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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안시성(安市城)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 2007. 10. 8. 18:46

윤여동설 - 고구려 안시성(安市城)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3년(A.D.644) 조를 보면,
   『가을7월 당나라 태종이 장차 군사를 출동시키기로 하고 홍주, 요주, 강주 3개 주에 명령하여 배 4백 척을 만들어서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도독 장검을 보내어 유주, 영주 두 도독의 군사와 거란, 해, 말갈 등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쳐서 그 형세를 보게 하고,
  대리경 위정으로 괴수사를 삼아 하북의 여러 주들은 모두 위정의 지휘를 받게 하고, 위정으로 하여금 상황에 따라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도 먼저 적당히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또 소경 소예에게 명하여 하남 여러 주의 식량을 바닷길로 운반하게 하였다.
  겨울10월 당나라 황제(태종)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고자 장안의 노인들을 불러놓고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요동은 옛날 중국 땅이며 또 고구려의 막리지가 그의 임금을 죽였으므로 내가 직접 가서 처치하려 하니 아비와 노인으로서 아들과 손자들이 나를 따라가게 하는 자는 내가 잘 위무할 것이니 근심하지 마라"하고 곧 포백과 곡식을 후하게 주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황제에게 가지 말 것을 주청 하였으나, 황제가 말하기를 "나도 알고 있다. 근본을 떠나 끝을 향하고,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을 취하며, 가까운 곳을 놓아두고 먼 곳을 택하는 것이 모두 불길한 것이니 고구려를 치는 것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개소문이 왕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도륙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니 그 나라 사람들이 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도 대신들이 그를 미처 알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이리하여 북쪽으로는 영주로 군량을 수송하고, 동쪽으로는 고대인성에 군량을 저장하였다.
  겨울11월 당 태종이 낙양에 이르니 전 의주자사 정천숙이 이미 관직을 사퇴하고 있었는데 황제는 그가 일찍이 수나라 양제를 따라 고구려를 친일이 있다하여 그를 불러 물으니 "요동은 길이 멀어 군량 수송이 곤란하며 동이 사람들이 성을 잘 지키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항복 받을 수는 없습니다"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지금은 수나라의 그 때와 비할 수 없으니 공은 다만 듣기만 하라" 하였다.
  그리고 나서 형부상서 장량으로 평양도행군대총관을 삼아서 강, 회, 령, 협의 군사 4만 명과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과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가게하고,
  또 태자 첨사 좌위솔 이세적으로 요동도행군대총관을 삼아 보·기병 6만 명과 난·하 두 주의 항복한 오랑캐(胡)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두 부대가 합세하여 유주에 대대적으로 집합하게 하고,
  행군총관 강행본과 소감 구행엄을 안라산에 보내어 우선 여러 군사들을 감독하여 사다리와 무장한 전투용 수레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에 각처에서 모집에 호응하는 사람과 전투용품을 바치는 자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는데, 황제가 이들을 점검하여 편리한 것만 취하였다.
  그리고 친필로써 천하에 조서를 내려,
  "고구려의 개소문이 자기의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니 이 실정을 어찌 참고만 있을 수 있는가? 이제 유주, 계주 등지를 순행하며 요동과 갈석에서 죄상을 규탄하려 하는 것이니, 내가 지나는 군영이나 숙소들에서는 노력과 재물을 허비하지 말라.
  옛날 수 양제는 자기 부하들에게 잔인하고 포학하였으며, 고구려왕은 자기 백성들에게 인자하고, 사랑하였었다.
  반란을 도모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안정되고 화목스러운 사람들을 쳤기 때문에 수 양제가 성공할 수 없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승리할 조건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첫째,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치는 것이며,
  둘째, 순으로서 역을 토벌하는 것이며,
  셋째, 정돈된 것으로써 혼란한 틈을 타는 것이며,
  넷째, 편안한 군사로서 피로한 군사를 대적하는 것이며,
  다섯째, 기쁨에 찬 군사로서 원성에 가득 찬 군사와 맞서는 것이니 어찌 승리하지 못할 것을 근심하리요.
  백성들에게 포고하노니 이번 전쟁에 대하여 의심을 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하였다.
  이때 모든 취침용 비품, 전투용품 등을 거의 반쯤 줄였다.
