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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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지금의 요동(遼東)은 옛 요동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1. 20. 01:52

윤여동설 - 지금의 요동(遼東)은 옛 요동이 아니다 - 최초주장

 

 

  요동(遼東)이란 요의 동쪽 또는 요수의 동쪽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요하의 동쪽을 요동이라 하고, 요하의 서쪽을 요서라 한다.

  그러나 원래의 요동군은 지금의 중국 북경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동쪽으로 2-3천리쯤 떨어진 지금의 요하가 요수였을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요동군이 요하의 동쪽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었고, 역사적으로 우리와 중국과의 서쪽 경계가 지금의 요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수경에는 "대요수는 요새 밖 백평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요새로 들어가(통과하여) 요동 양평현 서쪽을 지나며 또 동남쪽으로 흘러 방현 서쪽을 지나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안평현 서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또 원토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는데, 소요수가 이곳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又東南過房縣西 又東過安平縣西南入於海  又元토高句麗縣有遼山 小遼水所出 西南至遼隊縣入於大遼水也)"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의 요하는 중국 사람들이 보통 새(塞) 또는 장새(長塞)라고 말하는 만리장성을 통과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다. 
   따라서 수경의 기록은 지금의 요하에 대한 기록이라고 볼 수 없고, 요수는 요동군인 북경부근을 가까이 지나는 강이어야 한다.
  그런데 찾고 보니 고구려의 졸본이 압록강 너머 환인이 아니라 북경의 서북쪽 방향인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 후성진 부근이었고, 대요수는 지금의 영정하를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동양하와 남양하가 합류하여 양하가 되고, 양하와 상간하가 합류하여 관청수고로 들어갔다가 이름을 바꾸어 영정하가 된다. 그리고 영정하와 대청하가 합류하여 해하가 되어 발해만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대개의 경우 이 양하, 영정하, 해하가 우리와 중국 세력들과의 서쪽 국경이었다.
  따라서 요동은 이 강의 동쪽을 통칭하는 말이고, 요동성은 북경성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북경 부근이 바로 고대의 요동인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서기 28년 대무신왕 11년 조를 보면,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침공하여 왔다" 는 기록이 보이고,
  서기 49년 모본왕 2년 조에는,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어양·상곡·태원 등지를 습격했더니 요동태수 채용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북평은 하북성 역현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태원은 지금 중국 산서성의 성도(省都)로서 옛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당나라는 바로 이곳 태원 유수였던 이연이 세운 나라였다.
  고구려는 개국 초기인 5대 모본왕 때 이미 북경 부근을 차지하고 있었고, 산서성 북쪽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만약 모본왕 때 고구려와 한나라의 국경이 지금의 요하였다면 고구려군이 수천 리나 멀리 떨어진 산서성 태원까지 습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습격이란 적이 미처 눈치채지 못하게 갑자기 공격하여 가볍게 약탈한 후 적군이 출전하기 전에 미리 싹 빠져 돌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적국의 한 가운데까지 수천 리를 깊숙이 들어가 습격할 수는 없다.
  이는 고구려와 한나라의 국경이 태원에서 가깝지 않으면 펼칠 수 없는 작전으로서 이때 고구려와 한나라의 국경은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태원 북쪽 안문관 부근이었다는 말이 된다.
  이렇듯 기록이 명확한데도 지금의 요하가 고구려와 한나라의 국경이었다고 고집한다면 이는 매우 곤란한 일이다. 
  우리 고대 역사에 나타나는 요동은 지금의 중국 북경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옛 기록 속의 요동벌이란 북경부근의 평원을 말하는 것이지 지금 압록강 북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요서란 요수의 서쪽이란 의미로서 지금의 요하 서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북경 서남쪽 방산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송서나 양서 그리고 양직공도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가 진(晉)나라 말기에 한 때 차지했다고 기록되고 있는 요서 진평현 역시 바로 이 탁군(탁록) 부근을 말하는 것이지 지금 요하의 서쪽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때 대륙백제는 북경 동쪽 당산, 진황도부근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평양성인 지금의 승덕시 부근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죽이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요서 지역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그곳에 백제의 군현을 설치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후일 북위가 수십만 기병을 동원하여 백제를 침공했으나 백제의 동성왕은 그를 물리치고는 남제에 사신을 보내 그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법명 등의 관작을 요청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북위가 수십만 기병을 동원하여 백제를 침공했다는 기록을 한반도에 비정하여 북위가 수만 척의 배에 수십만 필의 말과 수십만 명의 군사와 전투장비, 식량 등을 싣고 서해바다를 건너와 한반도의 백제를 침공했던 기록이라고 해석하고 있었으니 제대로 된 해석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요동은 옛 기록 속의 요동이 아닌 것이며 지금 요하의 서쪽이 요서도 아닌 것이다.
 

  지금의 요하는 후세인 명, 청대에 이르러 붙여진 것이라는 것을 빨리 인식해야 하고, 북경 부근까지가 우리의 옛 땅이었음을 알아야 하며, 우리 삼한, 삼국의 건국지가 한반도가 아닌 북경 부근 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 고대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우리의 고대사가 순 엉터리로 해석되고 있었다는 말이되고, 우리 고대사 모두를 처음부터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필자같은 사람도 이를 알고 있는데, 평생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이 이를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만약 지금까지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역사학자로서의 자질이 없거나, 학맥이나 자신이 평생을 몸 바친 업적과 지금까지의 주장을 뒤집을 수 없어 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거짓으로 점철된 우리 역사 연구 논문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거짓 논문을 그냥 남겨 놓고 죽는다면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엉터리 역사학자였다고 대대손손 손가락질 할 것이고, 지금이라도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새로운 논문을 남겨 놓고 죽는다면 후세에는 새로운  논문의 내용 만이라도  인정받게 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역사의 해석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    

  어느 양심있고, 용감한(?) 역사 학자가 나타나 자신들의 잘못된 역사 해석을 솔직히 인정하고, 우리 고대사 모두를 처음부터 다시 해석해 재정립하는지 지켜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