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백제 책계왕비 보과는 공손씨였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26. 00:43

윤여동설 - 백제 책계왕비 보과는 공손씨였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건국설화를 보면,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자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매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로써 아내를 삼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 동명왕의 후손인 구태라는 사람이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과 혼인을 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 동명이란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을 말하는 것이고, 구태는 백제 4대 개루왕의 차자로서 초고왕의 동생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대방 옛 땅에 백제를 세운 인물이 아니라 백제의 왕자 신분이었고, 후일 그의 손자인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 요동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공손도가 이웃나라인 백제의 왕자 구태에게 그의 딸을 시집보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9대 책계왕 조를 보면,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에게 장가를 들어 부인을 삼았다" 는 기록이 있어 이때 보과가 대방의 공주 신분으로서 백제 책계왕과 혼인했었음을 알 수 있고,

 

☆ 8대 고이왕의 재위 기간은 서기 234년부터 286년까지였고, 9대 책계왕은 286년에 왕위에 올라 298년에 죽었다.

 

10대 분서왕 조를 보면,
  "분서왕은 책계왕의 장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도 지혜로웠으며 모습이 아름다워 왕이 사랑하여 옆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서왕은 책계왕과 보과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 그러나 백제의 왕비는 주로 진씨(眞氏) 가문에서 간택되었던 것으로 나타나므로 혹시 보과가 책계왕의 후궁이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분서왕의 생모는 진씨여인이었을 지도 모른다.

 
  공손강은 요동태수였던 공손도의 아들로서 서기 172년에 태어나 221년에 죽었는데, 후한 말기 혼란한 시기를 틈타 요동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던 공손도가 204년에 죽자 그 직위를 물려받았고, 강역을 넓혀 대방군을 새로 설치하고 서기221년에 죽었는데, 공손강은 이때 이미 스스로 왕을 자처했다고 한다.
  공손강의 뒤를 이은 공손공은 형인 공손강이 죽었으나 그 아들이 아직 나이가 어려 대신 그 직위를 물려받았다고 하나 228년에 이르러 공손강의 아들인 공손연에 의해 제거되는 것으로 보아 실제는 직위를 찬탈했다가 다시 빼앗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공손연은 요동군, 대방군 외에 다시 낙랑군까지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포함시킨 후 연왕을 자처함으로써 나라를 세워 위나라에 반기를 들게 되고, 위나라에서는 238년에 사마의로 하여금 연왕 공손연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공손연은 사마의군에게 패하고 도망치다가 잡혀 죽게 된다.
  이리하여 요동에서 세력을 떨치던 공손씨 3대의 세력이 소멸하게 되고 그 땅이 위나라의 영향 하에 들어갔다가 다시 서진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책계왕비 보과가 대방왕의 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대방은 후한 말기인 건안(A.D.196년∼219년)중에 공손강이 둔유의 남쪽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으로 만들었다는 곳으로서 지금의 북경 동쪽 준화부근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대방왕이란 시기적으로 대방군을 새로 설치했다는 공손강 또는 그 동생인 공손공 또는 공손연의 후손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는 서기 220년에 후한이 멸망하고 중국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삼국 즉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로 삼등분 되는데, 이때 보과의 아버지는 공손도의 후손으로서 후한 말기와 삼국초기의 어수선한 시기를 틈타 요동군과 대방군을 차지하고 스스로 왕을 칭했기 때문에 대방왕이라 기록될 수 있었을 것이다.

 

☆ 앞서 전한에서 왕망의 신나라를 지나 광무제의 후한으로 변화되는 시기에 최리가 전한낙랑군 땅을 차지하고 한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스스로 낙랑왕이라 했다가 고구려의 대무신왕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는데, 후한 광무제가 다시 그 낙랑 땅의 일부를 탈환하여 후한낙랑군을 설치했었다. 그런데 대방군은 바로 그 후한낙랑군 땅과 접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후한낙랑군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이고, 대방군은 준화 일원으로 비정된다.

    

  이때 대방의 주변국으로서는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었고, 동쪽은 백제, 남쪽에는 마한, 서쪽에는 요동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방은 가까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백제와의 화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백제의 고이왕 역시 이때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왕위에 올랐을 때였다.

