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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왕들의 원래 성씨와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8. 27. 00:58

윤여동설 - 백제왕들의 원래 성씨와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 최초공개

 

  

 시조 온조왕(溫祚王) : 백제왕들의 성은 모두 부여(扶餘) 씨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에 "그의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졸본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 씨로 성씨를 삼았다"고 했으므로 백제 왕실의 성씨는 "부여" 씨가 틀림없을 것인데, 중국 사서들은 대개 백제왕들을 "여(餘)" 씨로 기록하고 있고, 주서는 "부여(夫餘)" 씨로, 신·구당서는 "부여(扶餘)" 씨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 삼국 중에서 한 개 성씨로 왕조를 이은 나라는 "백제" 뿐인데, 백제시조 온조왕의 "온조"는 이름일까? 아니면 시호일까?
  필자는 이름이 아니라 시호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시호를 사용했고, 동시대인 고구려에서도 왕이 죽은 후 시호를 사용했던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가까이 위치한 백제에서 시호법을 시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수긍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조왕(溫祚王)"의 "온조"란, 이름이 아니라 "온화하고 따스한 마음을 가졌던 왕" 이라는 의미의 시호가 틀림없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온조왕의 원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2대 다루왕(多婁王) 

 

 3대 기루왕(己婁王) 

 

 4대 개루왕(蓋婁王)

 

 5대 초고왕(肖古王) 
※ 삼국유사에는 소고(素故)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공손도의 딸과 혼인했다고 기록에 나타나는 "구태(仇台)"가 바로 이 초고왕의 동생으로 보이고, 구태의 손자가 8대 고이왕으로 보인다.

 

 6대 구수왕(仇首王) 
※ 위 왕들의 이름 역시 다루, 기루, 개루, 초고, 구수였다고 보기 어렵고, 시호일 것이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구수왕을 "혹은 귀수(貴須)라고도 한다" 라고 주를 달아 놓았는데, 귀수가 구수왕의 본래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구수왕의 외모에 대하여 "신장이 7척이요, 위엄과 풍채가 특별히 달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구수왕은 머리통이 유심히 컸던 듯하다. 그리하여 구수왕이 죽은 후 그의 외모를 따서 시호로 정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짱구왕이었다는 것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 시호를 그렇게 정했다면 백제의 대신들은 유머가 있었다 하겠다.

 

 7대 사반왕(沙伴王)
※ 사반(沙伴)이라는 의미는 "모래알 같다"는 의미인데, 왕실에서 태자의 이름을 "모래알 같은 아이"라고 이름지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사반왕은 그 할아버지 구수왕의 뒤를 이어 10세쯤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곧바로 7촌 재당숙부인 고이왕에게 왕위를 찬탈 당한 왕이다.(삼국사기에는 사반왕이 구수왕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손자였다) 따라서 고이왕이 왕위를 찬탈한 후 사반왕을 죽여버리고는 그의 존재를 격하시키기 위해 "모래알처럼 미미한 존재"라는 의미로 그의 시호를 사반왕이라 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8대 고이왕(古爾王)
※ 고이왕은 비록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백제판 수양대군이지만 그는 왕위에 올라 백제 700년 역사의 기초를 튼튼히 다져 놓았다.
 
 9대 책계왕(責稽王)
※ 삼국사기에는 "혹은 청계(靑稽)라고도 한다"라는 주가 달려 있는데,  책(責)과 청(靑)이 글자형태가 비슷하여 기록에 따라서는 청계라고도 기록되어 있었던 듯하다.
 
10대 분서왕(汾西王)

 

11대 비류왕(比流王)
※ 삼국유사에는 사반왕의 아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은 사반왕의 동생의 아들이다.
 
