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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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대 왜국(倭國)의 위치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29. 22:55

윤여동설 - 고대 왜국(倭國)의 위치찾기 - 최초주장

 

 

  우리 고대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사서들에도 많은 기록이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 위치를 정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동양 역사의 미스테리 중 하나가 바로 고대 왜국(倭國)의 위치다.
  그리하여 지금의 일본열도에 왜국이 옛부터 위치했다고 믿고 있는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 남쪽에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었었다고 하기도 하고,

  어느 사람은 중국 남쪽에 고대 왜국이 위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며,

  또 어느 사람은 발해 중에 고대 왜국이 있었는데 발해가 윤몰되어 바다속에 가라앉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이렇듯 전혀 다른 주장들을 하게 되었는지 사서의 기록들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는데, 사실 옛 기록들은 왜국의 위치에 대하여  사람들이 헷갈릴 만하게 기록되어 있다. 
 
  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전한서(前漢書) 권28 하 지리지 제8 하 연지(燕地) 조에는, "낙랑해 가운데 왜인이 있는데 1백여 개의 나라로 나뉘어져 있다(樂浪海中有倭人分爲百餘國)"라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 왜 조에는,
  "왜는 한(韓)의 동남 대해 가운데 있는데, 산과 섬에 의지하여 살고 1백여 국이다.
  무제가 조선(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부터 사절을 보내 30여 국이 한(漢)나라와 통했는데 모두 왕을 칭했고 대대로 세습한다.

  그 대왜국왕은 사마대국에 사는데 낙랑군의 외곽에 위치하고 그 나라는 (경사에서) 1만2천리 떨어져 있고, 그 서북쪽 구사한국까지는 (경사에서) 7천여 리이다.
  그 땅이 회계에 있는 동야의 동쪽 땅과 비교할 만큼 큰데 주애와 함께 담이와 서로 접했으므로 그 법속이 많이 같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은 지금의 당산 풍윤을 중심으로 방 4천리에 이르는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의 동남쪽 대해라면 이는 발해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제30 왜 조에는,
  "왜인은 대방 동남 대해 가운데 있는데, 산과 섬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옛날에는 1백여 국이었다. 한나라 때로부터 조견하는 자가 있었는데 지금 사절을 보내 통하는 나라가 30여 국이다.
  (대방)군에서 왜에 갈 때는 해안을 따라 배를 타고 한국을 거쳐 남쪽, 동쪽으로 가면 그 북쪽 해안이 구사한국인데 7천여 리이다.
  (구사한국에서) 바다를 건너 1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에 이르는데, 그 대관은 비구 부대관은 비노모리인데 절해고도에 산다. 땅은 사방 4백여 리이고 토지와 산은 험하다. 울창한 삼림이 많고, 도로는 짐승과 사슴이 겨우 다닐 만 하고 백성은 1천여 호이다. 좋은 밭이 없고 해물을 먹고살기 때문에 배를 타고 남북으로 오가며 잡아온다.
  (대마국에서) 또 남쪽으로 1천여 리에 이르는 한해(瀚海)를 건너면 일대국에 이르는데, 대관은 비구이고 부대관은 비노모리인데 강역이 사방 3백 리이다. 대나무와 숲이 많고 백성은 3천여 가이다. 밭에 차등이 있지만 농사를 지어도 먹을 것이 부족해 역시 남북으로 오가며 (물고기)를 잡아온다.   