  그리고 나서 모든 군단들과 신라, 백제, 해, 거란 등에 명령하여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4년(A.D.645) 봄정월 이 세적의 군대가 유주(幽州)에 이르렀다.
  3월 당 태종이 정주(定州)에 이르러 시종하는 신하들에게,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인데 수씨(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출동하였으나 그곳을 도로 찾지 못하였다.
  내가 지금 동방을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전쟁에서 죽은 자제들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며, 고구려에 대해서는 죽임을 당한 임금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또 지금 사방이 대체로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내가 더 늙기 전에 사대부의 남은 여력으로 이 땅을 빼앗으려 하는 것이다"하였다.

  황제가 정주(定州)를 출발하며 몸소 활과 화살을 차고 말안장 뒤에 우비를 손수 매달았다.

  이 세적의 군사가 유성(柳城)을 떠나서 형세를 크게 하여 마치 회원진(懷遠鎭)으로 나가는 것같이 하면서 가만히 북쪽 골짜기 길로 군사를 몰아 우리가 생각지도 않은 곳으로 나왔다.
  여름4월 이세적이 통정(通定: 通定鎭))으로부터 요수(遼水)를 건너 현토(玄 )에 이르니 우리의 성읍들에서는 크게 놀래어 모두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부대총관 강하왕 도종은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新城)에 이르고, 절충도위 조삼량은 기병 10여명을 데리고 직접 성문을 위압하므로 성안에서는 놀라 나오려고 하는 자가 없었다.
  영주(營州)도독 장검이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요수를 건너 건안성(建安城)으로 달려와서 우리 군사를 깨뜨리고 수천 명을 죽였다.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盖牟城)을 쳐서 빼앗아 1만 명을 사로잡고 양곡 10만석을 탈취한 후 개모성을 개주로 고쳤다.
  장량은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는데 성의 사면이 절벽으로 되었고 다만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이때 정명진이 군사를 데리고 밤에 도착하고 부총관 왕대도가 성에 선봉으로 올랐다.
5월에 (비사)성이 함락되어 남녀 8천명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이세적이 요동성(遼東城) 밖까지 진출해 오고, 황제가 요택에 이르렀을 때 진창이 2백여 리나 되어 사람과 말들이 갈 수가 없었으나 장작대장 염입덕이 흙을 펴서 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군사들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늪을 통과하였다.

  왕이 신성(新城)과 국내성(國內城)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출동시켜 요동성을 구원하니 강하왕 도종이 4천명의 기병으로 대항하려 하자 군사들이 모두 군사 수효의 차이가 현저하다 하여 도랑을 깊이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황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도종이 말하기를 "상대방이 군사가 많음을 믿고 우리를 깔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그들은 멀리 와서 피곤하기 때문에 치면 반드시 그들이 패할 것이니 이렇게 하여 길을 깨끗이 하여놓고 황제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대들은 임금 앞에 적을 넘겨 드리려 하는가?"하였다.     
  도위 마문거가 말하기를 "강한 적을 만나지 않는다면 어찌 장사임을 나타낼 수 있을까?" 하면서 말을 몰아 달려가 치니 가는 곳마다 고구려군이 쓰러지니 군사들의 사기가 조금 올라갔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행군총관 장군예가 퇴각하여 달아나고 당나라 군사가 패하였다.
  도종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높은데 올라가서 우리 군진이 어지러워진 것을 바라보고 날랜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을 시작하고 이세적이 군사를 이끌고 협력하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
  당 태종이 요수(遼水)를 건너와서는 다리를 걷어버림으로서 군사들의 결심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친 다음 강하왕 도종을 위로하여 상품을 주고 마문거를 몇 급 올려 중랑장을 삼고 장군예의 목을 베었다.
  태종이 몸소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밑에 이르러 군사들이 흙을 져서 구덩이를 메우는 것을 보고 황제가 친히 제일 무거운 것을 나누어서 자기 말에 실으니 시종하던 관리들이 다투어 가면서 흙을 져다가 성 밑에 쏟았다.
  이세적이 요동성을 치는데 12일 동안 밤낮을 쉬지 않았다.
