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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주몽과 유리가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친 진짜 이유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8. 31. 22:28

윤여동설 - 주몽과 유리가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친 진짜 이유 - 최초주장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은 동부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유화부인이고, 아버지는 북부여 해모수 천제의 증손자인 해불리지(필자주 : 혹시 해불리지의 아들의 오기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이다.
  해불리지가 압록강가를 지나다가 하백(어부)의 딸인 유화를 겁탈하여 임신시키게 되고, 유화의 아버지인 하백은 시집도 안간 처녀가 임신했다 하여 자기 집에서 내쫓아버린다.
  그리하여 유화는 동부여로 가서 주몽을 낳게되고 그곳에서 살게된다.
  세월은 흘러 주몽은 자라 동부여 왕궁의 말지기가 되고, 예씨라는 여인과 혼인을 하였는데, 예씨가 임신 중에 있을 때 갑자기 주몽이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동부여에서 살기 싫어 졸본부여로 이주하려 했다면 가족을 이끌고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 여유롭게 동부여를 떠나 졸본으로 가면 되었을 것인데, 기록들은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칠 때의 상황을 아주 급박하게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동부여의)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또 주몽을 죽이려고 꾀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그 음모를 알고는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하려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을 가지고 어디를 간들 어떠하겠느냐? 여기에서 머뭇거리다가 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멀리 가서 큰 일을 도모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과 더불어 벗을 삼아 엄호수까지 가서 물을 건너가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고, 뒤쫓아오는 병사에게 붙들릴까 두려웠다.
  주몽이 물에 대고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자손이요 하백(河伯)의 외손(外孫)이다. 오늘 도망을 하는데 뒤쫓는 자가 따라오면 어찌하란 말인가?" 하였더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가 되었으므로 주몽은 건널 수 있었고,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져 버렸으므로 말 탄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동부여 추격병들에게 잡히면 죽게 되는 위급한 상황이었으나 다행이 추격병들이 쫓아오기 전에 어부들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졸본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 하백이란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를 일컫는 말로서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강을 건너 주었다는 것은 어부들이 배를 끌고 와서 주몽 일행을 건너 주었다는 말이고,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져버렸다는 것은 어부들이 주몽 일행을 건너 주고는 다시 흩어져 물고기를 잡았기 때문에 추격병들이 주몽일행을 더 이상 추격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주몽 일행은 앞에 강이 나타나 잡힐 위기에 처하자 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들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24년에 이르러 그 어머니인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죽게 되고, 동부여의 금와왕은 그녀를 태후의 예에 따라 장사지내고, 사당을 지어 주었다고 하고, 다시 그로부터 5년 후인 기원전 19년 4월에 이르러 주몽의 아들 유리와 주몽의 첫아내 예씨 역시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몽이 동부여를 도망쳐 졸본으로 와서 왕위에 오른 후에도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와 아내인 예씨 그리고 새로 태어난 주몽의 아들 유리는 계속하여 동부여에서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졸본에서 왕위에 오른 주몽은 왜 그 어머니와 부인 예씨 그리고 새로 태어난 아들 유리를 동부여에서 그냥 살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런데 고구려 건국설화를 읽어보면,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은 주몽에게 "여기에서 머뭇거리다가 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멀리 가서 큰 일을 도모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몽은 동부여에서 무언가 큰 일을 도모하다가 그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잡혀 죽게될 위기에 처하자 급히 동부여에서 도망쳤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추정해 보면, 주몽은 동부여에서 역모에 버금가는 큰 일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잡히면 죽게 되는 급박한 상황이 되자 주몽은 같이 큰일을 도모했던 동료인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급히 동부여를 탈출하게 되었고, 동부여에 남아 있던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와 아내 예씨는 인질로 잡히게 되고, 후일 태어난 아들 유리도 역시 인질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주몽이 동부여로 도망친 후 동부여에 남아 있던 주몽의 가족들은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감시와 멸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을 것이므로 그들은 스스로 주몽을 찾아 졸본으로 올 수 없었고, 왕위에 올라 있던 주몽도 어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가 졸본이 아닌 동부여에서 죽어 동부여에 묻히는 이유가 설명되고, 또 주몽의 아내인 예씨와 아들 유리가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오는 이유가 설명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부여의 금와왕이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을 태후의 예로서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워주었다는 것은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죽은 유화의 시신마저도 그 아들인 주몽에게 넘겨주지 않고 계속 인질로 잡고 있겠다는 말이 되니 금와왕은 "연속극 주몽"에서와 같이 주몽에게 우호적인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주몽에게 매우 적대적인 사람이었고, 사실 주몽과 금와는 비슷한 나이였다.

 

☆ 주몽은 기원전 79년생이고, 금와는 기원전 77년생으로서 금와가 주몽보다 두 살이 어렸고, 주몽은 기원전 58년에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고, 금와는 기원전 48년에 동부여의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동부여의 금와왕은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태후가 죽은 후에도 주몽의 부인인 예씨와 그 아들 유리 역시 주몽에게 보내주지 않고 계속 인질로 잡고 있었는데, 유화태후가 죽고 난 지 5년이 지난 기원전 19년 4월에 이르러 유리가 그 어머니 예씨를 모시고, 친구인 옥지, 구추, 도조와 함께 그 아버지인 주몽이 도망쳐 왔던 길을 따라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와서 태자로 봉해지게 되고, 그 해 9월에 이르러 주몽이 죽자 고구려의 2대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리는 동부여에서 몇 년 간이나 인질생활을 했던 것일까?
  우리는 지금 주몽이 기원전 58년에 출생하여 22세 때인 기원전 37년에 졸본으로 도망쳐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주몽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79년이었고, 22세 때인 기원전 58년에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으로 와서 졸본부여 둘째 공주와 혼인을 했고, 그 해 10월에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왕이 죽으면서 왕위를 주몽에게 물려주게 되어 졸지에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필자주 : 주몽은 계속 졸본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했고, 2대 유리왕, 3대 대무신왕, 4대 민중왕, 5대 모본왕까지 그 졸본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하다가, 성씨가 고씨였고, 구려지역 출신이었던 6대 태조대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야 "고구려"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따라서 주몽의 아들인 유리는 주몽이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친 해인 기원전 58년에 태어났다는 말이 되고, 왕위에 오를 때 40세였음을 알 수 있다.
  유리왕은 무려 40년 간이나 동부여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도망쳐 졸본으로 와서 태자로 봉해졌다가 그 아버지 주몽이 죽자 고구려의 제2대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본기 추모왕 19년(B.C.19) 조를 보면,
  "여름4월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도망쳐 오니 왕이 기뻐하여 그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왕이 죽으니 이때에 나이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주몽은 기원전 79년생이었으므로 기원전 19년에 죽었다면 40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61세에 죽은 것이고, 그 아들인 유리는 기원전 58년생이므로 이해에 40세였다.
  그리고 동명왕(동명성왕)이란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이고, 주몽의 시호는 추모왕이었다.

  따라서 이 조문의 기록은 잘못되어 있다는 말이 되는데, 기록을 수정해 보면,

  "여름4월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왕이 기뻐하여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 유리의 나이가 40세였다. 
  가을9월 왕이 61세의 나이로 죽으니, 용산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추모왕이라 했다"
라고 고쳐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바로 주몽과 유리 부자가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와야 했던 내막이고, 주몽과 유리의 수정된 출생년도이며, 유리는 얼굴도 모르는 그 아버지 주몽을 40년 만에 만났던 것이고, 주몽의 첫 부인 예씨 역시 20세쯤에 헤어진 후 40년이 지난 60세쯤의 나이가 되어서야 남편인 주몽과 재회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