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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훈요십조 제8조는 한반도의 전라도를 말하는게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26. 01:32

윤여동설 - 훈요십조 제8조의 "차현이남 (車峴以南 ) 공주강외(公州江外)"는 한반도의 전라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고려의 건국시조 왕건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했던지 서기 943년 4월에 대광인 박술희를 불러 자기가 이루어 놓은 고려를 후손들이 그르칠까봐 걱정되니 자신의 후예들이 아침 저녁으로 펴보고 귀감으로 삼게 하라 하면서 자신이 직접 지은 "훈요 십조"를 주고, 5월에 이르러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훈요십조 중 제 8조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그 논란의 중심에 "차현과 공주강"이 자리하고 있다.   

  훈요십조 제 8조의 전체적 내용은,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의 산 모양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의 주군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국가를 혼란하게 하고, 백제가 통합 당한 원한을 가지고 왕을 범하는 죄를 저지르고 난을 일으킬 것이다.
  한낱 관청의 노비이거나 진, 역, 잡척에 속한 무리라 할지라도 권세 있는 사람에게 붙어 신역을 면하거나, 왕후, 궁원에 붙어 간사하고 교묘한 말로서 권력을 농단하고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선량한 사람으로 보이더라도 벼슬을 주어 권세를 부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라는 것으로서 한 마디로 차현 이남, 공주강 밖(車峴以南 公州江外) 사람은 고려에 대하여 배역할 것이니 절대 관리로 등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차현과 공주강이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찾게 되었고, 조선 시대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은 고려가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을 도읍으로 했다고 생각하고는 이 기록을 한반도에 비정하여 해석하려 했다.
  즉 차현이라는 곳은 지금의 차령고개를 말하는 것이고, 공주강은 지금의 금강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는 산형과 지세가 배역하다는 것을 금강이 개성을 향해서 활시위를 당기는 것 같은 반궁수 형국으로 흐르고 있어서 왕건이 그러한 유언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고, 어느 사람은 훈요십조 제8조가 변조되었을 것이라고도 했고, 그렇지 않다고도 했다.  
  내용이 변조되었을 것으로 보는 이유는, 고려 초기에 훈요십조가 난리 통에 행방불명되었다가, 80여 년 후인 10대 정종 때에 경상도 출신인 최제안이 최항이라는 사람의 서고에서 훈요십조를 발견하여 다시 왕실로 되돌아오게 되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다.
  따라서 훈요십조가 민간으로 유출되어 있을 때 내용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고려시대 때에도 신라의 후예들과 백제의 후예들간에 갈등이 있었고, 그리하여 신라의 후예들이 백제 후예들의 출사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기 위하여 태조 왕건이 지어 전한 훈요십조의 내용 중에 제8조의 내용을 조작하여 변조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른 문서도 아닌 훈요십조를 변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서 현재 원본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훈요십조의 내용 만은 원래 훈요십조의 내용 그대로 임에 틀림없을 것이며 왕건이 말한 "차현이남 공주강외(차현이남 공주강밖)"라는 것은 한반도 전라도 지역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을 보는 필자의 마음은 매우 안타깝다.   
  왜냐하면 고려가 등주, 내주, 빈주, 체주와 정확히 마주보는 위치에서 건국되었다는 것을 이들이 잘못 해석하고 있으며, 태조 왕건의 두 번째 왕비는 장화왕후 오씨로서 전라도 나주 사람이었고 그녀가 낳은 아들이 후일 왕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혜종인데, "차현이남(車峴以南) 공주강외(公州江外)" 를 지금의 충남 공주 이남으로 본다면 왕건 스스로가 전라도 나주 여인을 왕후로 맞아들였고 또 그녀가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정해 놓고 금강이남 사람이 배역할 것이니 그 지방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고 유서를 작성하여 전하면서 그 아들에게 꼭 지키라고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왕건이 말한 훈요십조 제8조의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대로 한반도 차령산맥과 금강의 남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앞 글인 "우리 역사의 비밀을 밝혀줄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건국지가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북쪽 하북성 부근 지역이라고 했고, 고려의 도읍 개경은 바로 중국 하북성 승덕시의 동남쪽에 있는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이라고 했다.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 선죽교 남쪽에 좌견리(坐犬里)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 하북성 관성현(寬城縣)의 폭하 남쪽에 마치 개가 앉아 있는 것 같은 지형이 있다]

 

[고려 개경(開京) 서쪽 서강에 군자가 말탄 형상의 지형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 하북성 관성현(寬城縣)의 서쪽에 군자가 말탄 형상이 있다. 하북성 관성현이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이었음이 확실한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왕건은 이 훈요십조를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에서 작성한 것이 아니라 지금 중국 하북성 관성현에서 작성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한반도에 와보지도 않았을 왕건이 한반도의 금강이남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고 했을 리는 없고,