  태종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이세적에게로 와서 성을 수백 겹으로 에워싸니 북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성안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고, 사당에는 쇠갑옷과 예리한 창이 있었다.
  망녕스럽게도 전연 시대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사방이 포위되어 사태가 급박할 때인데도 미녀를 여신이라고 장식하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반드시 보전될 것이다"하였다.
  이세적이 포차를 포진하고 3백 보도 더 나가게 큰돌을 쏘니 돌덩이가 떨어지는 곳은 금방 부숴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성벽을 만들고 동아줄로 망을 쳤으나 막을 수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돌격차로서 성벽을 쳐부수었다.
  이때에 백제가 붉은 칠을 한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군사들에게 입혀 종군하였는데 황제가 이세적과 함께 모이니 갑옷이 햇빛에 번쩍 거렸다.
  남풍이 세차게 부니 황제가 군사들을 시켜 성의 서남쪽 누각에 불을 질러 불이 성안으로 번지자 군사들을 성에 오르게 하니, 우리 군사들이 힘써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고, 포로로 잡힌 군사가 1만여 명이며, 백성 4만 명이 붙잡히고 식량 50만석을 빼앗겼다.
  태종이 요동성을 요주로 고쳤다.
  이세적은 백암성의 서남쪽을 공격하고 황제가 서북쪽에 도착하니, 성주인 손대음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청하고, 성 위에 나와 손에 칼과 도끼를 잡는 것을 신호로 하기로 하면서 말하기를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안에서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황제가 사자에게 당 군의 깃발을 주면서 말하기를 "꼭 항복하겠으면 이 깃발을 성 위에 세워라" 하였다. 손대음이 당 군의 깃발을 성 위에 세우니 성안의 사람들은 당나라 군사가 이미 성 위에 올랐다고 생각하여 모두 손대음을 따라서 항복하였다.
  황제가 요동성전투에서 승리하였을 때에 백암성이 항복을 청했다가 얼마 후에 취소를 하였는데 황제가 생각하기에 백암성주가 갈팡질팡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말하기를 "백암성을 빼앗으면 사람과 물건을 모두 군사들에게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었다.
  이때 이세적이 황제가 백암성의 항복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을 보고 갑사 수십 인을 이끌고 와서 황제에게 말하기를 "사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화살과 돌이 날아오는데도 싸우는 것은 노략질을 할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이 거의 함락되어 가고 있는데 어찌하여 항복을 받아들여 전사들의 마음을 허탈하게 하려고 하십니까?" 하니 황제가 말에서 내려와 사과하면서 말하기를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군사를 풀어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처자를 사로잡는 것을 내가 차마 보지 못하겠소.
  장군의 부하 중에서 공이 있는 자는 내가 나라의 창고에 있는 물건으로 상을 줄 것이며, 장군에게는 이 성을 주어 나의 실책을 채우려고 하오"하니 이세적이 물러 나와 성안의 남녀 1만여 명을 잡아서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은 후에 곧 음식을 주고 80세 이상 되는 노인들에게는 비단을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다른 성의 군사로서 백암성에 와 있던 자들은 모두 위로하고 타일러 식량을 주어 자기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하였다.
  앞서 요동성 장사가 부하에게 살해를 당하였는데, 그 시종이 장사의 처자들을 데리고 백암성으로 도망하여 왔었다. 황제가 그의 의리가 가상하다 하여 명주 다섯 필을 주고 장사를 위하여 상여를 만들어 평양으로 보내 주었다. 백암성을 암주라고 고치고 손대음으로써 자사를 삼았다.
  원래 막리지가 가시성(加尸城)의 군사 7백여 명을 보내어 개모성(盖牟城)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이세적이 그들을 모조리 사로잡았었다.
  그들이 종군하여 공을 세우기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너희의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는데, 너희가 나를 위하여 참전하게 되면 막리지가 반드시 너희 처자들을 죽일 것이니 한 사람의 힘을 얻자고 한 집안을 망하게 하는 것을 나는 차마 할 수가 없다"하고는 그들에게 식량을 주어 돌려보내고, 개모성을 개주라고 고쳤다.
  당 태종이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병사들을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였다.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은 우리 군사와 말갈병 15만을 이끌고 안시성을 지원하였다.