 

☆ 사반왕은 고이왕의 조카였다. 따라서 고이왕은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인물이긴 한데, 이때 백제의 모든 제도가 정립됨으로서 백제가 발전해 갈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백제의 왕위 계승을 따져보면, 백제 시조는 온조왕이고, 2대는 온조왕의 손자인 다루왕이며, 3대는 다루왕의 손자인 기루왕이다. 그리고 4대는 개루왕으로서 기루왕의 손자이다. 백제의 초기왕위계승은 손자로서 간신간신히 이어진 듯 하다.

  기루왕이 오래 살았기 때문에 개루왕의 아버지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다.

  그리하여 개루왕은 할아버지인 기루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자는 5대 초고왕이고, 차자는 구태로서 8대 고이왕의 할아버지 되는 사람이었다.
  6대는 초고왕의 아들인 구수왕이었는데, 아들은 일찍 죽고 두 손자가 있었다.
  큰손자는 7대 사반왕이었고, 둘째 손자는 실명되어 이름을 알 수 없으나 11대 비류왕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었다.
   백제는 온조왕의 뒤를 이어 7대 사반왕까지는 장자계승을 원칙으로 하여 왕위를 이어갔다.

  그러다보니 개루왕의 경우와 같이 손자가 왕위를 잇기도 하였고, 사반왕의 경우에는 10세정도의 어린 손자가 왕위를 잇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이 어린 사반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의 7촌 재당숙부 되는 고이가 왕위를 찬탈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이후 백제의 왕실은 100여 년 간 뺏고 빼앗기는 왕위찬탈로 얼룩지게 된다. 즉 장자파인 초고왕의 후손들과 차자파인 구태의 후손들 간에 왕위를 놓고 공방전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8대 고이왕이 왕위를 찬탈하여 9대 책계왕을 지나 10대 분서왕까지는 그의 후손으로 이어지다가 장자파인 11대 비류왕이 다시 왕위를 장자파로 빼앗아 왔다가, 차자파인 12대 계왕이 다시 왕위를 빼앗아 갔다가, 다시 장자파인 13대 근초고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게 되자 백제는 장자파와 차자파로 나뉘어 20여 년 간 내란으로 치닫게 된다.
  이 내란으로 백제는 대륙백제와 반도백제로 쪼개졌다가 다시 1백여 년이 지난 개로왕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 통합을 추진하게 되고, 문주왕, 삼근왕 대의 혼란기를 지난 후 반도백제 모도왕의 둘째 손자인 동성왕이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름으로서 두 백제는 통합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때 대륙백제는 반도백제에 흡수통합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의 시작점에 서 있고, 조카인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고이왕으로서는 이웃한 대방과 혼인관계를 맺는다면 국제적으로도 정통성을 인정받는 셈이 되므로 대방과 백제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국혼이 쉽게 성사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어느 쪽에서 먼저 국혼을 제안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백제는 대방이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방을 확실한 내편으로 만들어 놓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고, 대방으로서는 국력이 약한 나라로서 보호막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렇게 하여 백제의 책계왕자와 대방의 보과공주는 정략적인 혼인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고이왕이 죽고 책계가 왕위에 올랐을 때인 286년에 고구려에서 대방을 침공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중국에서는 위나라가 소멸하고 사마염의 진(西晉)나라가 건국된 후였는데, 이때 고구려가 대방군을 침공하자 진나라(서진)에서는 대방과 이웃한 백제에게 파병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때 백제의 책계왕은 "대방은 우리와 사돈지간이 되는 곳이니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대방을 위험에서 구해 주고자 구원군을 파견하기도 하는 등 서진과 백제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 그러나 이때 책계왕의 실제 처갓집이었을 공손씨 일가는 238년에 이미 소멸한 상태였고, 위나라도 266년에 이르러 멸망하고 사마염의 서진이 중국을 통일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대방군이 실제 책계왕의 처가와는 직접관련이 없었겠으나 백제는 강력한 세력인 서진의 파병요청을 무조건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대방군과 낙랑군이 고구려와 백제간의 완충지역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왕의 처갓집 동네를 도와줘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파병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책계왕이 죽고 아들인 분서왕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재위 7년 만에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되고 마는데, 분서왕은 백제의 장자파와 차자파 간 왕위찬탈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죽게 되었을 것이다.
  대방공주 보과(寶菓)가 언제까지 살았었는지, 자녀가 몇이나 있었는지는 기록에 나타나고 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지금 알 수 없으나 그녀가 요동을 근거로 한 때 세력을 떨쳤던 공손씨(公孫氏)였음은 틀림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