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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와 백제의 군사용 깃발은 어떻게 생겼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10. 3. 04:46

윤여동설 - 신라와 백제의 군사용 깃발은 어떻게 생겼을까? - 최초공개

 

 

신라의 군사용 깃발은 반월형(반달모양)이었다

                                     

  신라군의 깃발에 관한 것은 삼국사기 권제40 잡지 제9 관직 하 무관 조에 기록되어 전한다. 

  『금(衿)이란 대개 좌전에서 말하는 소위 깃발표식이다.
  시경에는 이르기를 "깃발 무늬는 새를 그렸다"고 하였고, 그 주해에는 "직(織)은 깃발을 말하는 것이요, 조장(鳥章)이란 새의 문장이다" 하였는 바 장수 이하가 모두 옷에 표식을 붙였던 것이다.
  사기 한서에 기치(旗幟)라 하였으니 치(幟)와 직(織)이 글자는 다르지만 음은 같다.

  주례에 사상의 아홉 가지 깃발에 각각 다른 그림을 그린 것은 그것으로서 깃발을 구별한 것이다.
  나라에서는 그것으로서 조정의 위품을 표하고 군사에서도 그 제도를 본 떠 이를 만든 것이며, 이것을 입혀 나라에 헌신할 준비를 하게 한다.
  신라 사람들의 깃발은 푸르고, 붉은 색깔로서 구분하였는데, 그 모양은 반달(半月)과 같으며, 계는 역시 옷 위에 다는 것인데, 그의 길고 짧은 제도는 미상하다.』
라고 설명하고 있고, 각 부대별 깃발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6정(六停)
  첫째는 대당으로서 진흥왕 5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금(衿: 깃발)의 색깔은 자색과 백색이요,
  둘째는 상주정으로서 진흥왕 13년에 설치하였다가 문무왕 13년에 이르러 귀당으로 고쳤는데, 깃발의 색깔은 청색과 적색이요,
  셋째는 한산정으로서 원래의 신주정이다. 진흥왕 29년에 남천정을 폐지하여 한산정을 설치하였다가 진평왕 26년에 남천정을 폐지하고 한산정을 설치하였는데, 깃발의 색깔은 황색과 청색이요,   
  넷째는 우수정으로서 원래의 비열홀정이다. 문무왕 13년에 비열홀정을 폐지하여 우수정을 설치하였는데, 깃발의 색깔은 녹색과 백색이요,
  다섯째는 하서정으로서 원래의 실직정이다. 태종왕 5년에 실직정을 폐지하여 하서정을 설치하였는데, 깃발의 색깔은 녹색과 백색이요,
  여섯째는 완산정으로서 원래의 하주정이다. 신문왕 5년에 하주정을 폐지하여 완산정을 설치하였는데, 깃발의 색깔은 백색과 자색이다.

 

9서당(九誓幢)
  첫째는 녹금서당으로서 진평왕 5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여 다만 서당으로 부르다가 35년에 녹금서당으로 고쳤는데, 깃발의 색깔은 녹색과 자색이요,
  둘째는 자금서당으로서 진평왕 47년에 처음으로 낭당을 설치하였다가 문무왕 17년에 자금서당으로 고쳤는데, 깃발의 색깔은 자색과 녹색이요,
  셋째는 백금서당으로서 문무왕 12년에 백제 사람으로서 당을 삼았는데, 깃발의 색깔은 백색과 청색이요,
  넷째는 비금서당으로서 문무왕 12년에 처음으로 장창당을 설치하였다가 효소왕 2년에 비금서당으로 개칭한 것이요,
  다섯째는 황금서당으로서 신문왕 3년에 고구려 사람으로 당을 삼았는데, 깃발의 색깔은 황색과 적색이요,
  여섯째는 흑금서당으로서 신문왕 3년에 말갈국 사람으로서 당을 삼았는데, 깃발의 색깔은 흑색과 적색이요,
  일곱째는 벽금서당으로서 신문왕 6년에 보덕성 사람으로 당을 삼았는데, 깃발의 색깔은 벽색과 황색이요,
  여덟째는 적금서당으로서 신문왕 6년에 역시 보덕성 사람으로 당을 삼았는데, 깃발의 색깔은 적색과 흑색이요,
  아홉째는 청금서당으로서 신문왕 7년에 백제의 남은 백성으로 당을 삼았는데, 깃발의 색깔은 청색과 백색이다.

