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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근초고왕이 옮긴 백제의 도읍 한성(漢城)은 진황도 도산남쪽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9. 26. 07:32

윤여동설 - 근초고왕이 옮긴 백제의 도읍 한성(漢城) 진황도 도산남쪽 - 최초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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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A.D.371) 조를 보면,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하여 침공해 왔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패하가에 군사를 숨겨놓고 기다리다가 그들이 도착하자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병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힘을 다하여 항전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으니,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왔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移都漢山)"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 백제가 도읍을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을 알게 한다.

 

 ☆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백제가 신미년(A.D.371)에 도읍을 "한산(漢山)"이 아닌 "북한산(北漢山)"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근초고왕은 옛 위례성으로 부근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백제에는 한산과 북한산이 있었고 온조왕은 한산의 위례성으로부터 한산 남쪽의 남한성으로 옮겼었고, 근초고왕은 다시 남한성으로부터 위례성 북쪽에 위치한 북한산 남쪽의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을 것이다.

 

 이때 근초고왕이 도읍을 옮긴 한성의 구체적인 위치나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또 나라가 도읍을 옮길 때는 그럴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인데, 우리는 아직 그 확실한 이유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백제의 근초고왕은 왜 이때에 이르러, 무슨 이유로 수백년 간 도읍이었던 남한성을 떠나 한성으로 도읍을 옮겨야만 했던 것일까?

 

☆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는 한반도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었다.
  백제의 위례성은 북경 동쪽인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과 진황도 사이를 지나는 난하의 대흑정수고 동쪽 도산 남쪽에 위치했었고, 남한성은 다시 그  하류로 비정되고, 한성은 위례성 부근의 한수 북쪽에 위치했을 것이다. 
   
  
백제의 왕위계승을 보면,
  건국 시조인 온조왕으로부터 7대 사반왕까지는 장자 계승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8대 고이왕은 장자 계통이 아니었다.
  삼국사기에는 고이왕을 4대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연대를 따져보면 그는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 아니라 개루왕의 둘째아들인 구태의 손자로서 나이 어린 7촌 조카인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았다.
  그리고는 그 아들 9대 책계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책계왕은 다시 자신의 아들인 10대 분서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분서왕이 죽은 후에는 그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이 아니라 7대 사반왕의 동생의 아들인 11대 비류왕이 왕위에 오르고, 비류왕이 죽은 후 다시 분서왕의 아들인 12대 계왕이 왕위에 오른다. 그런데 또 계왕이 죽은 후 계왕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비류왕의 아들인 13대 근초고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23대 삼근왕까지 이 근초고왕의 후손으로 왕위가 이어진다.
  물론 삼국사기에는 7대 사반왕을 폐위시키고 8대 고이왕이 왕위에 오른 이유를, 사반이 왕위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처리할 수 없었으므로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은 왕위를 찬탈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11대 비류왕은 고이왕의 혈손이 아니라 초고왕의 혈손이고, 13대 근초고왕 역시 고이왕의 혈손이 아니라 초고왕의 혈손이다.
  이는 이때 백제가 초고왕계와 구태계로 나누어져 왕위다툼을 벌였다는 말이 되는데, 필자는 이를 백제 왕실의 장자파와 차자파 간의 왕위찬탈전이라 부른다.
  그런데 13대 근초고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삼국사기에는 약 20년 간 그의 업적이 기록되지 않고, 21년 조에 "봄3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했다"라고 하면서 근초고왕의 업적이 기록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이때에 이르러 근초고왕의 승리로 왕위찬탈전이 마무리되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 20년 간 12대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과 13대 근초고왕 사이에 왕위 다툼이 내란으로까지 번졌다가 365년경에 이르러 근초고왕이 최종 승리함으로써 무광왕은 지모밀지로 옮겨가게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 무광왕은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에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 절(정사)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바로 그 무광왕을 말하는 것이고, 지모밀지란 지금 한반도 전북 익산 금마 왕궁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때 무광왕이 대륙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찬탈전에서 패배하고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새로 백제를 세웠는데 필자는 이를 반도백제라 부르고, 근초고왕의 백제를 대륙백제라 부른다.

   

 

  그런데 무광왕과의 내란에서 승리한 대륙백제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369년에 보기병 2만을 이끌고 침공해오자 근초고왕은 태자인 수(후일의 근구수왕)를 보내 치양에서 싸워 고구려군 5천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며 승리하게 되고, 371년에 고구려가 다시 침공하자 왕이 직접 패수가에 군사들을 매복 시켰다가 급습하여 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근초고왕은 자신감을 가지게 되어 371년 추수를 마친 후 3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향하여 진군한다.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황성(필자주 : 고구려의 도읍 황성, 평양성, 장안성은 모두 평양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이었지만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고국원왕도 평양성(현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와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다가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게 되고 백제가 승리하게 된다.
  그리하여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남평양과 요서 진평현 지역을 전리품으로 빼앗게 되는데, 이 때의 사실을 양직공도 백제국사 조에는 "百濟舊來夷馬韓之屬 晉末駒麗略有遼東 백제)樂浪亦有遼西晉平縣(백제는 옛날에 왔던 마한의 지속이다. 진나라 말에 구려(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역시 낙랑과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송서와 양서에도 관련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서 말하는 낙랑이란 서기 44년에 후한 광무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전한 낙랑군 땅의 일부인 살수 이남 땅을 탈환하여 설치했다가 313년에 이르러 고구려 미천왕에게 빼앗긴 후한낙랑군 땅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승덕현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요서 진평현의 위치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필자는 북경 서남쪽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근초고왕이 371년에 이르러 도읍을 남한성에서 한성으로 옮기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때 근초고왕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요서를 기반으로 하는 넓어진 강역을 바탕으로 북쪽으로 강역을 넓힐 생각으로 남한성에서 북쪽의 한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의 남한성은 난하 동쪽 지금의 당산시 건창영 부근으로 비정되고, 한성은 그 북쪽 도산 남쪽으로 비정되므로 이때 근초고왕은 북쪽의 맥과 말갈지역으로의 진출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곳 도산(필자주 : 백제의 북한산으로 비정되는 산이다) 남쪽 부근이 아직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는 근초고왕이 옮긴 백제의 도읍 한성(漢城)이었고,
백제는 이곳 한성에서 13대 근초고왕으로부터 21대 개로왕 때까지 105년간 도읍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