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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가야 왕비 허황옥은 정말 아유타국 공주였을까?

윤여동 2007. 10. 24. 21:25

윤여동설 - 가야 왕비 허황옥은 정말 아유타국 공주였을까?

 

 

                                                                   김해 허왕후릉

 

                                                                        김해 수로왕릉

 

 

  삼국유사 기이 제2 가락국기에는,
 『건무 24년(A.D.48) 무신 7월 27일 아홉간이 조회를 할 때 말씀을 올리기를 "대왕께서 강림하심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므로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 하고는 왕이 유천간으로 하여금 배와 준마를 가지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망산도는 도읍 남쪽의 섬이고, 승점은 도읍 부근에 있는 나라이다)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올라와 달려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가 대궐로 달려와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여 바로 아홉간을 보내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하기를,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하였다.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하니 왕이 옳게 여겨 유사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다른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 이르러 입은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때 시종한 신하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와 조광이고 그들 아내의 이름은 모정과 모량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하면 20여명인데, 가지고 온 금수능라와 의상필단, 금은주옥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니 왕이 나아가 맞아서 장막궁전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뜰 아래서 뵙고 즉시 물러갔는데,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신하 내외들을 안내하게 하고 말하기를,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 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하고는 음식과 술을 주고, 좋은 이불 속에서 자게 했으며, 옷과 비단과 보화를 주고, 군사를 보내 호위하게 했다.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에 드니 왕후가 조용하게 왕에게 말하기를 "저는 아유타국 공주인데,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인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를 뵈웠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수로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남자이다. 또 나라를 새롭게 다스리고자 하는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셨는데,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부모와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와서 감히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아들이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게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고는 그녀와 혼인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수로왕과 허황옥이 혼인하게 된 경위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기록을 읽은 우리는 지금까지 허황옥이 아유타국 공주이고, 아유타국이 인도 부근에 있던 나라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 15세 풍월주 유신공 조를 보면,
  "금관가야는 수로청예왕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황룡국 여자 황옥을 맞아들여 거등을 낳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허황옥이 아유타국 공주가 아니라 황룡국 여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기록이 맞는 것일까?
  삼국유사 탑상 제4 금관성 파사석탑 조를 보면,
  『금관에 있는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이었을 때 세조 수로왕의 왕비 허황후 황옥이 동한(후한) 건무 24년 갑신(A.D.48)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두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 하는데, 수신의 노여움을 받아 가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에게 아뢰자 부왕은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평안히 바다를 건너 (가야의)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배를 대었다.
  이때 그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그곳을 주포(主浦 : 朱浦의 오기?)라고 한다.
  그리고 맨 처음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은 바위를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처음으로 해안에 들어가던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한다........(중략)..........탑은 4면으로 각이 져 있고, 5층으로서 그 조각은 매우 기묘하다.
  돌에는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품질이 매우 좋은데,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 종류가 아니다. 본초(신농본초)에서 말한 "닭의 볏의 피를 찍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시험했다" 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허황옥이 아유타국 공주의 신분임은 툴림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화랑세기는 왜 그녀를 황룡국 여자라고 기록한 것일까?
  황룡국이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27년(A.D.8) 조에 "봄 정월 왕의 태자 해명이 옛 도읍(졸본)에 남아 있었는데, 힘이 세고 용감했다. 황룡국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궁(강한 활)을 선물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황룡국이 졸본, 국내성 부근에 위치한 나라로 나타난다.
  고구려의 국내성은 북경 북서쪽 연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므로 황룡국도 그 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허황옥은 원래 인도 부근의 아유타국 공주였는데, 황룡국으로 가서 살다가 다시 가야로 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허왕후를 아유타국 공주라고 기록한 삼국유사의 기록도 옳고, 허왕후가 황룡국 여자라고 기록한 화랑세기의 기록도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삼국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되기 훨씬 전에 이미 삼국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불교가 훨씬 이전에 전래되었다가 어느 시점에 침체하여 사라졌다가 다시 4세기 말경 다시 전래되었다고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전불시대의 흔적으로 지목하는 황룡사 가섭불 연좌석이나 요동성 육왕탑 등이 먼저 전래되었던 불교의 흔적일지도 모르고 그를 최초로 전파한 사람이 수로왕비 허황옥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상식처럼 가야는 한반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요녕성 호로도시 흥성 부근에 위치했고, 그 곳이 바로 옛 변한이었다. 

  따라서 허황옥이 도착했다는 기출변도 흥성 부근으로 비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김해 부근에서 유물이 출토되면 무조건 가야유물이라 하고 그 부근의 고총들을 가야무덤이라 하고  있는데, 실제로 가야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 지금의 발해 북쪽 호로도 흥성부근에 위치했었다면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보고,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