  (일대국에서) 또 한 바다를 건너 1천여 리를 가면 말로국에 이르는데, 백성은 4천여 호로서 산과 바닷가에 산다. 초목이 무성해 앞에 사람이 가도 보이지 않는다.
  물고기와 전복 잡는 것을 즐기는데, 물이 깊지 않고 얕으므로 모두 직접 들어가 잡는다.  
  (말로국에서) 동남쪽 육로로 5백 리를 가면 이도국에 이르는데, 대관은 이지이고, 부대관은 설모고, 병거고라 한다. 백성은 1천여 호로서 왕은 세습한다. 여왕국에 속해 그 통치를 받는데, 군의 사절이 왕래할 때 항상 머무르는 곳이다. 
  (이도국에서) 동남쪽으로 1백 리를 가면 노국에 이르는데, 대관은 시마고라 하고  부대관은 비노모리라 한다. 백성이 2만여 호이다.
  (노국에서) 동쪽으로 1백리를 가면 불미국에 이르는데, 대관은 다모 부대관은 비노모리이다. 백성은 1천가이다.
  (불미국에서) 남쪽으로 배를 타고 20일을 가면 투마국에 이르는데, 대관은 미미이고 부 대관은 미미나리이다. 백성이 5만여 호이다.
  (투마국에서) 남쪽으로 배를 타고 10일, 육로로 1개월을 가면 사마일국(필자 주 : 사마대국의 오기로 보인다)에 이르는데, 여왕의 도읍이다.
  대관은 이지마이고 다음은 미마승 다음은 미마획지 다음은 노가시이다. 백성은 7만여 호이다.
  여왕국으로부터 그 북쪽은 백성의 숫자나 거리를 대략만 알 수 있고, 그 나머지 나라들은 자세한 것을 모른다.
  사마국, 이백지국, 이사국, 도지국, 미노국, 호고도국, 불호국, 저노국, 대소국, 소노국, 호읍국, 화노소노국, 귀국, 위오국, 귀노국, 사마국, 궁신국, 파리국, 지유국, 오노국, 노국이 있는데, 이곳이 여왕국의 경계이다.
  그 남쪽에 구노국이 있는데 남자가 왕이다. 그 대관은 구고지비구이고 여왕에 속해 있지 않다.
  군(경사의 오기?)으로부터 여왕국까지 1만2천여 리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 저술된 사서들의 기록들은 대개 이 후한서와 삼국지의 기록을 옮겨 적고 있는데, 전사하는 과정에서 잘못 옮겨 적은 부분들도 눈에 띈다.

 

