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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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원래의 창해군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6. 09:07

윤여동설 - 원래의 창해군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원래의 창해군(蒼海郡)은 한사군 이전 중국 세력인 한(漢)나라가 동이지역에 설치했던 최초의 군현이었는데, 지금 그 창해군의 설치지역을 놓고 논란이 많다.  


   후한서 예전에는 "원삭 원년(B.C.128)에 예군 남려(南閭)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구를 이끌고, 요동군으로 내속 해 왔으므로 (한)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파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아직까지 기록 속 창해군의 설치지역을 아무도 정확히 찾지 못하고 있다.  

  기록대로라면 이때 예왕 남려와 위만조선의 우거왕 사이에 갈등이 있어 예가 위만조선의 영향권에서 이탈하여 스스로 한나라 요동군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해석이 가능한데, 실제 이때 한나라는 예 지역을 창해군이라 명명하고 팽오로 하여금 요동군에서 창해군까지의 교통로를 개척하다가 인력과 비용이 엄청나게 소요되고 공사가 뜻대로 진척되지 않자 기원전 126년에 창해군을 폐지하게 된다.

  물론 이 때의 예와 후세 진한의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는 예(동예)는 그 위치가 다르다.   

  후한서를 보면 예(동예)와 부여의 위치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동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해 있고, 동쪽은 대해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에 이른다. 예·옥저·고구려는 본래 조선지역이다"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땅이 2천리인데 본래는 예의 땅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예가 원래 위치하고 있던 동부여 땅으로부터  진한(신라)의 북쪽으로 위치가 변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옥저 

                                                                                       대해         

 

          요동                        낙랑                     예(동예)                                            

 

 

                                       마한                     진한

 

 

   그런데 만약 우리의 역사 상식대로 위만조선이 지금의 평양부근에 도읍하고 북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예가 강원도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요하 부근에 요동군이 위치했다면 요동군에서 위만조선의 강역 중심부를 통과하여 한반도 강원도까지 한나라에서 교통로를 만들려고 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은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창해군 설치 위치에 대하여 주장들이 분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어느 사람은 기록을 보고는 예군 남려가 자기 백성 28만 명을 직접 이끌고 강원도 강릉부근의 예를 떠나 천리나 떨어진 요동군으로 옮겨갔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어불성설일 뿐이다. 
  이 기록은 28만 명이나 되는 예국 사람들이 실제 요동군으로 이동해갔다는 말이 아니라 백성의 수가 28만명인 예가 위만조선과의 관계를 끊고 요동군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이고, 우리가 지금까지 창해군의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예의 위치를 잘못 비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자주 : 예가 위치를 바꾸게 되어 더 혼란스럽고, 헷갈리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초기 낙랑군의 위치를 북한 평양 부근으로 보았고, 옥저를 함경도 함흥부근으로 비정했으며, 진한은 경상북도쯤에 위치한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예가 낙랑의 동쪽이면서 옥저의 남쪽, 진한(신라)의 북쪽에 위치했다면 예는 당연히 강원도쯤에 위치했다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설치된 전한낙랑군의 위치는 한반도 평양 부근이 아니다.
  전한낙랑군은 옛 왕검성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현토군, 진번군, 임둔군 역시 한반도가 아닌 난하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전혀 엉뚱한 곳인 한반도에서 위만조선을 찾고 있었고, 창해군도 찾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고조선, 위만조선의 왕검성은 한반도의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이곳은 후일 낙랑군의 치소로 활용되고, 다시 고구려의 평양성이 되고, 고대의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일원이었다.   
  그렇다면 예는 당연히 왕검성이요 후세 낙랑군의 치소로 활용된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또는 고대의 요동군인 지금의 북경 주변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되고, 진한이나 옥저 역시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발해 북쪽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된다.
   원래의 예는 동부여의 위치로 나타나는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으로  볼수 있을 것인데,  한나라에서는 이곳에 창해군을 설치했다가 불과 몇 년 후 바로 파하게 된다.
  파했다는 것은 창해군에 대하여 한나라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그 땅을 포기했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한데 이때 한나라에서는 무슨 이유로 창해군을 포기해야만 했을까? 
  당시 위만조선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일원을 중심으로 그 부근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후일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을 설치한 지역이 바로 위만조선의 기본강역이었을 것이다. 
즉 낙랑군은 옛 왕검성을 기준으로 그 부근에 설치되었는데,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고,    진번군은 낙랑군의 동쪽 원래의 진번국 땅에 설치되었는데, 지금의 능원 일원이며, 임둔군은 진번군의 동북쪽 원래의 임둔국 땅에 설치되었는데, 내몽골 고륜기 일원이고, 초기 현토군은 원래의 옥저 땅에 설치했는데, 지금의 내몽골 적봉, 옹우특기 일원이었다. 

