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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900년 존속설과 부흥운동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9. 22:39

윤여동설 - 고구려 900년 존속설과 부흥운동 - 최초주장

 

 

  우리 민족 역사에서 가장 광대한 강역을 일구었던 고구려의 멸망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 우리가 지금도 매우 넓은 강역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런데 당나라 사람인 가언충이라는 사람은 고구려비기라는 예언서에 고구려가 건국된 지 900년 만에 80대장에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다고 하고, 고구려가 멸망한 서기 668년이 건국된 지 꼭 900년이 되는 해였다고도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상한 것은 어떻게 서기 668년이 고구려가 건국된 지 900년이 되는 해라고 말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우리의 역사 상식으로는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어 705년만인 서기 668년에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느 사람은 신라의 후예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신라의 건국년도보다 고구려의 건국연도를 늦게 만들기 위해 고구려의 초기 왕대를 고의로 잘라 버렸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를 잘못 이해한 것이고, 김부식 등은 고구려의 건국시조로 기록되고 있는 주몽의 혈통이 북부여에 닿아 있으나 엄연히 북부여와 고구려는 다른 나라이기 때문에 북부여와 고구려를 분리하여 기록했을 뿐 고구려의 초기 역사를 잘라버린 것은 아니었다.

 

  북부여의 건국시조는 해모수로서 기원전 239년에 나라를 세워 232년에 천제의 자리에 올랐고, 그 아들 해모수리, 해해사, 해우루로 왕위가 이어졌는데, 해우루왕 때인 기원전 108년에 졸본에서 동명이라는 사람이 다시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것이 곧 동명왕의 졸본부여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86년에 이르러 북부여가 동명왕의 졸본부여에게 병합을 당하고 북부여 4대왕이었던 해우루왕이 죽게 되어 나라가 망하자 해우루왕의 동생이었던 해부루가 유민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쳐 창해군 예의 땅을 빼앗아 차지하고 다시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부여(가섭원부여라고도 한다)이다.

[필자주 : 이때 그 땅을 동부여에게 빼앗긴 창해군 예는 개마산을 넘어 동쪽의 임둔군 땅으로 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예를 다시 부활시키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동예라 부른다.

이때  동예에게 그 땅을 빼앗긴 임둔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데, 필자는 혹시 이 임둔 사람들이 그 땅을 동예에게 빼앗기자 그곳을 떠나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가서 인디언, 인디오가 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보기도 한다]  

 

  그런데 해모수의 고손자인 주몽이 동부여에서 태어나 자라서 졸본부여로 와서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왕의 부마(사위)가 되었다가 그 왕위를 물려받았고, 또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인 애 둘 딸린 과부 소서노와도 잠깐 혼인을 하게 됨으로써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양아들같이 되어 버렸으나 주몽이 그 왕위를 자신의 친아들인 유리에게 물려주려 하자 소서노와 비류, 온조는 졸본을 떠나 진번 남쪽 한산 부근 땅으로 가게 되고, 주몽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게 되어 졸본부여는 소멸하고 북부여 해모수의 맥을 잇는 고구려가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기원전 19년 4월에 동부여에서 유리가 졸본으로 도망쳐 오게 되고, 그로부터 5개월 뒤에 주몽이 죽고 유리가 왕위를 잇게 되자 졸본부여 동명왕의 증손자였던 온조도 진번 남쪽 땅에 졸본부여의 맥을 잇는 백제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40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서 주몽은 기원전 79년에 태어나 기원전 19년에 죽었으므로 61세의 나이로 죽었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라 있던 21년 간을 계산에서 누락시키게 되어 주몽이 기원전 58년에 태어나 기원전 19년에 40세의 나이로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오기이고 기원전 58년은 주몽의 아들 유리가 동부여에서 태어난 때였다.
  

