 北平之碣石 (갈석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면서 바다로 들어간다 [집해] 공안국은 갈석이 바닷가의 산이라 했다. [집해] 바다를  강이라고 하기도 한다. [색은] 지리지에는 갈석산이 북평 려성현(驪城縣) 서남쪽에 있다고 했고, 태강지리지에는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되었다고 했으며, 또 수경에는 요서 임유현 남쪽 물 가운데에 있다고 했으니 갈석산은 모두 두 개(세개?)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갈석을 서쪽으로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으니 이는 마땅히 북평의 갈석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 중국 사람들이 인식했던 북평이란 보정 부근의 넓은 평원지역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후대 청나라가 지금의 북경에 도읍하게 되면서 북경 부근의 평원을 북평으로 인식하게 되어 혼란이 야기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때 연나라는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부터 하북성 남부 일부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므로 연나라 동쪽의 조선요동은 지금의 영정하 동쪽 북경 부근으로부터 그 동쪽과 북쪽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북쪽의 임호누번은 지금의 산서성 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다.

  관자 권제16 봉선 제51 잡편 1을 보면,
  桓公曰 寡人 伐山戎 過孤竹 西伐大夏 涉流沙 束馬懸車 上卑耳之山 南伐之召陵 登熊耳山以望江(제나라 환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북쪽의 산융을 정벌할 때 고죽국을 지났고, 서쪽의 대하를 정벌할 때는 유사를 지나 말이 마차를 끌게 하여 비이산에 올랐고, 남쪽을 정벌할 때는 소릉에 이르러 웅이산에 올라 강을 바라보았다) 라고 말하고 있고,

 

☆ 중국 사람들은 진황도 노룡을 고죽국으로 비정하고는 산융의 위치를 대흥안령산맥 부근이라고 하는데, 위치를 동쪽으로 이동시켜 잘못 비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염철론 권제8 벌공 제45를 보면,
  齊桓公 越燕 伐山戎 破孤竹 殘令支(제나라 환공이 연나라를 지나 산융을 정벌하면서 고죽은 격파했고 영지는 남겨두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제 환공이 북쪽의 산융을 정벌하러 갈 때 연나라 땅을 통과하여 제나라의 북쪽에 위치한 고죽국을 격파하고 산융을 정벌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산동반도에 위치했던 제나라의 북쪽은 지금의 하북성 역현부근이지 진황도시 노룡부근이 아니다.

 

[고죽국의 위치]

 

        임호누번                       산융                          요동

 

                                                            
                                        
                                          고죽국
                                             연
                                                                                               
                                            제
                                 (현 산동반도 일원)

                            
  이를 보면 연나라의 북쪽에 위치했다는 임호누번은 산서성 북부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고, 산융 역시 그 부근쯤에 위치했을 것이다. 따라서 고죽국은 하북성 역현부근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나라는 역사적으로 지금 산동반도의 태산(泰山: 해발1,524m) 부근에 근거를 두었던 나라였고, 들이 넓어 식량 걱정이 없던 나라였다.  
  그런데 제 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정벌하면서 고죽국을 지났다고 했으므로 고죽국은 결국 지금의 하북성 역현부근에  위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옛 노룡이나 창려 역시 그 부근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백이와 숙제의 고향인 고죽국은 지금의 하북성 역현 부근으로 비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백이와 숙제가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고 살다가 죽었다는 수양산은 백이숙제의 묘가 있는  산서성 운성시 해주 부근 즉 산서성 최남단으로서 황하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꺾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혹시 지금의 중조산이 옛 수양산은 아닐지................

 

# 어떤 사람은 고죽국의 위치를 산서성 서남부에 비정하는 사람도 있는데, 아마 그곳에 백이숙제의 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왕위를 양보하고 함께 고죽국을 떠나 수양산에 들어가 살다 죽은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묘가 있는 곳은 수양산부근이지 고죽국이 아니다. 고죽국은 지금의 하북성 역현 부근에 위치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