  황제가 근신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연수로서는 3가지 계책이 있을 수 있다. 군사를 이끌고 똑바로 앞으로 나가서 안시성에 잇대어 진지를 쌓고 높고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성안의 군량을 먹으면서 말갈의 군사를 풀어 우리의 말과 소를 약탈한다면, 우리가 공격하려고 해도 빨리 항복 받을 수 없고 돌아가려고 해도 늪지대가 가로막고 있어 우리 군사들은 앉은 채 곤란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고, 성안의 군사를 빼내어 그들을 데리고 도망가는 것이 중책이고, 저의 지혜와 능력을 모르고 나와서 우리와 전투를 하는 것은 하책이다.
  경들은 두고 보라 아마 저들은 반드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므로 그들을 사로잡는 것은 시간문제이다"하였다.
  이때 대로(對盧) 고정의는 나이도 많고 경험이 많아 연수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진왕(당 태종)은 안으로는 각지에서 일어났던 영웅들을 쳐서 없애고, 밖으로는 오랑캐들을 굴복시켜 버젓이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하늘의 명을 받은 인재라 할 수 있다. 지금 중국의 여러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이에 대적할 수 없다.
  나의 작전은 군사를 정돈하고는 싸우지 말고 지구전을 펴되 기습병을 보내어 그들의 식량 수송로를 끊는 것이다. 식량이 떨어지게 되면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고 해도 갈 길이 없을 것이니 가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연수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안시성 밖 40리(4리의 오기?)까지 나아갔다.
  황제는 연수가 머뭇거리고 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대장군 아사나 두이에게 명하여 돌궐의 기병 1천명을 거느리고 연수를 유인하게 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당나라군이 거짓으로 도주하니 연수가 말하기를 "듣기보다 쉬운 상대다"하고는 앞다투어 그들을 쫓아 안시성 동남쪽 8리 지점에 이르러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계책을 물으니 장손무기가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적과의 전투에 임할 때는 먼저 군사들의 정서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신이 여러 병영을 돌아다니면서 보니 사졸들이 고구려 군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들 칼을 뽑아들고 깃발을 달면서 희색을 나타내니 이는 반드시 승리할 병사들입니다.
  폐하께서 관을 쓰시지 않고 친히 전쟁터로 나오셔서 지금까지 기묘한 작전으로 승리한 것은 모두 황제의 계책을 받들었기 때문에 모든 장수들이 성공할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도 폐하께서 친히 지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황제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제 공들이 이 일을 나에게 양보하는 듯 하니 짐이 마땅히 제 공들을 위하여 생각을 해 보겠다"하고는 곧 장손무기 등을 대동하고 수백의 기병과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산천의 형세를 살피고, 복병 시킬 곳과 출입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때 우리 군사들이 말갈과 함께 군사를 합하여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리에 이르니 황제가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강하왕 도종이 말하기를 "고구려가 온 국력을 다하여 방어하고 있으니 왕도인 평양의 수비는 반드시 약할 것입니다.
  원하노니 저에게 정예병 5천을 빌려주시어 그 본거지를 전복시키면 수십만의 군사를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황제가 들어주지 않고 사절을 보내어 연수를 속여 말하기를 "나는 너희 나라 강한 신하가 임금을 죽인 것에 대하여 죄를 문책하려고 온 것이다. 전투가 벌어진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었다. 다만 국경을 넘어 들어오다 보니 말먹이와 군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너희 나라 몇 개성을 빼앗았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만 갖춘다면 잃었던 것은 반드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연수는 이 말을 곧이 듣고 수비태세를 더 갖추지 않았다.
  황제가 밤에 문무 백관들을 소집하여 계책을 논의한 후,
  이세적은 보기병 1만5천으로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은 정예병 1만1천으로 기습병을 조직하여 산의 북쪽으로부터 좁은 골짜기로 나와 우리 군사의 배후에서 돌격하게 하고,
  황제는 몸소 보기병 4천을 거느리고 북과 나팔을 옆에 끼고 깃발을 숨겨 가지고 산 위로 올라갔다.
  황제가 모든 군사들에게 명하여 "북과 나팔소리가 나거든 일제히 나와서 용감하게 공격하라" 하고 또 관리들에게 명하여 항복 받을 장막을 조당 옆에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날 밤 유성이 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날이 밝아지자 연수 등이 단지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만을 보고 군사를 출동시켜 싸우려고 하였다.
