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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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서 건국되지 않았다(2)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19. 07:19

윤여동설 - 백제·신라는 한반도에서 건국되지 않았다(2) - 최초주장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동쪽에 (신라가 있고, 서쪽에)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했고,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있고, 남쪽에 가야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고, 마침 경주에 신라의 흔적들이 많고, 공주·부여에는 백제의 흔적들이 많으며, 북한 평양에는 고구려의 흔적들이 많이 있으므로 우리는 삼국사기 기록을 별 의심없이 한반도에 적용해 삼국의 위치를 한반도로 비정해 삼국사기의 모든 기록을 해석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북한 평양을 낙랑이라 하게 되었고, 황해도를 대방이라 했으며, 경상남도 지역을 가야라고 하게 되었고, 강원도를 예라고 했으며, 두만강 부근과 연해주를숙신이요 말갈이요, 여진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 사서들에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고,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곧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 부근이 아닌 발해 북쪽 북경 부근이라는 말이 되고, 우리가 경주에 도읍하고 천년 역사를 이었을 것으로 알고 있는 신라가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도 다르게 경주 부근이 아닌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 지금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 상식으로 볼 때 신라가 한반도 경주가 아닌 만리장성이 시작된 발해 북쪽에 위치했다고 주장한다면 미친 사람 취급받기 딱 십상인데, 옛 사서의 기록들과 그곳의 지형이나 유적 등을 검토해 볼 때 신라가 그곳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필자는 많은 국민들이 어느 정도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 분위기가 조성되어야만 역사학자들도 신라가 그곳에 있었다고 사실대로 밝힐 수 있을 것이고, 그 때가 되어야만 우리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의 역사가 제대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바로 그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한다고 했으니 백제 역시 한반도가 아닌 북경 부근에서 건국되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백제가 대방과 관련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한서지리지 낙랑군 조를 보면, 대방현이 낙랑 25개 현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고, 유주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유주(幽州)란 지금의 중국 북경 또는 하북성 보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므로 대방 역시 북경 가까이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 전한서지리지 낙랑군 조에는, "(전한) 무제 원봉 3년에 설치했다. 왕망이 낙선이라 고쳤다. 유주에 속한다. 호수는 62,812호이고, 인구는 406,748명이다. 운장이 있고, 속현이 25현이다. 조선현[응소는 말하기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했다]이 있고, 염한현이 있다. 패수현에는 강물이 서쪽으로부터 증지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왕망이 낙선정이라고 고쳤다. 함자현에는 대수가 서쪽으로부터 대방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점선현이 있고, 수성현이 있다. 증지현은 왕망이 증토라고 고쳤고, 대방현, 사망현이 있다. 해명현은 왕망이 해환으로 고쳤고, 열구현, 장잠현, 둔유현이 있다. 소명현은 남부도위의 치소이다. 누방현, 제해현, 혼미현이 있다.
탄열현에는 분려산에서 열수가 발원하여 서쪽으로부터 점선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강의 길이가 820리이다. 동이현이 있고, 불이현(불내현의 오기가 아닐까?)은 동부도위의 치소이다.
잠태현이 있고, 화려현, 사두매현, 전막현, 부조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인 27대 위덕왕의 작위는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이었고, 30대 무왕의 작위는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이었으며, 의자왕의 작위도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이었다.
  또한 신라 진흥왕의 작위는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이었고, 진평왕의 작위는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이었다.  

 

☆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난현(난주)로 비정되고, 웅진은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으로 비정되는데, 백제가 한산에 도읍했을 때 근초고왕의 작위는 진동장군 영낙랑태수 백제왕이었고, 웅진에 도읍했을 때 동성왕의 작위는 사지절 도독 진동대장군 백제왕이었고, 무령왕의 작위는 사지절 도독 진동대장군 백제왕 또는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 백제왕이었고,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백제왕들은 대방군공 백제왕 또는 대방군왕 백제왕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이는 이 시기의 백제가 낙랑군I(후한낙랑군)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고, 사비는 대방군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을 대방을 한반도 전북 남원 부근이라고도 하고, 황해도 지역을 말한다고도 하고 있었으니 역사를 얼마나 엉터리로 해석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작위란 국가 간에 그 땅의 관할권과 군사권 등 소유권을 국가 간에 인정하는 것으로서 작위 속에 나타나는 지명은 곧 그 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 말기 백제왕들에게 주어진 작위는 백제가 대방군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의미로서 백제가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백제는 한반도 서울 부근이 아닌 지금의 중국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시 난하의 대흑정수고 동쪽이며, 진황도 도산의 남쪽에서 건국되었고, 그곳이 바로 위례성이다. 
  따라서 하북성 당산시, 진황도 일원은 우리의 옛 백제 땅인데,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고, 신라는 발해 북쪽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금주시가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이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전북 남원을 대방이라 했고, 지금 우리 역사학자들은 황해도를 대방으로 추정하고 북한 평양을 낙랑이라 하나 이는 모두 거짓말이다. 공손강이 설치했다는 대방군은 북경 동쪽 준화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낙랑군은 하북성 승덕시와 흥륭현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대륙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역사서를 한반도로 가져와 한반도에 그 기록 모두를 적용해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 기록 속의 지역을 잘못 비정하면 역사가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사서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낙랑군과 대방군 등을 억지로 한반도로 끌어들여 해석함으로써 삼국의 건국지를 한반도 내로 비정하려 하는데, 이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으로서 우리의 역사 강역을 스스로 축소하는 것이다.

 

☆ 어느 사람은 삼국의 건국지가 한반도가 아니라고 할 경우 한 민족의 정체성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이 설령 역사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를 사실대로 밝혀서는 안될 것이라고 하기도 하나, 우리의 먼 선조들이 하북성이나 몽골로부터 왔다고 하여 그것이 한민족의 정체성에 문제가 되지는 않고 있고, 조선이 건국된 후 중심강역이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로 옮겨졌다고 하여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니, 역사적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야 옳을 것이다.

  

   지금의 북경부근 아니 더 나아가 태행산맥 부근까지가 우리의 옛 땅이었는데 그를 우리의 옛 땅이 아니라고 하는 셈이니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탐원공정도 문제지만 우리 학자들의 역사인식에 더욱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지금 일부 역사 연구자 중에 옛 사서의 기록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 신라가 양자강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장안성이 지금의 중국 섬서성 서안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너무 심한 비약이라 생각되지만 그래도 삼국의 건국지가 한반도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다. 왜냐하면 최소한 그들은 삼국의 건국지가 한반도가 아니라는 것만은 이미 깨닫고 있으니 기록을 세밀히 다시 검토해 위치와 넓이만 조금 수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 학자들이 우리 고대사를 보는 시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 고대사의 진실 찾기는 매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역사 학자들은 빨리 발상을 전환해야 하고,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고대사를 억지로 한반도로 끌어들여 해석하지 말라는 말이다.  
  국민 모두가 우리의 고대사가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날 우리의 역사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이고, 잃어버린 옛 강역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