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새롭게 비정하는 고구려의 도읍과 그 위치 - 최초주장
[청나라 때의 여름궁전인 하북성 승덕시 열하행궁(피서산장)의 정문인 여정문]
지금 압록강 너머 집안(輯安:集安)에는 호태왕비가 서 있고, 왕릉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고분들과 그 집안 부근에는 돌을 쌓아 만든 적석분들이 즐비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그곳을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國內城)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국내성이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대 유리왕 22년(A.D.3) 조에,
"겨울 10월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라는 기록과
16대 고국원왕 12년(A.D.342) 조의 "봄 2월 환도성을 보수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라는 기록에 따라 지금의 집안을 국내성이라 추정한 것 뿐이다.
국내성은 서기 3년부터 10대 산상왕 13년(A.D.209)에 환도성으로 옮기기 전까지 고구려의 도읍이었다.
그랬다가 11대 동천왕 21년인 247년에 위나라의 관구검에게 환도성을 함락 당하자 '환도성은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할 수 없다' 하여 평양성으로 옮겼고,
16대 고국원왕 12년인 342년에 평양성으로부터 다시 환도성으로 옮겨 살다가[移居丸都城] 연나라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또 다시 환도성이 함락되자 343년 7월 평양성 동쪽의 황성으로 다시 이거하게 된다[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
그러다가 20대 장수왕 15년인 427년에 이르러 황성으로부터 다시 평양성으로 옮기게 되고,
25대 평원왕 28년인 586년에 또 다시 장안성으로 옮기게 되는데, 중국 사서들에는 장안성과 평양성이 같은 장소인 듯 기록되어 있다. 이를보면 평양성과 황성, 그리고 장안성은 서로 가까이 위치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전신은 졸본부여였으며, 졸본부여의 전신은 북부여였고, 북부여의 전신은 고조선이었으므로 결국 고조선 땅에서 왕조만 바뀌면서 역사를 이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만들어진 우리의 역사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지금 북한의 평양을 말하는 것이고, 그곳이 곧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는 그 기록을 보고 북한 평양을 기준으로 고구려의 도읍을 찾으려 했던 것이고, 마침 지금 집안에는 호태왕비도 서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지금의 요하를 요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조선의 왕검성이 지금의 북한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를 너무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며 고구려의 도읍들을 처음부터 다시 비정해야 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첫도읍 졸본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 부근으로 비정되고, 국내위나암(국내성)은 연경현 영녕(永寧)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21년(A.D.2) 조를 보면 장생의 직책에 있던 설지라는 사람이 제사에 쓸 도망한 돼지를 쫓아 졸본으로부터 국내위나암까지 갔다 와서는, 유리왕에게 보고하기를, 그곳이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토양이 오곡을 재배하기에 알맞으며, 산짐승과 물고기 등이 많아 도읍으로서 손색없는 입지라고 추천해 결국 유리왕은 그곳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했기 때문이다.
☆ 이 때 유리왕은 설지에게 비밀리에 명을 내려 도읍할 만한 곳을 찾아 보라 했을 것이고, 설지는 다른 사람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도망한 돼지를 찾으러 간다고 핑계대고 졸본을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환도성은 국내성의 동쪽방향인 지금의 북경 북쪽 발해진 부근으로 비정된다.
어수선한 중국쪽으로 진출할 생각으로 요동성에 가까운 쪽으로 옮겼던 것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못했다.
☆ 지금 하북성 진황도시와 승덕시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도산(都山: 해발 1,846m)이라는 산이 있어 이 산을 환도산(丸都山)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그 산은 환도산이 아니라 백제의 북한산이었다.