 

10정(十停 혹은 삼천당이라고도 한다)
  첫째는 읍리화정이요, 둘째는 고량부리정이요, 셋째는 거사물정이니 깃발의 색깔은 청색이요,
  넷째는 삼량화정이요, 다섯째는 소삼정이요, 여섯째는 미다부리정이니 깃발의 색깔은 흑색이요,
  일곱째는 남천정이요, 여덟째는 골내근정이니 깃발의 색깔은 황색이요,
  아홉째는 벌력천정이요, 열째는 이화혜정이니 깃발의 색깔은 녹색인바 모두 진흥왕 5년에 설치하였다.      

 

5주서(五州誓)
  첫째는 청주서요, 둘째는 완산서요, 셋째는 한산주서이니 깃발의 색깔은 자색과 녹색이요,
  넷째는 우수주서요, 다섯째는 하서주서니 깃발의 색깔은 녹색과 자색인바 모두 문무왕 12년에 설치하였다.

 

3무당(三武幢)
  첫째는 백금무당이니 문무왕 15년에 설치하였으며, 둘째는 적금무당이니 신문왕 7년에 설치하였으며, 셋째는 황금무당이니 신문왕 9년에 설치하였다.

 

계금당( 衿幢)
  태종왕 원년에 설치하였고 깃발은 모직으로 하였다.

 

급당(急幢)
  진평왕 27년에 설치하였고 깃발의 색깔은 황색과 녹색이다.

 

사천당(四千幢)
  진평왕 13년에 설치하였고 깃발의 색깔은 황색과 흑색이다.

 

경5종당(京五種幢)
  깃발의 색깔은 첫째는 청색과 녹색이요, 둘째는 적색과 자색이요, 셋째는 황색과 백색이요, 넷째는 백색과 흑색이요, 다섯째는 흑색과 청색이다.

 

2절말당(二節末幢)의
   깃발의 색깔은 첫째는 녹색과 자색이요, 둘째는 자색과 녹색이다.

 

만보당(萬步幢)
  아홉주의 깃발의 색깔이 각각 두 가지 씩인 바,
  사벌주는 청황색과 청자색이요,
  삽량주는 청적색과 적백색이요,
  청주는 적황색과 적록색이요,
  한산주는 황흑색과 황록색이요,
  우수주는 흑록색과 흑백색이요,
  웅천주는 황자색과 황청색이요,
  하서주는 청흑색과 청적색이요,
  무진주는 백적색과 백황색이다.
 
대장척당(大匠尺幢)
  깃발이 없다.

 

군사당(軍師幢)
  진평왕 26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깃발의 색깔은 백색이다.

 

중당(仲幢)
  문무왕 11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깃발의 색깔은 백색이다.

 

백관당(百官幢)
  깃발이 없다.

 

4설당(四設幢)
  첫째는 활당이요, 둘째는 운제당이요, 셋째는 충차당이요, 넷째는 투석당인데 깃발이 없다.

 

개지극당(皆知戟幢)
  신문왕 10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깃발의 색깔은 흑색과 적색과 백색이다.

 

39여갑당(三十九餘甲幢)
  깃발이 없다.[소위 경여갑, 소경여갑, 외여갑 등을 말하나 그 수는 미상하다]

 

구칠당(仇七幢)
  문무왕 16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깃발의 색깔은 백색이다.

 

2계당[二 幢 혹은 외계라 한다]
  첫째는 한산주계당이니 태종왕 17년에 설치하였으며, 둘째는 우수주계당이니 문무왕 12년에 설치하였고 깃발은 모두 모직으로 한다.

 

2궁(二弓 혹은 외궁이라 한다)
  첫째는 한산주궁척이니 진덕왕 6년에 설치하였으며, 둘째는 하서주궁척이니 진평왕 20년에 설치하였고 깃발이 없다.

 

3변수당(三邊守幢 일명 변수라고 한다)
  신문왕 10년에 설치하였는 바 첫째는 한산변이요, 둘째는 우수변이요, 셋째는 하서변인데 깃발이 없다.

 

신삼천당(新三千幢 일명 외삼천이라고도 한다)
  첫째는 우수주삼천당이요, 둘째는 나토군삼천당이니 문무왕 12년에 설치하였으며, 셋째는 나생군삼천당이니 문무왕 16년에 설치하였고, 깃발의 색깔은 미상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부대마다 깃발의 색깔을 달리하여 멀리서 보아도 부대를 구분할 수 있도록 했음을 알 수 있고, 또 
 

  『화(花)란 맹수의 가죽이나 독수리의 깃으로 만들어 가지고 깃대 위에 매다는 것인데, 소위 표범의 꼬리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서 지금 사람들이 소위 "면창장군화(面槍將軍花)"라고 말하고는 있으나 그 물건의 이름은 말하지 못하며 그 수도 어떤 것은 많고, 어떤 것은 적으니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방울(鈴)은 길을 갈 때에 짐 실은 말에 다는 것인데 더러는 탁(鐸)이라고도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지휘관용 깃발이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라에 아래와 같은 지휘관용 깃발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지금도 군인 장군을 상징하는 장군기(將軍旗)가 따로 있다.