☆ 후한서 한전에는, "한은 삼종이 있는데 마한, 진한, 변진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고,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 맥과 접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마한과 변진이 남쪽으로 왜와 가까이 접하고 있기 때문에 몸에 문신한 사람이 많이 있다고도 기록하고 있어 마한과 변진의 남쪽에 왜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로 보여지고,  
  또 삼국지 한전 마한 조에는, 환령 말에 공손강이 대방군을 설치하자 왜와 한이 드디어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고 했고, 변진 조에는 변진에 철이 많이 생산되어 한, 예, 왜인 등이 그 철을 사간다고 기록하고 있어 대방군, 한, 왜가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했었음을 알게 하는데, 한은 지금 중국 하북성 당산, 풍윤을 중심으로 한 그 부근에 방 4천리에 이르는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대방군은 준화부근의 땅에 설치된 곳이며, 예는 내몽골 고륜기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서 권97 열전 제67 동이 왜인 조에는,
  "왜인은 대방 동남 대해 가운데 있는데, 산과 섬에 의지해 나라를 이루었다. 땅이 산림이 많아 좋은 밭이 없어 해산물을 먹고산다.
  옛날에는 1백여 소국이 서로 접하고 있었는데, 위나라 때에 이르러서 30여 국이 통호했다.
  백성은 7만 호로서 남자는 어른 아이를 막론하고 모두 얼굴에 문신을 한다. 스스로 태백의 후예라 하고 또 옛날부터 중국에 사신을 보냈는데 모두 자칭 대부라 했다.   
  옛날 소강의 아들을 회계에 봉했는데, 머리를 깎고 문신을 함으로서 교룡의 해를 피했다고 한다.
  지금 왜인들은 물 속에 들어가 물고기 잡는 것을 좋아한다...............
  백년 혹은 8, 9십 세까지 사는 사람들이 많다. 나라에 부녀자가 많은데 음탕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는다. 쟁송이 없고 죄가 가벼운 사람은 그 처자를 노비로 삼고, 죄가 무거운 사람은 그 가족 모두를 죽여버린다.
  옛날에는 남자가 왕위에 올랐으나 한나라 말기에 왜국에 난리가 나 그를 평정하지 못해 결국 여자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름하여 비미호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송서 권97 열전 제57 이만 동이 왜국 조에는,
  "왜국은 고구려 동남쪽 대해 가운데 있는데 해마다 조공을 바쳤다.
  송 고조 영초 2년(A.D.421)에 조서를 내려 「왜왕 찬이 만리에서 직공을 닦아 그 성의가 가상하므로 마땅히 작위를 내려 줌이 옳다」하였다.
  태조 원가 2년(A.D.425)에 찬이 또 사마 조달을 보내 지방 특산물을 바쳤다. 찬이 죽었다.
  동생 진이 왕위에 올라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쳤는데, 자칭 사지절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하고는 표를 올려 그대로 작위를 내려주기를 청했으나 조서를 내려 안동장군 왜국왕의 작위를 주었다.
  진이 또 왜·수 등 13인 평서정로관군보국장군 호를 내려달라고 해 조서로서 그를 들어 주었다. 