환도성은 고구려의 도읍과 임시도읍 역할을 하였는데, 고구려의 왕들이 환도성으로 옮겨 살 때는 중국의 정정이 매우 불안할 때로서 고구려는 중국 쪽으로 진출할 마음을 가지고 왕들이 옮겨 갔으나 두 번 모두 중원을 엿보는 이웃나라 위나라와 연나라의 견제 침입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첫 번째 환도성으로의 천도는 산상왕 13년인 209년 10월에 있었는데, 이때는 후한 말로써 정정이 매우 불안하던 때였고, 결국 위, 촉, 오 삼국이 건국되어 중원의 패자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는데, 산상왕도 미리 그러한 상황을 예측하고 기회를 보아 중국 쪽으로 진출할 생각으로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나 그 아들 동천왕 20년(A.D.246)에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을 받고 환도성이 함락되어 중원으로 진출할 한번의 기회를 놓치게 되고,
두 번째 이거는 고국원왕 12년인 서기 342년 8월로써 이때는 서진이 멸망하고 5호 16국 시대가 한창이던 혼란한 시절이었다.
중원 북쪽의 패자가 누가 될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미의 시대였다.
그런데 전연 모용황의 갑작스런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인 태후와 왕비가 볼모로 잡혀가고 선왕의 유골을 파 가져가는 통에 고구려는 우수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나라에게 신하라고 칭해야 했고.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옮겨야 했다. 그리하여 중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도 놓치고 만다.
장수왕은 황성 시대를 마감하고 427년에 다시 평양성으로 옮겼는데, 평양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서 옛 고조선의 왕검성이었고, 위만조선의 도읍이었으며, 전한 낙랑군의 치소였던 곳이다.
그리하여 대무신왕이 서기 37년에 최리의 낙랑국(필자주 : 최리는 왕망 때의 혼란을 틈타 낙랑군 땅에 낙랑국을 세웠다가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멸망당했다)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빼앗아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시켰고, 동천왕이 환도성을 위나라 관구검에게 함락 당하고 도읍했던 곳이었고, 고국원왕도 평양 동쪽의 황성에 임시로 도읍했던 곳이었는데, 장수왕이 황성으로부터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됨으로써 드디어 고구려의 평양성 시대가 열리게 되는데, 중국에는 고구려의 도읍으로서 이 평양성이 많이 알려지게 되어 중국 사서들에는 평양성이 고구려의 도읍으로 기록되고 있다.
언젠가 고구려 장수왕의 능을 그 부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필자주 : 흥륭부근의 수왕분이 고구려 장수왕의 능이 조성되었던 곳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25대 평원왕 28년(A.D.586)에 이르러 고구려는 평양성(平壤城)에서 다시 장안성(長安城)으로 또 한번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장안성의 위치에 대하여도 논란들이 많다.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 백제 조를 보면,
"당서(신당서)에는 평양성을 장안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기(古記)에는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옮겼다고 하니 두 성이 같은지 다른지, 먼지 가까운지 알 수가 없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김부식과 고려의 학자들도 이 장안성에 대해서는 그 위치 비정을 포기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떤 사람은 고구려의 도읍 장안성이 중국 서안의 의 장안성과 이름이 같은 것에 착안하여 이때 고구려가 옮긴 도읍 장안성이 지금의 섬서성 서안이라고 하는 사람까지 생겨나게 되었는데, 말이 되지를 않으며 역사를 한참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기록을 확대 해석함으로써 우리의 고대 역사 강역을 조금이라도 넓혀 한 민족의 영광스런 역사를 돋보이게 하고자 하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을 역사적 사실인 것같이 확대 해석하는 것 또한 역사왜곡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할 일이다.
☆ 북사에는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리로서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고,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수서에도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북이 6리이고, 산의 굴곡을 따라 쌓았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당서에는 "고구려의 왕이 살고 있는 곳은 평양성인데 장안성이라고도 부른다. 한나라 때의 낙랑군으로 경사에서 5천리 떨어져 있다.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까지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전한 낙랑군의 치소는 지금의 승덕시 부근이었으므로 사실 이 기록은 한반도 북한의 평양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었던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장안성 역시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 북한 학자들은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건국시조인 주몽의 능만을 파서 옮겼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후대 평양성에서 죽어 그 부근에 묻혔을 고구려왕들의 능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은 설명하지 못한다.
