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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말갈(숙신,읍루,물길 여진)은 서랍목륜하(시라무렌강) 부근에 위치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7. 1. 22:50

윤여동설 - 말갈은 서랍목륜하(시라무렌강) 부근에 위치했다 - 최초주장

 

 

  말갈은 숙신이요, 읍루요, 물길이요, 여진이다.
  그런데 이 말갈의 위치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 한반도 동북쪽 연해주지역이라 하고 있으나, 이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인 것일까?
  후한서 읍루전에는, "읍루는 옛 숙신국이다. 부여의 동북쪽 1천여 리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했으며, 북쪽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라고 그 위치가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읍루전에도, "읍루는 부여의 동북쪽 1천여 리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에 닿았으며, 남쪽은 북옥저와 접했는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라고 후한서와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기록을 보고는, 부여는 백두산 북쪽 길림성 지역으로, 그 동북쪽 1천여 리를 연해주지역으로, 동쪽의 큰 바다는 연해주 동쪽의 동해바다로, 남쪽의 북옥저는 두만강 하류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역사학자들까지도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 것으로 착각하고는 논문을 발표하고 있는데, 참으로 한심스런 일이다.
  후한서 부여국전에는,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말갈(읍루)의 서쪽에 부여가 위치했음을 알 수 있고,

 

☆ 같은 후한서에 부여의 동북쪽 1천여 리에 읍루가 있다고도 하고, 또 부여의 동쪽에 읍루가 있다고도 했으니 읍루는 부여의 동쪽으로부터 동북쪽에 걸쳐 넓게 위치했던 듯 하다.

  

  구당서 말갈전에는,
  "말갈은 대개 숙신의 땅으로서 후위 때의 소위 물길이다. 경사(현 서안)에서 동북으로 6천여 리에 있다.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은 돌궐과 접했으며, 남쪽은 고구려와 경계하고 북쪽은 실위와 접해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 이르러서는 말갈 서쪽의 부여가 돌궐로 교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끝을 잘 모른다고 했던 말갈 북쪽에 실위가 위치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실위(室韋)라는 곳이 정확히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는 아직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위치로 보아 지금 몽골의 도읍 울란바토르 부근을 말하는 듯 하다.
  그리고 같은 책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출자는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의 도읍은 평양성인데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1백 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으로부터 북쪽으로 1천여리 쯤에 말갈이 위치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평양성과 부여의 위치를 찾으면 말갈의 위치도 자연스럽게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인데, 고구려의 평양성은 옛 고조선·위만조선의 도읍 왕험성(왕검성)이었고, 한사군의 낙랑군 치소였다가 고구려 대무신왕이 서기 37년에 낙랑군을 쳐 그 땅을 빼앗아 후일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되었던 곳인데,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리고 부여는 동부여를 말하는 것으로서 대개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했던 나라였고, 읍루의 남쪽에 있었다는 북옥저는 지금의 서랍목륜하 남쪽에 위치했었는데, 기원전 28년에 고구려에 병합된 나라였다. 
  그렇다면 말갈의 위치는 하북성 승덕시의 북쪽이며, 시라무렌하의 북쪽에 위치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말갈, 숙신, 읍루, 물길, 여진은 연해주에 살던 민족이 아니라 대흥안령산맥에 살던 민족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하여 삼국지 읍루전에는 "그 땅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과 비슷하지만 언어는 부여, 고구려와 같지 않다. 오곡과 소, 말, 마포가 산출된다. 사람들은 용기가 많고 힘이 세다.
  대군장은 없고 읍락마다 각각 대인이 있다. 그들은 항상 산림 속에서 살며 혈거생활을 한다. 대가는 그 깊이가 아홉 계단이나 되며, 계단이 많을수록 좋다고 여긴다. 그 지방의 기후는 부여보다 훨씬 춥다.  그 습속에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는데,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해 먹는다.
  겨울철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를 몇 푼이나 되게 하여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철에는 알몸에다 한자 정도의 베 조각으로 앞뒤를 가려 형체만을 가린다.
  그들은 불결하여 집 가운데에 변소를 만들고 그 주위에 빙 둘러 모여 산다.
  활의 길이는 4자인데 세기가 노와 같다. 화살대는 싸리나무를 쓰는데, 길이는 한자 여덟치로서, 청석으로 화살촉을 만드는데, 이는 이곳이 옛 숙신씨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 옛날 중국 사람들은 숙신의 활과 화살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활을 잘 쏘아 사람을 쏘면 어김없이 명중시킨다.
  화살에는 독약을 바르기 때문에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
  적옥과 좋은 담비가죽이 산출되는데, 오늘날 소위 읍루의 초(貂)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한나라 이래로 부여에 신속 되었는데, 부여가 세금과 부역을 무겁게 물리자 황초(A.D.220-226) 중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에서 여러 차례 정벌하였으나 그 무리가 비록 숫자는 적으나 깊은 산 속에 살고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활과 (독)화살을 두려워하여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후한서 동옥저전을 보면, "읍루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해마다 여름철에는 (개마대산의) 바위굴 속에 숨어살다가 겨울이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내려와 읍락에서 산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북옥저 사람들이 읍루 사람들에게 많은 시달림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진서 숙신씨전에는, "죽은 사람은 죽은 그 날에 곧바로 들에다 장사를 지내는데, 나무를 짜 맞추어 작은 곽을 만들고, 돼지를 잡아서 그 위에 쌓아 놓고는 죽은 사람의 양식이라고 한다. 그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사나우며,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을 숭상하므로 부모가 죽어도 남자는 곡을 하지 않는데, 곡을 하는 사람을 씩씩하지 못하다고 한다" 라고 되어 있고,