  원가 20년(A.D.443) 왜국왕 제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쳐 조서로서 다시 안동장군 왜국왕의 작위를 주었다.
  원가 28년(A.D.451) 사지절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의 작위를 더해주고 안동장군은 옛 그대로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 이때는 고구려 장수왕 때로서 고구려가 매우 강력할 때인데, 송나라에서는 어떻게 왜국왕에게 이러한 작위를 줄 수 있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혹시 장수왕이 427년에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과 관련 있는 것일까? 
  이때 이 나라들이 강력해진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모두 연합해 있었고 왜국이 그 대표격이었을까? 

  그리하여 학자들간에 위 기록의 진위여부를 가지고 논란이 많다.

 
  그리고 남제서 권 58 열전 제39 동이 왜국 조에는,
  "왜국은 대방 동남 대해 섬 가운데 있는데, 한나라 말이래 여자가 왕위에 올랐다. 땅과 풍속에 관한 것은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건원 원년(A.D.479)에 새롭게 사지절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의 작위를 내리고, 무를 진동대장군으로 삼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수서 권 81 열전 제 46 동이 왜국 조에는,
  "왜는 백제, 신라의 동남쪽에 있다.
  수륙 3천리로서 대해 가운데 산과 섬에 의지해 산다.
  위나라 때 중국과 통했는데 30여 국으로서 모두 자칭 왕이라 한다. 
  오랑캐들은 거리 수를 모르고 단지 날짜로 계산하는데, 그 나라의 국경은 동서 5개월, 남북 3개월을 가야하며, 여러 바다에 이르는데 그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 
  도읍은 사미퇴로서 즉 위나라 때의 소위 사마대라는 곳이다. 
  옛날에는 낙랑군, 대방군과 나란히 국경을 접했는데, (경사에서) 1만 2천리떨어져 있다. 
  회계의 동쪽에 있는데(?), 담이와 서로 가깝다.
  한나라 광무제 때 사신을 보내 입조했는데, 자칭 대부라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 수서에는, 또 "대업 3년(A.D.607) 그 왕 다리사비고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사자가 말하기를 '바다 서쪽 보살천자가 불법을 중흥한다는 말을 듣고 저를 보내 조배하는 것입니다. 겸하여 사문 수십 인을 보내 불법을 공부하도록 해 주십시오'하였는데, 그 국서에는 말하기를 '해뜨는 곳의 천자가 해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내 안부를 묻는다' 하였으므로 수 양제가 기분 나빠했다.
  (大業三年 其王多利思比孤 遣使朝貢 使者曰 '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 故遣朝拜 兼 沙門數十人來學佛法' 其國書曰 '日出處天子致書 日沒處天子無恙' 云云 帝覽之不悅)"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 글을 수나라에 보낸 사람이 성덕태자일 것이라고 한다.

