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와 낙랑왕 최리의 딸 낙랑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
[호동왕자와 낙랑공주가 밤을 지새웠을 낙랑국왕성 전경도]
우리는 지금 고구려 대무신왕의 맏아들인 호동왕자와 낙랑왕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 속에는 어떠한 내막들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서기 36년 여름 4월 대무신왕의 아들인 호동이 옥저(남옥저)에 놀러갔더니 낙랑왕 최리가 출행 중 호동을 보고는,
"그대의 용모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 듯 하오. 혹시 그대가 고구려 대무신왕의 왕자가 아니오?" 하고는 호동을 낙랑 왕궁으로 데리고가 자기의 딸인 낙랑공주로 하여금 호동과 잠자리를 함께 하도록 하였다.
☆ 삼국사기에는 서기 32년 4월 조에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나 그 아버지인 대무신왕과 갈사왕의 손녀인 해씨가 혼인한 때가 서기 22년경이므로 서기 32년에는 호동왕자의 나이가 겨우 10세쯤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이때 낙랑공주와 잠자리를 함께 했을 리는 없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일 것인데, 필자는 그 때가 서기 36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그 다음해인 서기 37년에 최리의 낙랑국이 멸망하여 고구려에 병합되었다가, 서기 44년에 후한 광무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살수 이남의 낙랑 땅을 탈환하여 다시 낙랑군을 설치하게 되는데, 이 후한낙랑군이 서기 313년까지 존속하다가 미천왕 때 고구려에게 병합됨으로써 우리 역사 강역에서 낙랑군이 영원히 소멸하게 된다.
호동이 본국으로 돌아와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 낙랑공주에게 말하기를 "네가 너희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을 부숴 버린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아내로 맞아들일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맞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옛날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만약 적군이 침공해 오면 스스로 소리를 내어 미리 방어태세를 갖추게 하기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부숴 버리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낙랑공주가 예리한 칼을 가지고 몰래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어버리고 나팔을 부순 후 호동에게 알려 주었고,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낙랑왕 최리는 북과 나팔이 소리를 내지 않으므로 방어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고구려 군사들이 성 아래 이르러서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숴진 것을 알고 자기의 딸인 낙랑공주를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혹은 대무신왕이 낙랑을 쳐 없애기 위하여 혼인하기를 청하여 최리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후 그녀를 낙랑에 다시 보내 북과 나팔을 부수게 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위 이야기의 내용을 잘 새겨보면 고구려의 호동왕자는 낙랑을 병합시키기 위하여 낙랑공주를 이용하고자 했을 뿐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이때 최리의 낙랑국은 매우 절박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북쪽의 고구려는 서기 30년에 낙랑국의 동쪽에 위치했던 낙랑동부도위까지를 쳐서 병합시킨 상태였고, 서쪽의 후한 역시 혼란기를 지나 정국이 수습되고 있어, 전한의 무제가 설치했던 옛 낙랑군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낙랑국을 세워 칭왕을 하고 있는 최리를 복속시키려고 했을 것이며, 남쪽의 백제 역시 북쪽으로 강역을 넓히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 사방에 적국뿐인 낙랑왕 최리의 입장에서는 강국이며 바로 이웃한 나라인 고구려와 사돈 관계를 맺을 수만 있다면 고구려의 보호아래 그 왕조를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남옥저에 갔다가 뜻밖에도 고구려 대무신왕의 맏아들인 호동왕자를 만났으니 낙랑왕 최리는 이는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라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이 급했던 낙랑왕 최리는 호동왕자를 낙랑왕궁으로 데려가 후하게 대접한 후 자기의 딸인 낙랑공주로 하여금 호동왕자와 잠자리를 함께 하도록 함으로써 이들의 혼인을 기정 사실화하려 했다고 보여진다.
또한 낙랑공주의 입장에서도, 호동왕자는 고구려의 맏왕자이므로 후일 왕위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고, 그의 모습이 아름다워 그 아버지인 대무신왕도 매우 귀여워할 정도로 미남이었다고 하니 순진한 낙랑공주로서는 호동왕자에게 정신을 빼앗길 만 했을 것이다. 요즘말로 하면 낙랑공주는 호동왕자를 보는 순간 뿅.....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이때 고구려의 호동왕자나 대무신왕은 낙랑국을 반드시 병합시켜 옛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낙랑국에는 적군의 침입을 알려주는 자명고가 있었고, 또 적군이 침공해오면 스스로 소리를 내는 나팔이 있어 좀처럼 침공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호동왕자는 남옥저에 놀러간 척하며 낙랑에 대한 지리와 정보를 수집 중에 있었을 것이며, 그 북과 나팔을 부술 방안을 찾고 있었을 것인데, 마침 그곳에서 낙랑왕 최리를 만나 일이 아주 순조롭게 풀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호동왕자는 결국 사랑의 포로가 되어버린 낙랑공주를 이용하여 그 북과 나팔을 부숴 버리게 만들었고, 최리의 낙랑국은 서기 37년에 멸망하고 마는데, 그 아버지 낙랑왕 최리는 고구려와의 밀접한 관계를 너무나 간절히 원했고, 그 딸 낙랑공주는 호동왕자의 외모에 취한 나머지 호동왕자의 속마음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사랑하지 않았고, 낙랑공주 혼자서 호동왕자를 짝사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철없고 순진한 낙랑공주는 결국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만들었고 그 아버지의 손에 죽어야 했는데, 호동왕자 역시 혹시 자기 아들을 제치고 호동이 태자로 봉해질까 염려한 고구려 대무신왕의 맏왕비의 참소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스스로 칼을 입에 물고 엎어져 죽어야 했으니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은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호동왕자도 처음에는 그 아버지 대무신왕의 뜻을 받들어 낙랑을 병합할 마음으로 낙랑공주를 이용하려 했을 것이나 마음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마음씨 착한 낙랑공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니 이들 두 사람은 전쟁없는 천상에서 다시 만나 이승에서 못 이룬 사랑을 이루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