  왕건은 대륙에 있는 "차현이남 공주강 밖"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고 했다고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왕건이 말한 "차현"과 "공주강"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공주는 옛 백제의 웅진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북경 동쪽 하북성 진황도 노룡으로 비정되고, 공주강은 노룡을 지나 난하에 합류되는 청룡하를 말하는 것이고, 차현은 하북성 당산시 천안(遷安)에서 풍윤(豊潤)으로 갈때 넘어야 하는 고개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B.C.6) 조를 보면,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변경을 침공하기 때문에 편안한 날이 적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8년(A.D.87) 조를 보면,
  "가을 7월 왕이 명을 내려 말하기를, 짐이 덕이 없이 나라를 가져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접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수서는 신라의 위치에 대하여,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혹은 사라라고도 부른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북사에도,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땅이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에 산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당나라의 역사서인 구당서에도,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먼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낙랑의 위치를 찾으면 우리 고대 역사를 모두 찾을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즉 옛 위만조선이 전한 무제에게 멸망당하고 그 땅을 나누어 한사군이 설치되자 도읍이었던 왕검성은 낙랑군의 치소로 사용되었고, 세월이 흘러 고구려가 낙랑국(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을 빼앗을 때는 전한, 신나라, 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틈타 최리가 낙랑군을 차지하고 스스로 낙랑국이라 하고 칭왕을 하고 있었다)을 쳐 없애고  왕검성을 빼앗아 평양성으로 이름을 고쳐 후일 도읍으로 사용했고, 후세 고려 역시 평양성 동남쪽 땅에 도읍했다. 그리하여  왕건은 자신의 딸을 낙랑공주라고 했던 것이다.  
  이는 우리 역사의 대부분이 낙랑 땅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 되는데, 우리는 그 낙랑을 한반도의 평양이나 춘천 부근으로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했다.

  그러나 실제 한사군은 지금의 북경(필자주 : 옛 요동군이었다) 동북쪽 일원에 설치되었고, 낙랑군은 지금 난하의 중, 상류부근에 설치되었었으므로 우리 역사의 중심은 바로 지금 중국 하북성에 있는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인 것이다.
  따라서 옛 고조선도, 위만조선도 그리고 고구려도, 백제도, 신라도 모두 그 부근을 중심으로 왕조가 건국되고 멸망했고, 후대의 발해도, 고려도 그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 소정방이 산동반도에서 출발하여 동남쪽으로 서해(황해) 바다를 건너 금강을 타고 올라가 충남 부여의 사비성을 함락 시켰다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우리의 착각인 것이다.         
  소정방은 산동반도에서 북서쪽으로 발해를 건너 지금의 난하 하류 부근에 군사들을 상륙시킨 후 그 부근 기벌포에서 신라군과 연합하여 사비를 향하여 북쪽으로 진군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렇다면 왕건이 말한 차현과 공주강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이들은 한반도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필자의 주장에 따라 차현이남 공주강밖 지역을 짚어보면,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난주(난현) 부근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그곳 난주(난현)는 발해 북쪽 옛 대륙백제(온조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였다.   

   그리하여 왕건은 그 지역 사람들이 언젠가는 백제(대륙백제)가 통합 당한 원한을 가지고 왕을 범하는 죄를 저지르고 난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지금의 난주(난현) 부근 사람들이 믿음직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공주강 밖, 차현이남 사람들을 절대 등용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고 죽었던 것이다.  

  차현은 지금의 한반도 차령산맥이 아니며, 공주강은 한반도의 금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차현과 공주강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발해 북쪽, 북경 동쪽에 있었고,

  고려 태조 왕건은 백제(대륙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였던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주(난현) 출신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한반도의 좁은 땅을 나누어 전라도 사람들은 삼국사기 기록을 보고 옛날 신라의 진흥왕이 나·제동맹을 깨는 배신 행위를 했고, 김춘추가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경상도 사람을 비난하고,

  경상도 사람들은 훈요십조 제8조를 인용하여 한반도 금강 이남의 전라도 사람들을 비난하는 말들을 하며 동서로 나뉘어 서로를 헐뜯고 있다.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 역사 기록의 현장은 한반도가 아닌 발해 북쪽 대륙이었는데, 우리는 엉뚱하게도 옛 기록을 한반도로 가져와 한반도에 그 모든 기록을 비정하여 해석함으로써 아무 쓸모없는 감정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대륙의 옛 땅을 찾아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날 우리의 동서갈등이 자연히 사라질 것이지만, 그 이전이라도 우리의 역사가 잘못 해석되고 있다는 것 만이라도 모든 국민들이 이해하는 날 우리는 화합된 국민으로서 서로 돕고 웃으며 미래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훈요십조 제8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거든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어야 하고, 필자로서는 우리 국민 모두가 우리 고대 역사에 좀더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래야 왜곡된 우리 역사를 빠른 시일내에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500년간 헷갈렸으면 충분하고 이제는 그 착각에서 벗어날 때도 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