 

  북사(北史) 권94 열전 제82 왜국 전에는,
  "왜국은 백제·신라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수륙 삼천리로서 대해 가운데 산과 섬에 의지해 산다.
  위나라 때 중국과 통했는데 30여 국으로서 모두 왕을 칭한다.
  오랑캐들은 거리 수를 잘 모르고 단지 날짜로 계산하는데, 그 나라의 국경은 동서 5개월, 남북 3개월을 가야하고, 여러 바다에 이르는데 그 지세는 동쪽 높고 서쪽이 낮다. 
  사마퇴에 사는데 즉 위나라 때의 소위 사마대라는 곳이다.
  또 이르기를 낙랑군 대방군과 나란히 국경을 접했는데 (경사에서) 1만2천리라고 한다. 회계의 동쪽에 있는데(?), 담이와 서로 가깝다.
  풍속에 모두 문신을 하고 스스로 태백의 후예라 한다.   
  대방에서 왜국까지를 따져보면 바다를 타고 내려가 조선국을 지나고 남쪽, 동쪽으로 가야하는데 7천여 리이다.
  바다를 건너 또 남쪽으로 1천여 리를 가 다시 한해라고 하는 1천여 리에 이르는 넓은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한해를 건너면) 일지국에 이른다.
  또 한 바다를 건너 1천여 리를 가면 말로국이고,
  또 동남쪽으로 향하여 육로로 5백 리를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또 동남쪽으로 1백 리를 가면 노국에 이르고,
  또 동쪽으로 1백 리를 가면 불미국에 이른다.
  또 남쪽으로 물길을 따라 20일을 가면 투마국에 이르고,
  또 남쪽으로 물길을 따라 10일을 가고, 육로로 1개월을 가면 사마대국에 이르게 되는데 곧 왜왕의 도읍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구당서 권199 상 열전 제149상 일본국 전에는,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그 나라가 해뜨는 곳에 있어 그 이름을 일본이라 했다한다.
  혹은 말하기를 왜국이 그 이름이 아름답지 못해 일본으로 바꾸었다고도 하고, 혹은 일본이 옛날에는 소국이었는데 왜국의 땅을 병합하였다고도 한다. 그 나라 사람이 입조했는데, 자긍심이 대단해 마주 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또 이르기를 그 나라의 경계가 동서남북으로 각 수천 리씩이고, 서쪽 국경과 남쪽 국경은 대해를 포함하고, 동쪽 국경과 북쪽 국경은 큰산을 한계로 했는데, 산 너머는 모인국이라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왜국이 섬나라가 아니라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로써 이러한 기록들을 충족할 수 있는 장소는 일본열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뿐이다.  
 
☆ 구당서 왜국 전에는,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경사에서 1만4천리 떨어져 있다.
  신라 동남쪽 대해 가운데 있는데, 산과 섬에 의지하여 산다. 동서로 5개월 남북으로 3월을 가야한다. 옛날부터 중국과 통했다. 그 나라는 성곽이 없고 목책을 치고 산다. 지붕은 풀로 덮고 사면에 조그만 섬들로 이루어진 50여 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에) 부속되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통전 왜 전에는,
  왜국이 후한 때부터 중국과 통했고, 대방 동남쪽 대해 가운데 있으며, 산과 섬에 의지해 살고, 1백여국으로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어 다른 사서의 기록들과 거의 동일한데, 다만 왜국왕이 사는 곳이 사마대국으로서 요동에서 1만2천리 떨어져 있으며, 신라의 동남쪽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요동에서 왜국까지의 거리가 아니라 중국의 도읍(경사)으로부터 왜국까지의 거리의 오기일 것이고, 송 무제 영초2년(A.D.421)에 왜왕 찬이 조공을 바쳤고, 그 증손 무에 이르른 순제 승명 2년(A.D.478)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렸는데 동쪽으로는 모인(毛人: 몸에 털이 많이 난 사람 또는 털옷을 입는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을 말하는 듯 하다) 55개국을 정벌했고, 서쪽으로는 오랑캐무리 66개국을 복속 시켰으며,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95개국을 평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고대 왜국은 지금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일까?