12대 계왕(契王)

이 계왕의 아들이 바로 관세음응험기에서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제석정사를 새로 지었다는 무광왕으로서 반도백제의 건국시조이다.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 부여구(扶餘句)
※ 진서(晉書) 권9 제기 제9 간문제 함안 2년(A.D.372) 조에, "百濟王餘句爲鎭東將軍 領樂浪太守(백제왕여구위진동장군 영낙랑태수)"라고 기록되어 있어 근초고왕의 이름이 부여구(扶餘句) 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근초고왕"라는 것은 그의 시호이지 이름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백제에는 이렇듯 선왕의 시호에 근(近)자를 붙인 왕이 3명이 있다.
  13대 근초고왕과 14대 근구수왕 그리고 21대 근개루왕(개로왕)인데, 13대 근초고왕은 5대 초고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인 것이고, 14대 근구수왕은 6대 구수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인 것이며, 21대 근개루왕(개로왕)은 4대 개루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인 것이다.
   지금까지 이들의 시호를 정하면서 왜 하필 선왕의 시호에 근(近)자를 붙였던 것인지 알지 못했었는데, 필자가 처음 그를 밝혀냈다.   
  이는 백제가 8대 고이왕이 7대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것에 기인하는데, 이때부터 백제는 장자파와 차자파로 나뉘어 왕위찬탈전을 펼쳤다. 그리하여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시호는 이들이 장자파인 초고왕과 구수왕의 후예였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고, 21대 근개루왕은 왕위에 오르자 장자파나 차자파나 모두 4대 개루왕의 후손 임을 표방하며 100여년 간이나 펼쳐졌던 두 파간의 왕위찬탈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한 왕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시호였던 것이다.
  의문이 드는 분들께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생몰연대를 따져가며 세밀하게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14대 근구수왕(近仇首王) : 부여수(扶餘須)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조에 "이름이 수(須)라고도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표문에도 "신의 선조 수(須)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쇠(釗:고국원왕의 이름)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근구수왕의 이름이 "부여수(扶餘須)"였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15대 침류왕(枕流王)

 

16대 진사왕(辰斯王)

 

17대 아신왕(阿莘王) : 부여휘(扶餘暉)
※삼국사기에는 "혹은 아방(阿芳)이라고도 한다" 라는 주가 달려 있는데, 이 역시 신(莘)과 방(芳)이 글자형태가 비슷하여 혼동이 있었을 것이고, 일본서기의 아화(阿花)는 아화(阿華)의 오기로 보이는데, 이 역시 신(莘)과 화(華)의 글자형태가 비슷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진서(晉書) 권9 제기 제9 효무제 태원 11년(A.D.386) 4월 조를 보면, “백제왕세자 여휘를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으로 삼았다(以百濟王世子餘暉爲使持節都督鎭東將軍百濟王)”라고 기록되어 있어 아신왕의 이름이 부여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18대 전지왕( 支王) : 부여영(扶餘映)
※ 중국 사서들에는 여영(餘映)이라 기록하고 있다.

 

19대 구이신왕(久爾辛王)

 

20대 비유왕(毗有王) : 부여비(扶餘毗)

 

21대 개로왕(蓋鹵王) :  부여경사(扶餘慶司) 혹은 부여경(扶餘慶)
※ 삼국사기에는 이름이 경사라 했고, 중국 사서들은 여경이라 기록하고 있다.
 
22대 문주왕(文周王)
※ 삼국사기에는 "문주(文周)를 혹은 문주(汶洲)라고도 쓴다" 라고 주를 달아 놓았는데 일본서기는 문주왕(汶洲王)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혹시 문주왕(汶洲王)이 시호였고, 문주(文周)가 본래의 이름은 아니었을까? 주 문왕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이름지어줬던 것은 아닐까?

 

23대 삼근왕(三斤王)
※ 삼국사기에는 "혹은 임걸(壬乞)이라고도 한다"라고 주를 달아 놓았는데, 이 역시 삼근(三斤)과 임걸(壬乞)이 글자형태가 비슷하다.
  삼근왕은 13세에 왕위에 올라 15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는데, 왕의 시호를 세 근짜리 왕이라는 의미인 삼근왕이라 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그렇다면 혹시 임걸왕(壬乞王)이 그의 원래 시호는 아니었을까? 

