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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문주왕이 옮긴 도읍 웅진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노룡현을 말하는 것이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10. 6. 00:03

윤여동설 - 백제의 문주왕이 옮긴 도읍 웅진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노룡현을 말하는 것이다 - 최초공개

 

     [백제 웅진성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노룡 영평부성도] 

 

[서문]

 

[남문]

 

 

[진황도 노룡현 영평부성터 내의 시가지(중앙)와 서쪽을 지나는 청룡하] 

 

 

 

  고구려의 장수왕은 475년(백제 21대 개로왕 21년)에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도읍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도망치는 개로왕을 잡아죽이게 된다.
  그리하여 개로왕의 동복동생인 문주왕이 왕위에 올라 급히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우리는 이 백제의 도읍 웅진을 충남 공주라고 알고 있다.


 

☆ 삼국사기에는 문주왕을 개로왕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개로왕의 동복동생이다. 개로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문주왕이 왕위를 이었다.

 

 

 

우리는 지금 한반도의 충남 공주에서 백제 25대 무령왕릉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충남 공주가 옛 백제의 웅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나 사실 공주는 삼국사기 기록 속 백제의 웅진(熊津)이 아니다.
  백제의 한성(漢城)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에 있는 도산의 남쪽으로 비정되는데,  그  한성이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고 하여 그곳으로부터 발해와 황해를 건너 한반도의 공주로 도읍을 옮겼을 리는 없을 것이고, 이때 문주왕은 도산 남쪽의 한성을 떠나 그 남쪽 가까이에 위치한 웅진으로 급히 도읍을 옮겼을 것인데, 지금의 진황도 노룡으로 비정된다.       
  웅진은 웅천이라는 강 옆에 위치했을 것이므로 웅진이라 했을 것인데,  웅천(熊川)은 지금의 청룡하를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에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리고, 나라의 강역을 획정했는데, 북쪽으로는 패하(패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까지로 하고............"라고 했던 그 웅천이 바로 지금의 청룡하인 것이다.  

 

  후세 소정방은 백제의 사비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지금의 산동반도에서 수군을 이끌고 발해를 서북쪽으로 가로질러 건너 백강을 타고 올라와 기벌포에서 신라군과 합류하여 당시 백제의 도읍이었던 사비성(사자성이라고도 한다)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기록을 보면 옛날 소정방이 군사들을 기벌포에 상륙시킬 때 발이 푹푹 빠지기 때문에 갯펄에 버드나무로 엮은 자리를 깔고 상륙시켜야 했다고 하는데, 발해만 부근 바닷가의 갯펄을 통과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의 난하 하류가 옛 백강이었을 것이고, 그 강을 타고 올라오면 사비성과 웅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데, 사비는 지금의 난현(난주), 웅진은 지금의 진황도 노룡이다.  

 

☆ 백제의 백강(백촌강이라고도 한다)은 지금의 난하하류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제는 웅진에 도읍한 시기인 동성왕 때 북위와의 두 차례 대규모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는 백제가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북위는 두 번에 걸쳐 백제를 대규모로 침공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차 침입은 488년이었는데, 이때 동성왕은 저근, 부여고(扶餘古), 부여력, 부여고(扶餘固) 등 네 장군을 보내 북위와의 전투에서 대승하였고, 특히 490년의 2차 침입은 북위가 수십만의 기병으로서 백제를 침공해 왔으나 백제가 그를 물리쳐 역시 대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백제가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다.
  남제서 백제국 전을 보면,
  "이해에(A.D.490) 위(북위)나라 오랑캐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역으로 쳐들어가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북위의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쳐부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동성왕은 495년에 남제에 사신을 보내 북위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음을 국서로서 알렸는데, 그를 보면, "지난 경오년(A.D.490)에는 험윤(북위)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이 침입했으나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하게 하여 한밤중의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북위)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쓸려가듯 붕괴되었습니다. 그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라고 기록하고는 공을 세운 사법명 등에게 관작을 내려 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데, 남제에서 실제 있지도 않았던 일을 억지로 꾸며 사서에 기록하여 전했을 리가 없을 것이니 이 일은 실제 발생했던 일을 기록한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당시의 북위는 지금의 산서성을 중심으로 황하 이북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고, 우리는 백제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역사를 이해한다. 그렇다면 북위가 어떻게 수십만 기병을 이끌고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고 있었을 백제를 침공할 수 있었을까?
  그리하여 어느 사람은 북위의 수십만 기병이 말을 타고 고구려 땅을 가로질러 백제를 침공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느 사람은 고구려가 수십만의 북위 기병이 고구려 땅을 가로질러 가게 했을 리 만무하므로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백제를 침공했을 것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북위가 황해를 건너려면 수십만 기병과 수십만 마리의 말을 실어 나를 수만 척의 배가 필요하고 또 전투에 필요한 무기류, 식량, 식수, 말먹이 등도 배에 싣고 와야 하고, 만약 황해바다를 건널 때 갑자기 태풍이라도 부는 날에는 수십만의 군사가 물귀신이 될 각오를 해야하고, 나라가 망할 각오까지도 해야한다.
  북위가 바보가 아니라면 이러한 무모한 작전을 펼쳤을 리가 없고, 백제가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대륙의 북위와 멀리 떨어져 있는 한반도의 백제가 이해가 충돌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백제와 북위가 수십만 명씩을 동원하여 전쟁을 했다면 이때 백제와 북위가 육지로서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는 한 이러한 전쟁은 일어날 수 없다.
  즉 백제가 대륙에 위치하지 않는 한 북위와 대규모의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때 백제는 하북성 난하부근에 도읍하고 북경(요동)을 지나 요수(현 영정하)를 건너 요서까지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 서쪽 산서성 대동 부근에 도읍하고 있었을 북위와 백제는 국경 문제로 부딪치게 되었을 것이고, 급기야 북위는 수십만의 기병을 동원하여 백제를 선제 공격했던 것이나 참패를 당하게 되고 얼마 후 북위는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를 해석하면 너무도 명쾌하여 논란의 여지가 없게 된다.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는 한반도가 아닌 지금 중국의 도읍인 북경 동쪽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백제와 북위와의 전쟁은 지금의 북경 부근에서 일어났던 일이었고, 백제의 도읍 웅진은 그 동쪽 난하 부근을 말하는 것이었다.
  옛 사서들은 백제가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나 우리 스스로가 대륙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기록인 삼국사기를 한반도로 가져와 한반도의 지형에 맞추어 역사를 해석하려 했으니 지금까지도 위례성을 찾을 수 없었고, 한성도 찾을 수 없었으며, 기벌포를 찾을 수 없었고, 탄현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 속의 대륙백제는 북경 동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중, 하류 일원이 중심강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