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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의 남한성은 하북성 당산 천안시 건창영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9. 22. 07:42

윤여동설 - 백제의 남한성은 하북성 당산 천안시 건창영부근 - 최초공개

 

 

 

  사실 백제 최초의 도읍, 더 엄격히 말한다면 온조십제 최초의 도읍이 위례성(慰禮城)이냐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냐 또는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이 동일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고, 한산에 남한산과 북한산이 따로 존재했느냐, 한성이 두개로서 남한성과 북한성으로 나누어져 있었느냐 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은 논란거리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서 보좌역을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는데, 이때는 전한 성제 홍가 3년(B.C.18)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기원전 6년 조에는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제 나가서 순행하다가 한수(漢水)의 남쪽 토양이 비옥함을 보았으니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구히 평안할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라고 말한 후 "7월에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기원전 5년 조에는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2월 왕이 부락으로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장려했다. 가을 7월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고 그곳에 한성(漢城)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최초의 도읍이 하남위례성이었고, 새로 옮긴 도읍이 한성이었느냐 아니면 원래의 도읍이 위례성이었고, 새로 옮긴 도읍이 하남위례성이었느냐 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고, 또 이후의 기록에 한성이 백제의 도읍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위례성 - 남한성 - 한성의 관계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백제 최초의 도읍 위례성(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은 동일한 곳이다)은 한수남쪽에 위치한 위례성이었고, 온조왕이 옮긴 남한성은 위례성보다 한수의 하류에 위치했고, 근초고왕이 옮긴 한성은 위례성의 동북쪽으로 근접한 지역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18년 비류와 온조를 비롯한 열 사람의 신하들은 도읍할 만한 곳을 찾기 위하여 함께 한산의 부아악(負兒嶽)에 올랐다.
  부아악이란 산의 형상이 멀리서 보면 어머니가 아기를 업은 모습이라 하여 사람들은 그 산봉우리를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한참동안 지세를 둘러보던 비류가 나라의 서쪽 바닷가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신하들이 간하여 말하기를,
  "이 강의 남쪽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둘렀고(北帶漢水), 동쪽으로는 높은 산맥이 있고(東據高岳), 남쪽으로는 옥택이 바라다 보이고(南望沃澤),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西阻大海)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얻기 어려운 것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비류는 자기의 고집을 꺾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백제(百濟)를 건국하였고, 온조는 신하들이 지목한 위례성에 도읍하고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13년이 지난 기원전 5년에 이르러 형인 비류가 갑자기 죽자 십제와 백제를 통합하고는 국호를 새롭게 백제(百濟)라 하고, 도읍을 위례성의 남쪽으로 옮기고 남한성(南漢城)이라 하게 된다.
지금의 하북성 당산 천안시 건창영(建昌营) 부근이다.

 

 

                                                              북대한수
                                                   (북쪽으로는 한수를 둘렀고)

 


     서조대해                                          위례성                                        동거고악
(서쪽은 큰바다로 막혀있으며)                 (하남위례성)                         (동쪽에는 높은 산맥이 있고)

 


                                                               남망옥택
                                                (남쪽으로는 넓은 들이 바라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위례성이 후일 조선의 도읍 한양이었다고 생각하여 한반도 서울 부근에서 위례성과 남한성을 찾고 있는데, 지금의 서울은 당초 온조의 열 신하들이 도읍지로서 적당하다고 추천했던 장소와는 지형이 확연히 다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도의 기록을 보면,
  "고조선의 마한지역이다.

  (한양은) 북쪽으로는 화산을 진산으로 삼아 용이 서리고 범이 쭈그리고 앉은 형세요, 남쪽은 한강으로서 금대를 삼았고, 멀리 왼쪽(동쪽)으로는 대관령을 당기고, 오른쪽(서쪽)에는 발해(渤海, 필자주 : 한반도가 발해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매우 이상하다)를 두르니 그 형세의 훌륭함은 동방의 으뜸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한수가 하남위례성(위례성) 북쪽에 띠를 둘렀다(北帶漢水)라고 했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한양의 남쪽에 한강이 띠를 둘렀다(南以漢江爲襟帶)라고 했으니 한수(한강)의 위치가 남과 북으로 확연히 다른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한 한양의 위치]

                                     화산

 


         발해                      한양                대관령

 


                                     한강

 