 

  기록들 속에서 왜의 위치를 뽑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전한서 : 낙랑해 중
  후한서 : 한의 동남 대해 중
  삼국지 : 대방 동남 대해 중
  진서 : 대방 동남 대해 중
  송서 : 고구려 동남쪽 대해 중
  남제서 : 고구려 동남쪽 대해 중
  수서 : 백제, 신라의 동남쪽으로 옛날에는 낙랑군, 대방군과 나란히 국경을 접했다
  북사 : 백제, 신라의 동남쪽
  구당서 : 신라 동남쪽 대해 중
  통전 : 대방 동남쪽 대해 중  

 

  사서의 기록들은 왜국의 위치를 대개 대방동남쪽 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동남쪽으로 기록하고 있고, 낙랑군도 언급되고 있다. 
  전한서의 기록대로 낙랑해 가운데 왜인이 있고 1백여 개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다면 이는 낙랑해에 왜국이 위치하고 있었고 1백여 개 가까운 여러 섬의 소국이 모여 왜국이라는 나라를 이루고 있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한사군의 한 군인 낙랑군의 위치를 정확히 찾으면 그 앞 바다인 낙랑해에 왜국이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낙랑군은 과연 어디에 설치되었던 것일까?
  우리는 지금 낙랑군의 위치를 북한 평양 부근이라 알고 있지만 중국 사서들은 어느 기록도 낙랑군이 한반도의 북한 평양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 태강지리지에는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고, 통전에는 갈석산은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진서에는 낙랑군 수성현이 진(秦)나라 때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은 한반도 평양이 아니라 북경 부근이다.
  낙랑군은 한반도 평양 부근이 아닌 중국 북경 부근에 설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낙랑해란 바로 지금의 진황도 앞바다인 발해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의 왜국은 지금의 일본열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발해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전한서는 말해주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왜의 후예라 자처하는 일본이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고대 왜국이 태평양이 아닌 발해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서의 기록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서들은 또 한결같이 왜국의 위치가 대방의 동남쪽 대해 가운데 있고, 백제·신라의 동남쪽에 위치했으며, 중국의 경사(도읍)로부터 1만리가 넘게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신라는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 금주시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고, 백제는 당산시와 진황도 일원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국이 그 백제, 신라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서안(장안)에서 1만리도 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제와 신라는 경사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을까?
  백제의 위치에 대하여 많은 사서들은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 1천리에 위치했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고, 구당서는 경사에서 동쪽으로 6,200리에 백제가 위치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신당서는 6천여 리라 기록하고 있는데, 왜국은 경사에서 1만리도 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지금의 서안에서 당산이나 진황도 보다 더 먼 곳에 왜국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니, 결국 왜국은 지금 발해의 요동반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신라의 위치에 대해서 수서는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 땅이라 기록하고 있고, 북사에도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며, 땅이 고구려의 동남쪽인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살고 있는데, 그 나라가 중국, 고구려, 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 불내, 한, 예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구당서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고, 서쪽으로 백제와 국경을 접했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국경을 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결국 신라의 서쪽에 백제, 북쪽에 고구려가 위치했다는 말이고, 백제에서 동쪽으로 더 가면 신라에 이를 수 있고, 신라, 백제, 고구려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수서와 북사를 보면 백제가 대방 옛 땅에서 건국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백제가 대방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게 하고, 백제의 강역이 동서 450리, 남북 900여 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백제가 대방 옛 땅에서 건국되었다는 것은 오기로서 실제 백제는 마한의 동북쪽  옛 진번 땅과 가까운 곳에서 건국되었다. 대방군이란 지금의 북경 동쪽 준화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후한서 한전(後漢書 韓傳)에, 
  "한은 세 종족이 있는데 마한·진한·변한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고 54국인데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했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 12국인데 북쪽은 예맥과 접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고 역시 12국인데 그 남쪽 역시 왜와 접했다.
  모두 78국인데 백제는 그 중의 한 개 나라였다.
  큰 나라는 만여호, 조그만 나라는 수천 가이다.
  각각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데 그 땅을 모두 합하면 사방 4천여 리이다.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 辰韓 三曰弁韓 馬韓在西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 各在山海間 地合方四千餘里)" 라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지 한전(三國志 韓傳) 변진 조에는,
  "변진은 열두 나라인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변진미리미동국, 변진접도국, 변진고자미동국, 변진고순시국, 변진반로국, 변진낙노국, 변진미오사마국, 변진감로국, 변진구사국, 변진주조마국, 변진안사국, 변진독로국인데, 독로국은 왜와 국경을 접했으며, 열두 나라에 모두 왕이 있다.
  (弁辰亦十二國 其南亦與倭接 弁辰彌離彌凍國 弁辰接塗國 弁辰古資彌凍國 弁辰古淳是國 弁辰半路國 弁辰樂奴國 弁辰彌烏邪馬國 弁辰甘路國 弁辰狗邪國 弁辰走漕馬國 弁辰安邪國 弁辰瀆盧國 瀆盧國與倭接界 十二國亦有王)"라고 기록되어 있어 삼한과 삼국 그리고 왜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게 한다.