 

  이 네 곳이 위만조선의 기본강역이었던 것이고, 예의 땅은 그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데 한나라 때의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부근를 말하는 것이고, 이 때의  창해군은 원래 예의 땅이었던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일원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때 한나라에서는 북경에서부터 내몽골 정람기까지 도로를 개설하려 했었다는 말이된다.  
  지금도 그 먼 거리에 도로를 개설하려면 수 많은 비용과 인력이 들어갈텐데, 당시 순전히 인력만으로 그 먼 거리에 도로를 개설하기는 무리였을 것이고,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위만조선의 방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도로공사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든지 하는 ...........................  어찌되었든 그리하여 결국엔 요동군에서 창해군까지의 도로개설은 중단되고, 한 무제는 그 창해군을 폐지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창해군을 폐지한 그후에도 한무제는 섭하를 위만조선에 보내 예나 옥저, 진한, 숙신 등이 한나라에 가고자 할 때 길을 막지 말라고 위만조선을 회유하려 했으나 우거왕이 이를 단호히 거부하자 한 무제는 결국 기원전 108년에 이르러 위만조선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한사군을 설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앞서 기원전 128년에 한(漢)나라가 예군 남려를 받아들여 창해군을 설치하고 교통로를 개설하려 했던 것이 위만조선과 한나라 간 전쟁의 단초로 작용했다는 말이 된다.  
  이후 한나라는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처음에는 고조선의 조선현을 중심으로 낙랑군을, 옥저 땅에 현토군을, 임둔국 땅에 임둔군을, 마한의 동북쪽에 위치한 진번국 땅에 진번군을 설치했다가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임둔군은 동부여에게 땅을 빼앗긴 창해군 예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임둔군 땅을 차지하고 동예를 재건하게 되고, 진번군은 맥족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맥국을 세우고 자립하게 되자 두 군 즉 임둔군과 진번군을 폐지하게 되고, 또 옥저(필자주 : 북옥저, 남옥저, 동옥저가 있었다)가 자립하게 되자 현토군을 요동군의 서북쪽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옥저와 진번군의 남은 7개현을 통치하기 위하여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했으나 결국 서기 30년에 이르러 이 낙랑동부도위는 고구려 대무신왕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37년에 이르러서는 낙랑군(낙랑국) 마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어 전한의 무제가 설치했던 전한낙랑군은 우리 역사 강역에서 일단 소멸하게 된다.
  그런데 서기 44년에 이르러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를 침공해 살수(필자주 : 현 북경 동북쪽 고북구 부근의 조하) 이남 땅을 탈환해 낙랑군(후한낙랑군)을 다시 설치하게 되는데, 지금의 북경 동북쪽 하북성 흥륭  일원으로서 필자는 이를 후한낙랑군이라 부르는데, 서기 313년까지 존속하다가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소멸된다.
        
  우리의 역사는 왜곡의 역사이고 착각의 역사이다.
  고려로부터 그 이전 대륙에서 일어났던 모든 역사적 사건을 한반도에 비정하여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조선이 건국되면서 대륙의 개경에서 한반도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어 국가 차원에서의 의도적인 역사왜곡이 이루어졌고, 그로 인하여 역사의 착각이 시작되었던 것인데, 그 역사 왜곡의 완성품이 바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이었다.[필자주 : 이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인하여 대륙지명의 한반도로의 교치가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읽은 조선시대 사람들은 고조선으로부터 고려까지의 역사가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역사로 착각했고, 고려의 도읍 개경이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조선이 건국되어 황해도의 개성에서 서울로 도읍을 옮겼다고 생각해 그 이전의 역사 기록 모두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반도사관이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그 역사왜곡의 방법을 알 수 있는데,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대륙의 지명을 모두 그대로 한반도의 비슷한 위치에 적용하여 지명을 정하고, 대륙 지명의 건치연혁을 새로 정한 한반도 지명에 적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필자주 : 이를 지명교치(地名僑置)라 한다]  
  따라서 지금 한반도 지명의 건치연혁은 실제 그 지명의 건치연혁이 아니라 사실은 대륙지명의 건치연혁인 것이다.
  지금 대륙에는 옛 지명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바뀌어 버려 사서에 나타나는 대륙지명의 위치를 찾을 수 없으나 거꾸로 한반도 지명의 위치를 대륙에 적용하면 옛 사서에 나타나는 지명들의 대강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 강릉과 대칭되는 대륙의 지명은 지금의 내몽골 고륜기 쯤으로서 그곳이 바로 동예의 치소였던 명주였을 것이다.
  물론 지금 서랍목륜하(시라무렌하)하류와 송화강이 흐르는 주변지역은 지금은 바다가 아니라 표고가 낮은 육지가 되어 있으나 옛날에는 그곳이 바다(대해)였을 것이라는 말이다. 
  진한의 북쪽에 위치했었다는 예(동예)는 한반도 강원도에 없었고, 지금의 발해 북쪽 내몽골 고륜기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