 
  이렇게 세 부여는 삼각관계로 얽혀 있었고, 이는 곧 고구려와 백제의 미묘한 관계이기도 하다.              
  그렇게 두 나라는 존속하다가 서기 660년에 백제가 먼저 멸망하게 되었고, 고구려 역시 서기 668년에 멸망당하게 되고 마는데, 가언충이 고구려가 건국된 지 꼭 900년이 될 때에 멸망할 것이라고 한 말은 기원전 232년으로부터 서기 668년까지의 900년 간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기원전 232년은 북부여 해모수가 천제의 자리에 올랐던 해였다.

 
  이는 중국 사람들이 고구려가 북부여에 혈통이 닿아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고구려는 서기 668년 멸망 당시 5부, 176성, 69만여 호였는데, 당나라에서는 그 땅을 9도독부, 42주 101현(신당서에는 100현이라고 했다)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그 땅을 통치하려 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다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북한 평양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9도독부 역시 지금의 북한 지역을 나누어 설치되었었을 것으로 막연히 추정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평양성이 지금 북한의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고구려는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에서 건국되어 북쪽으로는 내몽골, 동쪽으로는 승덕시 일원으로 강역을 넓혀 갔고, 다시 그 동쪽인 요녕성 등으로 강역을 넓혔는데, 막상 대국인 고구려가 멸망하자 주변국들은 스스로 살길을 찾았을 것이다.
  일부는 당나라에 복속했을 것이고, 일부는 스스로 독립했거나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나라에서는 평양성을 중심으로 한 원래의 고구려 지역만을 나누어 도독부를 설치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 9도독부의 위치가 정확히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 그를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겠지만 지금의 승덕시와 장가구시, 내몽골 적봉시, 요녕성 조양시 일원과 그 부근 지역을 나누어 설치되었을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게 고구려가 멸망하고 보장왕을 비롯한 왕족, 장군 등이 당나라 장안으로 압송되자 고구려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맨 처음 부흥의 깃발을 든 사람이 바로 검모잠이었다.
  이때 검모잠은 670년 4월에 보장왕의 외손자 안순을 추대하여 왕위에 올리고, 부흥운동을 전개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망쳐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 당나라에서 안동도호부를 요동주로 옮기는데 이를 보면 이때쯤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어 있던 평양성은 고구려 부흥군이 탈환하여 차지했던 듯하다.
  그 후에도 안시성을 비롯한 백빙산, 호로하 등에서 산발적인 부흥운동이 있었으나 모두 토벌 당하게 되어 고구려의 부흥운동은 실패하게 된다.


  677년에 이르러 당나라에서는 항복하고 장안으로 압송되었던 보장왕을  요동주도독 조선왕으로 삼아 요동으로 돌려보내 유민을 진무하게 하고, 안동도호부를 다시 신성으로 옮기는데, 요동에 도착한 보장왕은 고구려를 부흥 시켜보려고 말갈과 내통하다가 그것이 발각된다.
  그러자 당나라는 보장왕을 다시 소환해 앙주로 귀양을 보냈는데, 보장왕은 그곳에서 682년에 죽어 이국 땅 장안에 묻히게 된다.
  이후에도 보장왕의 손자를 조선군왕으로 봉하기도 하고, 보장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기도 하나 이는 이미 옛 고구려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회를 틈타 속말말갈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니 이가 곧 발해이다.      
 

☆ 독사방여기요 산동 요동도지휘사사 조의 주를 보면 통전의 기록을 인용하여,
  "총장원년(A.D.668) 이적(이세적)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176성을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만들고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그리고는 그 추장 거수들을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았다.
  상원 2년(A.D.675)에 도호부를 요동 옛 성으로 옮겼다가 의봉 2년(A.D.677)에 또 신성으로 옮겼다.
  성력 원년(A.D.698)에 안동도독부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신룡 원년(A.D.705)에 다시 도호부로 했다.
  개원 2년(A.D.714)에 평주로 옮겼다가 천보 2년(A.D.743)에 또 요서 옛 성으로 옮겼고 지덕(A.D.756∼757) 이후에 폐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안동도호부가 평양성→요동고성→신성→평주→요서고성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