  사실 이 기록들은 단순한 것 같으나 우리 역사를 밝혀줄 비밀의 열쇠와도 같은 기록인데, 과연 이 기록이 한반도에 관한 기록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한의 북쪽에 낙랑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한의 강역이 사방 4천리에 이르렀으며, 한이 남쪽으로 왜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고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낙랑군 수성현이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했으므로 기록대로라면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부근을 낙랑군으로 비정해도 무리는 없을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진황도를 중심으로 그 부근에 낙랑군과 마한 그리고 백제, 신라, 왜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의 강역인 마한, 진한, 변한을 모두 합한 면적이 사방 4천여 리라 기록하고 있는데, 한반도 남쪽은 사방 1천리 정도의 땅이 있을 뿐 사방 4천리에 이를 정도로 넓은 땅이 있을 수 없다.
    
[왜국의 위치]

             낙랑

 

             대방
 
                                        진한
     
             마한              

                                        변한

 

                         왜


☆ 삼국지 한전에는, "한은 대방의 동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남쪽은 왜와 접했다. 땅이 사방 4천리이다" 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마한에서 백제가. 진한에서 신라가, 변한에서 가야가 건국되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후한서와 삼국지의 기록대로 대방의 동남쪽에 한이 있고, 마한과 변한의 국경 남쪽에 왜가 위치했다면 결국 대방의 동남쪽 방향에 왜도 위치했다는 말이 되는데, 다른 중국사서의 많은 기록들도 대방 동남쪽 대해 가운데에 왜국이 위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낙랑해"와 "대방 동남쪽 대해"가 모두 지금의 발해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발해의 서북쪽 방향에 대방이 위치했었음도 알 수 있다.
  이는 대방이 지금의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우리는 엉뚱하게도 한반도의 황해도가 대방이었다고 하고 있으니 대방의 위치에 대한 중국 사서들의 기록들과 우리의 상식은 전혀 다르고, 대방의 동남쪽에 한이 위치했다면 한 역시 북경 동쪽 당산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된다.
  이 말은 곧 마한·진한·변한이 지금의 북경·당산, 진황도, 요녕성 호로도 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고, 우리의 백제, 신라, 가야가 한반도가 아닌 북경·진황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어 우리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마한은 서쪽에 있고 54국이며, 진한은 동쪽에 있고 12국이며, 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고 12국이라고 했으므로 이를 배치해 보면 마한은 당산,풍윤에 도읍하고 그 부근인 북경, 천진, 당산시, 낭방시, 일원의 54개국을 거느렸다고 할 수 있고, 진한은 그 동쪽 호로도 부근을 말하고, 변한 역시 그 부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만이 한의 강역이 사방 4천리에 이르렀다는 사서들의 기록을 충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는 마한의 남쪽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변한의 남쪽에 위치한 독로국과도 국경이 접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는 과연 발해 가운데 어디에 위치했다는 말일까?
  전한서는 낙랑해에 왜국이 있었다고 했고, 사서들은 한결같이 왜국이 대방 동남쪽 대해 가운데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대방이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동남쪽 방향 큰바다 가운데에 왜국이 있었다면 이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진황도시,호로도시 동쪽 발해를 말하는 것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기록은 양직공도 왜국사(梁職貢圖 倭國使)로서, 기록을 보면,
  "왜국은 대방의 동남쪽 대해 중에 있는데 산과 섬에 의지하고 산다.
대방으로부터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가면 그 북쪽 해안이다. 30여 국으로서 (경사에서)......만여리(떨어져 있다) 왜왕이 있는 곳은 ...대체적으로 회계의 동쪽에 있는 땅 만하다. 기후가 온난하고 땅이 따스하다. 진주와 푸른 옥[필자주 : 지금도 요동반도 수암(岫岩)에서 옥이 산출된다]이 산출되는데, 소, 말, 호랑이, 표범, 양, 까치...는 없다
얼굴에는 문신을 하고, 면으로 만든 천으로 머리띠를 한다.
  ............횡폭 바느질하지 않은 ...(바느질하지 않은 긴 천을 몸에 두른다?)
[이하는 지워져 내용을 알 수 없다]
(倭國 在帶方東南 大海中依山島居 自帶方循海水 乍南乍東到 其北岸 歷三十餘國 ☆萬餘里 倭王所在☆大抵☆在會稽東 氣暖地溫 出眞珠靑玉 無牛馬虎豹羊鵲☆☆☆☆面文身以木綿帖首☆橫幅無縫☆☆☆..........)" 라고 기록되어 있어 지금의 북경 부근의 대방으로부터 강을 타고 내려오면 발해만에 이르고, 발해에서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항해하면 발해의 요동만으로 향할 수 있어 왜국의 위치에 대하여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사서들도 대방에서 "사남사동(乍南乍東)" 하면 왜국에 도착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乍)는 "언뜻"이란 의미로서 그리 먼 거리를 갔다는 말이 아니지만 실제 대방으로 비정되는 준화에서부터 당산 남쪽 발해까지도 그 거리가 1천여 리쯤 되는 거리이다.     

 

☆ 대방군의 위치는 지금의 북경  동쪽 우교수고 부근의 땅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치소는 준화쯤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곳에서 강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발해만에 닿은 후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나아가면 당산 남쪽을 지나 요동만으로 진입하게 된다.  

 