  황제가 장손무기의 부대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북을 두드리고 나팔을 불며 깃발을 올리니 모든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나아갔다.
  연수 등이 두려워하며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려 했으나 진용은 이미 혼란하게 되었다.
  때마침 천둥과 번개가 치는데, 당나라의 용문사람 설인귀가 기이한 옷을 입고 고함을 지르면서 우리의 진용으로 들어오니 그가 향하는 곳에는 적수가 없었고, 우리 군사가 쓰러져 갔다.
  당나라의 대군이 뒤따라 치니 우리 군사들이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3만여 명이었다.
  황제가 설인귀를 바라보고 그를 유격장군에 임명하였다.
  연수 등이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방어하였다.
  황제가 모든 부대에 명하여 우리 군사를 포위하게 하고 장손무기는 다리를 모두 걷어 우리 군사의 돌아갈 길을 끊어 버렸다.
  연수와 혜진이 거느린 군사 3만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할 것을 청하면서 당나라의 군문으로 들어가 절을 하고 엎드려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였다.
  황제가 욕살 이하 관장 3천5백 명을 뽑아 당나라로 옮기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려보내고, 말갈인 3천3백 명은 붙잡아 모두 산채로 묻어 버렸으며, 말 5만 마리 소 5만 마리 명광갑옷 1만 벌을 노획하였고 다른 기자재도 이만큼 되었다.
  황제가 올라갔던 산의 명칭을 주필산으로 바꾸고 고연수는 홍려경을 삼고 고혜진은 사농경을 삼았다.
  황제가 백암성(白巖城)이 함락되었을 때에 이세적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안시(안시성)는 성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며 그 성주가 재주가 있고 용감하여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아서, 막리지가 공격하였으나 그를 항복시킬 수 없어 그에게 그 성을 주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 건안성은 군사가 약하고 군량이 적으니 그들이 예상하고 있지 않을 때 치게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건안성을 먼저 쳐서, 건안성이 항복하게 되면 안시성은 우리에게 포위된 형국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소위 병법에서 말하는 "공격하지 못할 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니 이세적이 대답하기를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쪽에 있는데 우리의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습니다. 지금 안시를 지나서 건안을 치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안시성이 항복하면 북을 두드리며 행군하여 건안성을 빼앗으면 그만입니다." 하니 황제가 "내가 그대를 장군으로 임명하였으니 그대의 계책을 쓰지 않겠는가? 다만 일을 그르치지는 말라" 하였다.     
  이세적이 곧 안시성을 공격하니 안시 사람들이 성에 올라 황제의 깃발을 내려다보면서 북을 두드리고 비아냥거리니 황제가 화를 내었다.
  이세적이 성이 함락되는 날 남자는 모두 구덩이 속에 묻어 버릴 것을 황제에게 청하였다.
  이 말을 듣고 안시 사람들이 더욱 굳게 지켰으므로 오랫동안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고연수, 고혜진 등이 황제에게 청하기를 "저희들이 이미 대국에 몸을 바친 이상 우리의 성의를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하루속히 큰 공을 세워 우리가 처자와 만나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안시 사람들이 그의 가족들을 위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에 빠른 시일에 함락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저희들은 고구려의 10만여 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황제의 깃발을 바라만 보고도 사기가 꺾였으며 나라 사람들의 간담이 서늘하였습니다.