이때 평원왕은 중원을 통일해 가는 수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장안성을 쌓고 그곳으로 옮겨 살았던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이 역시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다.
☆ 지금 북한 평양에 있는 동명왕릉이라고 하는 고분은 고구려 주몽의 능이 아니고, 고구려 왕릉이라고 하는 것도 고구려 왕릉일 수 없다.
그런데 고구려의 도읍 이전에 관한 기록은 이것이 마지막으로서 역사 기록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평원왕의 아들인 영양왕은 평양성을 중심으로 수나라와 수차에 걸친 전쟁을 했고, 영류왕 역시 평양성에 머물렀으며, 보장왕 역시 평양성에서 항복함으로써 사직을 문닫았다.
이를 보면 장안성으로 옮겨 살던 평원왕이 죽자 그 아들인 영양왕이 다시 평양성으로 되돌아갔던 것은 아닐까?
혹시 황성, 장안성은 평양성 밖에서 왕들이 살던 왕궁의 이름이 아니었을까?
[참고]
고구려 왕릉의 추정 조성위치
1. 졸본(홀본, B.C.37년-A.D.3년 10월) : 고구려의 건국지로서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 부근이다.
시조 추모왕릉(주몽왕릉) 만이 조성되었다. 호태왕비문에 추모왕이 홀본(졸본) 동쪽 언덕에서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졸본 동쪽 언덕에 능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 졸본 부근에는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릉과 2대 부여무서왕릉도 조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2. 국내(국내성, A.D.3년 10월-209년 10월) : 지금의 중국 북경시 연경현 영녕진 부근이다.
2대 유리왕릉(두곡이궁에서 죽어 두곡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 3대 대무신왕릉(대수촌원), 4대 민중왕릉(민중원석굴), 5대 모본왕릉, 6대 태조대왕릉, 7대 차대왕릉, 8대 신대왕릉, 9대 고국천왕릉이 조성되었다.
3. 환도성(A.D.209 10월-247년 2월) : 지금의 북경 북쪽 발해진 부근이다.
10대 산상왕릉이 조성되었다.
4. 평양성(A.D.247년 2월 - 342년8월) :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다.
11대 동천왕릉, 12대 중천왕릉, 13대 서천왕릉, 14대 봉상왕릉, 15대 미천왕릉이 조성되었다,
5. 환도성(A.D.342년 8월 - 343년 7월) : 임시도읍
6. 황성(A.D.343년 7월 - 427년) : 평양 동쪽 목멱산 속에 위치했다고 하였으니 평양성 동쪽 가까이에 위치했을 것이다. 지금의 승덕시 동쪽이다.
16대 고국원왕릉, 17대 소수림왕릉, 18대 고국양왕릉, 19대 광개토대왕릉이 조성되었다.
7. 평양성(A.D.427년 - 586년) : 장수왕이 옮긴 도읍으로서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다.
20대 장수왕릉(승덕시 서남쪽 흥륭현 응수영자광 부근에 수왕분진이 있다), 21대 문자왕릉, 22대 안장왕릉, 23대 안원왕릉, 24대 양원왕릉이 조성되었다.
8. 장안성(A.D.586년- 668년) : 중국 사서들에는 평양성을 장안성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평양성과 장안성은 매우 가까이 위치했을 것인데, 지형으로보아 평양성의 북쪽에 위치했을 것이다.
다만 평양성이나 동쪽의 황성 그리고 장안성은 모두 평양성과 가까이 접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인데, 삼국사기에는 왜 같은 평양시내에서 성만 옮겨 간 것을 모두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했는지 의문이다.
25대 평원왕릉, 26대 영양왕릉, 27대 영류왕릉이 조성되었다.
☆ 장안성으로부터 평양성으로 다시 옮겼다는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고구려 멸망시 평양성을 중심으로 최후의 전투를 벌인 것을 보면 언젠가 장안성에서 평양성으로 다시 옮겼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28대 보장왕은 당나라 장안에 묻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