  그렇다면 이는 어딘가 이상하다.
  백제의 위례성과 조선 한양의 위치가 다른 것이다. 
  그런데 송서 백제국 전에는,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천여 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주서 백제 전에는,
  "백제는 그 선조가 대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비로소 대방 땅에 나라를 세웠다. 옛날에는 그 땅의 경계가 동쪽으로는 신라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했으며, 서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까지이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 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북사에는,
  "동명의 후손에 구태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비로소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 중 강국이 되었다. 원래 백가가 건너왔다고 하여 백제라고 했다고 한다. 그 나라는 동쪽은 신라까지이고, 북쪽은 고구려와 접했다.
  서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까지이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동서의 거리는 450리이고, 남북의 거리는 900여 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구당서에는,
  "백제국 역시 본래 부여의 별종으로서 마한의 옛 땅에 있다. 경사에서 동쪽으로 6,200리에 있으며,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북쪽은 신라까지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까지이다. 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은 바다를 건너 고구려까지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중국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이 백제가 과연 한반도에 위치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백제의 동쪽 또는 동북쪽에 위치했다는 신라는 어디에 위치했다는 말일까?
  수서 신라 전에는,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혹은 사라라고도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구당서 신라국 전에는,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먼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로 한정되어 있고, 서쪽은 백제, 북쪽은 고구려와 인접했다. 동서 1천리, 남북 2천리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경주에서 건국되었다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니 그렇다면 한반도 경주부근이 한나라 때의 낙랑 땅 일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중국 사서들은 또 한나라 때의 낙랑군 수성현이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우리의 역사 상식으로는 북한의 평양이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중국 사서들은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 낙랑 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의 삼국이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위치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인 것이다.

 
☆ 어느 사람은 낙랑군은 진황도 부근에 있었고, 최리의 낙랑국이 한반도 평양 부근에 있었다고 하기도 하나 잘못된 주장이다. 

  이는 전한→ 왕망의 신→ 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틈타 최리라는 사람이 전한 낙랑 땅을 차지하고 칭왕을 했다가 서기 37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멸망당했는데,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루지 못한 이야기가 바로 이때의 이야기이다. 

  그러다가 7년 후인 서기 44년에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옛 낙랑 땅의 일부인 살수이남을 탈환하여 다시 후한낙랑군을 설치했다.
  일부 사람의 주장처럼 낙랑국이 장소를 옮겨 설치되었던 것이 아니라 같은 장소인 낙랑 땅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그리하여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온조왕이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고, 신라의 파사이사금도 "나라의 서쪽에 백제가 있고, 남쪽에 가야가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오백년 도읍지 한성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후한서 한 전에는,
  "한은 삼종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요, 세째는 변진(변한)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고,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했다. 변진(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했다. 모두 78국이며 백제는 그 중의 한 개 나라이다. 큰 나라는 1만여호, 작은 나라는 수천가인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한다. 그 땅을 합하면 사방 4천여리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의 도읍 월지는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풍윤현으로 비정된다. 
  삼국사기에 백제 온조왕이 웅천에 목책을 설치하자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여 말하기를 "왕이 처음으로 강을 건너와서 오갈 데가 없을 때에 내가 (마한의) 동북쪽 1백리 되는 땅을 나누어주어 편히 살수 있도록 하여 주었으니 내가 왕을 대우한 것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하여 보답이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나라가 완정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어 자기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과 연못을 설치함으로써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이를 어찌 의리가 있다 할 수 있을 것인가?" 했으므로 왕이 부끄러워 곧 목책을 헐어 버렸다" 라는 기록이 있음을 보면 실제 백제가 마한의 동북쪽에서 건국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한의 동북쪽으로서 북쪽으로 한수가 띠를 두르고, 동쪽으로 높은 산맥이 있으며, 서쪽으로 대해(큰 호수)가 있고, 남쪽으로 넓은 들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지금의 난하 하류 당산, 진황도부근으로서 그 부근이 바로 백제 오백년 도읍 한성(漢城)이 위치했던 곳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선뜻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것이 우리 삼국 역사의 진실이다.


☆ 한반도에는 서기 365년경 대륙에서 근초고왕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패하고 한반도로 건너와 지모밀지에 도읍하고 세웠던 무광왕의 반도백제가 있었는데, 이 반도백제가 서울까지를 차지했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고, 한반도에서 4세기 중반 이전의 백제유물은 출토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