  오골성의 욕살은 늙고 우둔하여 성을 견고히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병력을 이동만 시킨다면 아침에 시작하면 저녁에는 이길 수 있을 것이고, 다른 작은 성들은 반드시 제풀에 꺾여 버릴 것입니다. 이런 연후에 그의 군기와 군량을 거두고 북을 두드리며 진군하여 앞으로 나아가면 평양은 지켜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또 말하기를 "장량의 군사가 사성에 있으니 그들을 부르게 되면 2일이면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민심이 흉흉한 때를 이용하여 장량의 군사와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강을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길에 달렸습니다" 하니 황제가 이 말을 따르려고 하였는데, 장손무기가 홀로 말하기를 "천자가 친히 원정을 하는 것은 보통 장수들과는 달라, 모험과 요행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적병이 아직 10만 명이나 되는데, 우리가 만약 오골성으로 돌아간다면 고구려 군사들이 반드시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격파하고 건안성을 빼앗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이런 뒤에 군사를 멀리 이끌고 나가는 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하니 황제가 곧 중지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안시성을 빨리 공격하려고 하는데 황제가 성안에서 들리는 닭과 돼지의 소리를 듣고 이세적에게 이르기를 "성을 포위한지 오래되어 성안에 밥짓는 연기가 날마다 줄어들고 있는데 이제 닭과 돼지들이 심히 요란스럽게 울부짖으니 이것은 반드시 군사들을 배불리 먹인 후 밤에 나와서 우리를 습격하려는 것이니 군사를 단속하여 이에 대비해야 한다" 하였다.
  이날 밤에 우리 군사 수백 명이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갔더니 황제가 이 말을 듣고 몸소 성 밑에 와서 군사를 불러 급하게 치므로 우리 군사 수십 명이 죽었고 남은 군사들은 퇴각하여 달아났다.
  강하왕 도종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흙산을 쌓고 안시성으로 차츰 가까워졌다.
  성안에서도 성을 더욱 높여서 방어를 굳게 하고 군사들이 교대하면서 하루 6, 7회씩 싸웠다.
  당 나라 군사의 돌격차와 기계 포의 돌이 성벽을 허물었으나 성안에서 그 때 마다 목책을 세워서 부숴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다쳤는데 황제가 몸소 침을 놓아주었다.
  밤낮을 쉬지 않고 산을 쌓아 무릇 60일이 걸렸으며 품이 50만이나 들었다.
  산꼭대기가 성보다 두어 길이나 더 높아서 성안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었다.
  도종이 과의 부복애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산꼭대기에 진을 쳐서 적군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산이 허물어져 성을 눌러 안시성이 무너졌다.
  바로 이 때에 부복애가 제 마음대로 지키던 자리를 떠나니 우리 군사 수백 명이 성의 허물어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드디어 흙산을 탈취하여 웅거하면서 참호를 파고 지켰다.
  황제가 화가 나서 부복애의 목을 베어 조리를 돌리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치게 하였으나 사흘이 지나도 이기지 못하였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로 나가서 죄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너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나는 한 무제가 왕회를 죽인 것이 진 목공이 맹명을 등용한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또 너는 개모성과 요동을 함락시킨 공로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하는 것이다"하였다.
  황제가 생각하기를 요동은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을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없으며, 또한 군량이 머지않아 떨어지겠으므로 군사를 철수하라고 명령하였다.
  먼저 요주, 개주 두 주의 주민들을 뽑아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밑에서 군사 시위를 하고 돌아가니 성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성주가 성에 올라 절하며 작별하니 황제는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칭찬하면서 겹실로 싼 명주 1백 필을 주어 그의 충성심을 격려하였다.
  이세적과 도종에게 명령하여 보병, 기병 4만을 거느려 후군으로 서게 하고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는데 요택에서 진흙 수렁 때문에 수레와 말들이 통과할 수가 없었다.
  장손무기에게 명령하여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며 수레로써 다리를 삼도록 하고 황제가 몸소 말채찍 끈으로 풀을 묶어 이 일을 도왔다.

  겨울10월에 황제가 포구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길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니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 군사들의 옷이 젖어 얼어죽는 자가 많으므로 길가에 불을 피워 행군도중 쬐게 하였다.

  현토, 횡산, 개모, 마미, 요동, 백암, 비사, 협곡, 은산, 후황 등 10개 성을 철폐하고 요주, 개주, 암주 3개 주의 백성들을 중국으로 옮겨 간 것이 7만 명이었다.
 
  고연수는 당나라에 항복한 뒤로부터 늘 분개하고 한탄하면서 지내다가 얼마 후에 화병으로 죽고 고혜진은 마침내 장안(長安)까지 갔다.
 신성, 건안, 주필산의 세 차례의 큰 싸움에서 우리 군사와 당 나라 군사 그리고 말들이 매우 많이 죽었다.
