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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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대방은 북경 동쪽 준화 부근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6. 22. 21:21

윤여동설 - 대방은 북경 동쪽 준화 부근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우리 삼한 삼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특히 백제 왕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많았던 대방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 그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대방(帶方)이 한반도 내에 위치했었을 것으로 역사를 인식한다.
  이는 삼국유사에 남대방의 위치를 "지금의 남원부"라고 주를 달아 놓았고,
  또 조선시대의 역사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 조에도 "본래 백제 고룡군인데 후한 건안 중에 대방군이 되었고, 조위 때 남대방군이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록들을 한반도의 전북 남원에 그대로 적용하여 남원 부근이 대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삼국지 한(韓) 전에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하였고, 남쪽은 왜와 접했다. 땅이 사방 4천리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었고,
  후한서 한전과 양서 백제전 그리고 남사 백제전에는 한에는 마한, 진한, 변진(변한)이 있었고, 백제가 그 중의 한 개 나라였다고 하였으며, 북사 백제전에도 백제국은 대개 마한에 속했다고 기록되어 있었고, 구당서 백제국전 역시 백제가 마한의 옛 땅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위치를 한반도에서 찾아 황해도를 대방이라 추정하기도 했다.
  이는 우리가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으므로 우리의 고대 역사 역시 한반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삼한 즉 마한, 진한, 변한이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었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왜는 지금의 일본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대방은 삼한의 북쪽인 황해도쯤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요동과 대방과 낙랑은 아주 가까이 접하고 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방이나 낙랑이 북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전한서지리지에도 낙랑군의 25개 속현에 대방현이 있다.
  이는 대방이 한반도가 아닌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고, 대방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삼한 역시 한반도가 아닌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삼국지 한 전에는,
  "(후한) 환제와 영제말기에 한과 예가 강성하여 군현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여 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흘러 들어가자 건안(A.D.196-219) 중에 공손강(공손도의 아들)이 둔유현 남쪽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 장창 등을 보내 유민을 불러 모으고 군대를 일으켜 한과 예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점점 돌아왔고 그 후 왜와 한이 드디어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후한 말기 공손강이 옛 대방현 부근을 대방군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는데, 옛 대방현이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대방군 역시 같은 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는 것이고, 한과 예도 북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대방이 한반도가 아닌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니....................정말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이는 우리의 역사상식을 완전히 뛰어 넘는 너무도 파격적인 주장이라 선뜻 믿기가 어렵겠지만 이것이 우리 역사의 진실이다.
  필자가 이러한 내용을 세상에 밝히는 것은 지금 우리 모두는 옛날 우리의 선조들이 대를 이어 살았던 우리의 옛 땅이 대륙에 있었으나 그를 잃어버리고는 한반도 부근만이 우리의 옛 땅인 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선조들이 지금보다 훨씬 넓은 강역을 차지하고 중국과 끊임없이 다투며 동이의 맹주로서 수천년간 역사를 이어왔음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우리의 잃어버린 대륙의 옛 땅을 언젠가는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인데, 필자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이 늘어나고 있어, 힘은 들지만 글을 써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다. 
  필자 혼자만 깨닫고 그를 세상에 알리지 않고 죽는다면 그 깨달음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 땅이 우리의 옛 땅이었음을 알지 못한다면 언젠가 그 땅을 되찾을 기회가 온다 하더라도 그 기회를 살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가 언제일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그리 먼 후일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잃어버린 옛 땅이 어디인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우리의 원대한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대방과 우리는 역사적으로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 밝혀보자.
  수서나 북사 백제전을 보면,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비로소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 강국이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후한 말기 이 공손도, 공손강, 공손연 공손씨 3대가 요동에서 세력을 떨쳤는데, 공손도의 아들인 공손강이 대방군을 설치하였고 그 손자인 공손연 때 위나라의 사마의에 의해 토벌 당하고 그 세력이 소멸했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 조에는 "고구려가 대방을 침범하니 대방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에게 장가를 들어 부인을 삼았기 때문에 왕이 말하기를 '대방은 우리와 사돈간이 되는 나라이니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군사를 출동하여 구원했더니 고구려에서 원망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 왕실에 대방의 혈통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삼국유사 북대방 조에는 "북대방은 본래 죽담성이다. 신라 노례왕(유리왕) 4년(A.D.27)에 대방 사람들이 낙랑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와 대방, 낙랑이 서로 가까이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남대방 조에는 "조위 때 비로소 남대방군(지금의 남원부)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한 것이다.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리나 되는데, 한해(瀚海)라고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위나라 때 남대방군이라는 군이 설치된 적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순제와 환제 때에 (고구려가)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한과 거향을 노략질하고 또 서안평을 공격하여 도중에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을 쳐 낙랑 태수의 처자를 잡아갔다" 라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 미천왕 때인 314년에 고구려가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때 그 땅이 고구려에 편입된다.
  이렇듯 대방은 원래 고조선, 위만조선의 땅이었고, 한사군 때는 낙랑군에 속했으 며, 우리의 삼국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옛 기록들은 지금의 북경 부근에 대방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알려주고 있었으나 우리는 그 기록들을 한반도의 지리적 상황에 억지로 맞추어 해석함으로서 전북 남원이 대방이었다고 하기도 하고, 황해도가 대방이라고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역사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서 대방은 지금의 북경 동쪽 준화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고 한 때는 발해 가까이까지 남하하여 차지하고 남대방을 설치한 적도 있었던 듯 하다.
  그리고 당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난하 부근에 백제,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었으며, 대방 남쪽의 한해(瀚海)란 지금의 발해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삼한과 부여의 맥을 이은 삼국도 한반도가 아닌 대륙이 그 역사의 중심이었다.
 

  서쪽으로 지금의 북경을 지나 태행산맥까지, 북쪽으로 내몽골, 몽골까지가 우리의 옛 땅이었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어야 하고, 그 사실을 후손들에게도 전해주어 잊지 않게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