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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의 백강(白江)은 지금의 한반도 금강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1. 18. 23:17

윤여동설 - 백제의 백강(白江)은 지금의 한반도 금강이 아니다 - 최초주장

 

 

 

  당나라의 소정방이 타고 올라와 백제를 멸망시킨 백강(白江)은 지금의 난하하류

 

  우리는 지금 서기 660년에 당나라의 소정방이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서해바다를 건너 지금의 금강을 타고 올라가 충남 부여의 사비성을 공격해 백제를 멸망 시켰다고 역사를 해석한다.

  그리하여 소정방과 김법민이 만난 덕물도를 지금의 덕적도일 것이라 하고, 당나라군이 타고 올라온 백강구를 금강 하류일 것이라 하며,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합류한 기벌포를 충남 서천, 군산, 강경 쯤일 것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백제 멸망시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장소를 찾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탄현이 어디를 말하는지, 황산이 어디를 말하는지, 기벌포가 어디를 말하는지, 백강구는 어디이고, 웅진구가 어디를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온갖 설만 무성할 뿐 어느 주장도 백제 멸망시의 기록을 완벽하게 충족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대륙의 기록을 한반도로 가져와 한반도 지형에 맞추어 그 기록속의 장소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백제(대륙백제)는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건국되고 멸망했고, 신라 역시 대륙에서 건국되어 역사를 이어오고 있었다.

  백제는 지금의 하북성 난하 하류일원을  차지하고 있었고, 신라는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일원을 차지하고 있었다.

  백제(대륙백제)는 지금의 하북성 도산(都山) 남쪽 부근에서 건국되었고,  475년에 백제의 개로왕이  한성을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함락당하고 잡혀 죽자, 그 동생인 문주왕은 급히 웅진(필자주 : 지금의 진황도 노룡)으로 도읍을 옮겼고, 538년에 성왕은 도읍을  다시 사비(필자주 : 지금의 당산 난현)로  옮겼는데, 사비는 지금의 난하 하류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난하하류가 바로 백제 역사에 나타나는 백강(백촌강이라고도 한다)이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 시킬 때의 기록을 보면 소정방의 당나라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7월 10일에 백제 왕성의 남쪽인 기벌포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그리하여 소정방은 신라군과 합류하기 위해 백제의 도읍 사비의 남쪽 기벌포에 군사들을 상륙시켜야만 했는데, 그곳은 갯벌이 형성되어 있어 발이 푹푹 빠졌다.

  그런데 기벌포에 상륙하려고 하니 신라군은 아직 오지 않았고, 적군인 백제군이 강변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나라군은 버드나무로 엮은 발을 기벌포 갯펄에 깔고 강 동쪽에 상륙해 백제군과 싸워 다행히 대승을 했고,신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다리는 신라군은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정방은 화가 났고, 다음날(7월 11일)에야 신라군이 도착하자 소정방은 약속일자를 맞추지 못했다 하여 다짜고짜 신라 독군 김문영을 참수하겠다고 으름짱을 놓게 된다.

  그러자 김유신은 자신들이 늦고 싶어 그리했던 것이 아니라 계백장군이 이끄는 백제군을 황산벌에서 격파하고 오느라고 어쩔 수 없이 늦었는데, 참수라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느냐고 반발하게 되었는데, 중간에서 중재하여 그럭저럭 사태가 수습되고, 나당 연합군의 육군과 기병은 북쪽으로 사비성을 향하여 진군하게 되고, 수군은 백강을 타고 올라가게 된다. 

 

  * 계백장군의 백제군과 김유신장군의 신라군이 황산벌 전투를 한 날과  백제군과 당나라군 사이에 벌어졌던 기벌포전투는 모두 7월 9일에 일어났고, 신라군이 기벌포에 도착한 것은 7월 11일이었다. 황산벌 전투때문에 악속날짜 보다 하루를 지체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황산에서 기벌포까지는 무장을 한 병사들이 하루동안 행군하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런데 역사학자 가운데는 지금의 한반도 충남 연산을 황산이라 하면서도 금강하구에 위치한 군산을 기벌포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동진강 하류를 기벌포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거리가 과연 무장한 군사들이 걸어서 하루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일까? 

차라리 젓갈로 유명한 충남 강경 부근을 기벌포라고 주장하는 편이 훨씬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조를 보면, 
 "20년(A.D.660) … 이미 당나라 군사들이 백강(白江)에 진입하였고 신라 군사들이 탄현(炭峴)을 통과하였다는 것을 듣고, 장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가서 신라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는 패하고 계백은 죽음을 당하였다.
  그제야 군사를 모아 가지고 웅진구(熊津口: 기벌포의 오기일 것이다)를 막고 강가에 군사를 배치시켰더니 소정방이 강좌(강동쪽)로 나와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우리군사가 대패하였다.
  당나라 군사(수군)는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서 배들을 잇대어 북을 두드리고 떠들며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기병들을 거느리고 곧 바로 (북진하여) 진도성(眞都城: 사비성) 1사(약30리라 한다)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우다가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고, 당나라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서 성에 육박하였다.
  왕(의자왕)이 패망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기를 '한스럽게도 성충(成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고 드디어 태자 효(孝)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잘 알게 한다.

 

  그런데 이때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건국되고 왕조가 이어오고 있었다.
  백제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하류 일원을 차지하고 있었고, 신라는 백제의 동쪽인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나라의 소정방이 지금의 산동반도에서 대륙백제로 가기 위해서는 래주 즉 산동반도에서 서북쪽으로 발해를 건너 난하를 타고 올라가야만 사비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합류하기로 한 기벌포는 난하 하류 부근에 위치한 포구를 말하는 것일 수밖에 없고, 신라군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을 출발해 서남쪽으로 행군하여 발해를 건너온 당나라군과 합류한 후 북쪽의 사비성을 향해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되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에 위치했다고 역사를 해석해 소정방이 산동반도에서 서해(황해)를 건너 동남쪽으로 향하여 한반도로 건너왔고, 신라군이 한반도 경주에서 부여를 향해 행군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기벌포를 찾지 못하고 탄현과 황산을 찾지 못하고, 주장들만 난무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소정방은 서해바다를 건넜던 것이 아니라 발해를 북서쪽으로 가로질러 바로 지금의 난하를 타고 올라가 백제를 멸망시켰던 것이고, 후일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해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왜국에서 지원군을 배 400척에 태워 보내 당나라 수군과 해전을 벌여 전멸했다는 백강구는 바로 지금의 발해와 난하가 만나는 난하구 부근일 것이다.

  [난하구 부근 또는 난주(난현) 부근을 발굴해보면 이때 불에타 침몰한 왜국의 배들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백강을 한반도의 금강이라 생각해 왜국 지원군 배 400척이 전멸한 곳이 한반도 금강 하구라고 하고 있으나 이는 틀린 것이고, 탄현이나 황산, 기벌포 등도 대륙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 한반도에서는 천년을 뒤져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충남 논산에 가면 계백장군의 묘라고 하는 무덤이 있는데, 대륙의 황산벌 전투에서 죽었을 계백장군이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에 묻혔을 리는 없으니 지금 논산의 계백장군  묘는 어느 이름 모를 사람의 무덤이지 백제 계백장군의 묘일리가 없는 것이다.  

  백제 말기 대륙백제는 지금의 난하를 중심으로 번성했다가 멸망했다.
  백제의 멸망을 지켜본 강이 바로 지금의 난하이고, 백제가 그곳에 있었으나  세월은 사람들의 기억을 흐리게 하여 지금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고, 난하는 말없이 흘러 발해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