 

☆ 내몽골 적봉 오한기 흥륭와 선사유적지에서 인골과 돼지뼈가 합장된 형태로 출토되었는데, 이를 보면 그 부근에 죽은 사람과 돼지를 함께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북사 물길전에는,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말갈이라고도 한다. 읍락마다 각각 장이 있으며,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굳세고 흉포하여 동이 가운데 제일 강하며, 말도 그들만이 다르다. 두막루(북부여 유민들이 북쪽으로 쫓겨가 다시 세운 나라) 등의 나라를 항상 가볍게 보는데, 여러 나라들이 골칫거리로 여긴다. 낙양에서 5천리 떨어져 있다.....
  그 부족의 종류는 모두 7종이 있는데, 첫째는 속말부로서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승병이 수천 명으로 용감한 병사가 많아 고구려를 자주 침략했다.
  둘째는 백돌부로서 속말의 북쪽에 있으며 승병이 7천이다.
  셋째는 안거골부로서 백돌의 동북쪽에 있다.
  넷째는 불녈부로서 백돌의 동쪽에 있다.
  다섯째는 호실부로서 불녈의 동쪽에 있다.
  여섯째는 흑수부로서 안거골의 서북쪽에 있다.
  일곱째는 백산부로서 속말의 동남쪽에 있고, 승병은 3천에 불과하다.
  흑수부가 제일 굳세고 강하다.
  불녈의 동쪽지방은 화살이 돌화살촉인데 바로 옛 숙신씨이다. 동이 중에서 강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속말말갈은 서랍목륜하 북쪽 파림좌기 부근으로 비정되고, 흑수부는 흑룡강이 시작되는 만주리 부근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부족들도 대흥안령산맥 주위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말갈에 관한 기록들을 연해주에 터를 잡고 살던 말갈의 기록인 것으로 알고 역사를 해석하려 했으나 알고 보니 사실은 대흥안령산맥에 위치하고 있던 말갈에 관한 기록이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 강역의 동북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나타나는 말갈의 위치가 연해주가 아닌 서랍목륜하 북쪽  대흥안령산맥 부근에 위치했다면 발해·요·금·원·청의 중심지 역시 새로 비정해야 한다는 말이 되고, 우리 역사의 중심지도 새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지는 한반도가 아니었다. 
우리는 왜 지금까지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