  통전 권185 변방1 동이 상 왜 조 수 문제 개황 20년(A.D.600) 기사를 보면, 수나라의 배청(배세청)이 왜국에 사신으로 갔던 기록이 들어 있는데 기록에 따라 그 경로를 한번 짚어 보자.
  "다음 해(A.D.601) 황제가 문림랑 배청(배세청)을 사신으로 왜국에 파견했다. 백제를 지나 동쪽으로 일지국에 이르고, 또 죽사국에 이르고, 또 동쪽으로 진왕국에 이르렀는데 그 사람들은 중국 사람과 같았는데 어찌하여 오랑캐의 주가 되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또 10여 국을 지나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죽사국으로부터 그 동쪽은 모두 왜에 부용되어 있다.
  배청이 도착하자 왜왕이 소덕 아배대를 보내 수백명을 거느리고 의장대로 하여금 북치고 나팔불며 왜국에 온 것을 환영했고, 또 대례 가다비를 보내 2백여 기의 기마병으로서 교외에서부터 호위하여 그 도읍에 이르렀다.
  그 왕이 배청을 만나 보고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그리고는 배청이 돌아올 때 다시 사신을 보내 조공과 지방 특산물을 바쳤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나라에서 육로로 왜국을 갈 때 백제를 지나 동쪽으로 일지국, 죽사국, 진왕국(신라를 말하는 듯 하다)을 지났고 다시 또 10국을 지나 비로소 왜국의 해안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도 이때 배청이 백제 남쪽을 지나 왜국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고, 일본서기에도 동일한 기록이 보인다.
  이때 배세청은 백제였던 지금의 당산, 진황도 부근을 지나고, 신라였던 호로도 부근를 지나 동북쪽으로 예 지역을 지나 대릉하, 요하를 건너 발해의 요동만을 건너 왜국으로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왜국이 강성했을 때는 지금의 발해 요동만을 빙 둘러 남쪽으로 요동반도까지의 섬들이 왜국의 통치 하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하여 사서의 기록들에 왜국의 강역이 무척 넓고, 북쪽으로 모인국과 국경을 접했다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고, 경사에서 왜국까지의 거리가 1만여 리라고 기록한 것 역시 왜국의 중심지가 지금의 요동반도 부근에 위치했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를 경유하여 바다를 건너 왜국에 갔다고 기록했고, 당산, 진황도 부근에 위치했던 백제보다 훨씬 멀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주장대로 고대의 왜국이 옛날에는 요동반도에 위치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일본은 발해로부터 1만리 가까이 떨어진 일본열도에 위치하고 있고, 지금 일본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고대 왜국의 후예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대 왜국의 왕조가  언젠가 요동반도를 떠나 지금의 일본열도로 옮겨갔고, 그 후손들인 지금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살던 옛 땅을 잃어버렸다는 말이 된다.

  우리 역사의 경우 백제는 대륙에서 근초고왕과 계왕의 아들이었던 무광왕 사이에 왕위찬탈전이 일어나 패한 무광왕이 365년경 한반도로 도망쳐 다시 반도백제를 세운 것이나, 왜국이 지금의 일본열도로 옮겨간 시기와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추정해 본다면, 왜국은 아주 먼 옛날에 현재의 일본열도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약 600여 년 전에 그곳으로 옮겨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의 조선이 대륙 개경에서 건국되어 안전한 한반도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듯이 일본도 그 때쯤 지금의 요동반도를 떠나 일본열도로 옮겨갔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때 요동반도에 아주 큰 규모의 천재지변이 있었거나  큰 전쟁이 있어 멀리 바다를 건너 도읍을 옮겼거나 또는 무슨 이유로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다는 기록이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어 왜국의 확실한 이동시기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사람은 이때 발해에 지각변동이 일어나 고대 왜국이 바닷물 속으로 함몰되었고, 이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현재의 일본열도로 가서 다시 나라를 세웠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되는데, 필자는  조선이 한반도로 도읍을 옮긴 후 일본도 명나라 세력에 위협을 느껴 일본열도로 옮겨가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추정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사람들은 천황이 대륙으로부터 도래해 온  도래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대 왜국이 발해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 왜국의 위치는 앞으로도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져 있게 될 것이고, 아마 이 논쟁은 미래에도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도 고대 왜국의 위치를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옛 땅의 위치도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 일지 모르지만 - 100년 후? 200년 후? - 그때가 되거든 옛날에 윤여동이라는 사람이 그런 (참신한? 허황한?)주장을 했었노라고 기억해 주신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