 

24대 동성왕(東城王) : 부여모대(扶餘牟大) 혹은 부여마모(扶餘摩牟)
※ 중국 사서들은 모대(牟大) 또는 모태(牟太)라고 기록하고 있고, 일본서기는 동성왕을 말다왕(末多王)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마제(麻帝) 또는 여대(餘大)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성왕은 원래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예로서 그 아버지는 곤지이고, 할아버지는 반도백제 모도왕이었는데,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한 후 그 할아버지 모도왕이 둘째 손자인 모대를 대륙으로 보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도록 했던 왕이다. 처음에는 정치를 잘 하여 북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였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정치를 잘못하여 신하에게 시해 당했다. 그리하여 그 이복동생인 무령왕이 40세의 나이에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25대 무령왕(武寧王) : 부여사마(扶餘斯摩) 혹은 부여융(扶餘隆)
※ 중국 사서들에는 대개 여륭(餘隆)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후세 의자왕의 아들 중에도 부여융(扶餘隆)이 있었다. 두 사람의 이름이 정말로 같았는지 의문이다.
  충남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이라 새겨져 있었는데, 사마가 왕의 이름이었고 시호가 무령왕이었다면 어떻게 지석에 시호가 아닌 이름을 새길 수 있었는지 의문이고, 또 마(麻)자가 삼국사기 기록의 마(摩) 자와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필자의 주장과 같이 무령왕이 한반도에서 자라나 40세에 대륙으로 건너가 동성왕의 뒤를 이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다가 대륙에서 죽었다면 어떻게 그의 능이 한반도 충남 공주에서 발견될 수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무령왕이 대륙에서 죽자 그곳에서 육탈을 시킨 후 왕의 고향이며 안전하고 아름다운 반도백제의 도읍 한반도 공주로 운구하여 능을 조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26대 성왕(聖王) : 부여명농(扶餘明 )
※ 중국 사서들과 일본서기 공히 이름을 "명(明)"이라 기록하고 있다.

 

27대 위덕왕(威德王) : 부여창(扶餘昌)
※ 위덕왕은 그 아버지 성왕이 전선에 있던 자신을 위로하러 오다가 신라군에게 잡혀 죽고 목이 잘려 서라벌로 보내지자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출가하여 스님이 되려고도 했던 사람인데, 충남 부여에서 위덕왕과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륙에서 죽은 아버지인 성왕의 능을 한반도의 부여에 조성하고 절도 지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또 일찍 죽은 아들을 위해서도 탑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위덕왕은 반도백제 무광왕의 묘예로서 무령왕의 장자였던 순타태자가 일찍 죽자 그 뒤를 이어 태자로 봉해졌다가 무령왕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성왕의 아들로서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당시 반도백제가 도읍을 고마성(충남 공주)에서 거발성(충남 부여)로 옮겼던 떼였기 때문에 위덕왕이 그 아버지 성왕을 위해 절을 짓고 사리를 봉양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또 일찍 죽은 아들들을 위한 절도 지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28대 혜왕(惠王)
※ 삼국유사에는 이름이 계(季) 또는 헌왕(獻王)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29대 법왕(法王) : 부여선(扶餘宣) 혹은 부여효순(扶餘孝順)
※ 무령왕의 직계혈손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은 이 법왕까지였던 것으로 보이고, 무왕은 동성왕의 혈손으로 추정된다.

 

30대 무왕(武王) : 부여장(扶餘璋)
※ 삼국유사에는 무강(武康) 또는 헌병(憲丙), 어릴 때의 이름은 일기사덕(一耆篩德)이라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서동설화가 전하고 있으나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 무왕은 동성왕의 고손자로 보인다. 

 

31대 의자왕(義慈王) : 부여의자(扶餘義慈)
※ 나라를 망친 마지막 왕이므로 시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