   

 
『장군화(將軍花)
대장군화(大將軍花)는 세쪽인데 길이가 아홉치요 넓이가 세치 세푼이며,
상장군화(上將軍花)는 네쪽인데 길이가 아홉치 오푼이며,
하장군화(下將軍花)는 다섯쪽인데 길이가 한자이며,
대감화(大監花)는 큰 범의 얼굴가죽인데 길이가 아홉치요 넓이가 두치 오푼이고, 방울은 황금인데 둘레가 한자 두치이며,
제감화(弟監花)는 곰의 얼굴 가죽인데 길이가 여덟치 오푼이요 방울은 백은인데 둘레가 아홉치이며,
소감화(少監花)는 독수리 꼬리요 방울은 백동인데 둘레가 여섯치이며,
화척화(火尺花)는 소감과 같고 방울은 철인데 둘레가 두치이며,
군사당주화(軍師幢主花)는 큰 범의 꼬리인데 길이가 한자 여덟치이며,
군사감화(軍師監花)는 곰의 가슴 가죽인데 길이가 여덟치 오푼이며,
대장척당주화(大匠尺幢主花)는 곰의 다리 가죽인데 길이가 일곱치요[일명 중범의 얼굴 가죽인데 길이가 여덟치 오푼이라고도 한다] 방울은 황금인데 둘레가 아홉치이며,
삼천당주화(三千幢主花)는 큰 범의 꼬리인데 길이가 한자 여덟치이며,
삼천감화(三千監花)는 독수리 꼬리이며, 금을 단 모든 당주화는 큰 범의 꼬리인데 길이가 한자 여덟치 오푼이다.』
   위 글을 검토해 볼 때 신라군의 깃발은, 삼각형 또는 사각형 형태가 아니라, 깃발 자체가 "반달모양(半月形)"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색깔로서 구분이 가능하도록 하였으며, 깃발의 문양으로 새를 그려 넣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백제왕의 직할군대 깃발은 황색이었다

 

 

백제에서 어떠한 형태나 문양의 군사용 깃발을 사용했는지는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현재로서는 정확한 고증은 어렵다.
  다만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4년(A.D.369) 조에,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는데 깃발은 모두 황색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군 중에서도 왕의 직할군대는 여러 가지 색깔의 깃발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황색(黃色) 한가지 색깔의 깃발에 부대성격에 따라 문양이나 크기를 달리하여 각각의 부대를 구분했다고 보여진다.
  왕의 직할군대가 황색의 깃발을 사용했다는 것은 황색이 중앙을 나타내는 색깔이기 때문일 것이라 여겨진다.
  다만 왕의 직할군대가 중앙을 의미하는 누런색(황색)을 사용했다면 백제의 동부지역방어를 담당하는 군대는 푸른색(청색), 서부지역을 담당하는 군대는 흰색(백색), 남부지역을 담당하는 군대는 붉은색(적색), 북부지역을 담당하는 군대는 검은색(감색)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삼국사기나 중국 사서들에 백제는 원래 부여에서 고구려와 함께 나왔다고 하였고, 삼국지와 후한서 부여전을 보면, 부여에서는 관명을 마가·우가·저가·구가 등 여섯 가지 가축이름을 따서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후예인 백제에서도 가축 또는 동물을 깃발의 문양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해볼 수는 있겠으나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확실히는 알 수 없다.

 

 

고구려 중앙군의 깃발은 붉은색이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도 색깔 있는 군사용 깃발을 사용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들어 있는데, 기록을 보면, 백제본기 14대 근구수왕 원년(A.D.375) 조에, 369년 9월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2만의 군사로서 백제를 침공했을 때 원래 백제사람으로서 백제에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가 살던 사기라는 사람이 돌아와서 알려주기를 , "고구려의 군사가 비록 그 숫자는 많으나 모두 가짜군사로서 수를 채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 중 제일 강한 부대는 오직 붉은 깃발을 든 부대뿐이니 만일 그것을 먼저 쳐부순다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와해될 것입니다" 라고 하여 근구수왕이 태자시절에 그 말에 따라 붉은 깃발을 든 고구려 부대를 집중공격하여 대승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고구려에서는 중앙 정규군이 붉은 깃발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