  황제가 공을 이루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한탄하여 말하기를 "만일 위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걸음을 하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 태종이 고구려를 직접 침공하기 위한 준비과정과 침공루트를 자세히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이때 당 태종은 지금의 하북성 성도인 석가장 동북쪽 정주(定州)에서부터 전투복장을 갖추고 출발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지금의 북한 평양이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고, 지금의 요하가 옛 요수로서 그곳이 고구려와 당나라간의 국경이라면 당태종은 군사들을 그 멀리 정주에서부터 전투대형을 갖추어 출발시킬 일이 아니라 요녕성 금주쯤으로 집합하게 한 후 그곳에서 전투대형을 갖추어 동쪽으로 요하를 건너고 요동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 평양을 공격해야만 행군거리를 최소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육군의 행군거리를 짧게 해야 한다는 것은 전쟁의 ABC에 속하는 사항인데,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당 태종이나 그 휘하의 장수들은 왜 그 먼 정주에서 육군을 출발시켰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주장대로 고구려의 평양성이 지금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고, 이때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국경이 북경 서남쪽 영정하, 해하로 이어지는 선이라면 당 태종이 군사들을 정주에서 출발시킨 이유가 설명되는 것이다.
 

  이때 당 태종은 육군을 이끌고 정주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행군하여 요택을 지나 요수(영정하)를 건너 마수산에 진을 쳤고, 북경 부근에 있는 수많은 고구려의 방어성들을 함락시킨 후 동북쪽으로 행군하여 평양성 즉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를 공격하려 했던 것이고,
  수군은 동래 즉 지금의 산동반도에서 서북쪽으로 발해를 건너 난하(패수)를 타고 올라가 하북성 승덕시를 공격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세적군은 북쪽으로 태행산맥을 넘어 현토를 지나고 요수(영정하상류인 양하)를 건너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 방향으로 향하여 신성(선화고성)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이 성문을 닫고 수비하는 통에 그 성을 함락시킬 수 없자 그를 놓아두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개모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지금의 팔달령을 넘어 요동성을 공격하게 되는데, 요동성은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리고  당 태종은 정주(定州)를 출발해 북쪽으로 향하여 지금의 보정을 지나고, (이때 갈석산에 올랐다고 하는데, 지금의 보정 낭아산이다) 요택을 어렵게 통과하고 영정하(요수)를 건너 마수산에 진을 친 후 요동성으로 가게 되어 전군이 요동성에 집결하게 되고 결국 요동성을 함락시키게 된다.
  그리고는 다시 요동성 부근의 백암성을 쳐 항복시키고, 다시 북쪽의 안시성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들 성들은 모두 지금의 북경부근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된다.
  요수에 관한 수경의 기록을 보면,
  大遼水 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又 東南過房縣西 又 東過安市縣西南 入於海(대요수 출새외위백평산 동남입새 과요동양평현서 우 동남과방현서 우 동과안시현서남 입어해 즉 대요수는 장성밖 백평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장성으로 들어와 요동 양평현 서쪽을 지나고, 또 동남쪽으로 흘러 방현 서쪽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흘러 안시현(필자주 : 안평현의 오기인 듯) 서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 영정하의 흐름과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당나라군은 이 안시성(安市城)을 그대로 놓아두고는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안시성을 그대로 놓아두고 진군하면 안시성의 고구려군이 군량 보급로를 끊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당나라군은 반드시 이 안시성을 함락 시켜야 했으나 안시성은 난공 불락의 요새였고, 도저히 함락시킬 수가 없어 60일 동안 온 군사를 동원하여 흙산을 쌓아 안시성을 함락시켜보려 시도했지만 그 흙산을 고구려군이 점령해 버려 무위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그러자 당 태종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하고 전 군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때 안시성주가 양만춘이었다고도 하나 이는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난공불락의 요새 안시성을 지금 요하 동쪽에서 찾고 있었으니 역사의 현장을 잘못 알고 전혀 엉뚱한 곳에서 안시성을 찾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당시 고구려군과 당나라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에서 전쟁을 했고, 그 부근에 신성, 건안성,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안시성, 오골성 등이 있었는데, 그를 모르고 지금의 요하 동쪽에서 그 성들을 찾으려 했고 엉뚱한 옛 성터에 그 이름을 붙여 역사를 해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