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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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금성)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가 확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0. 16. 07:49

윤여동설 -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금성)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가 확실 - 최초주장

 

 

 

 

 

 

 

  삼국유사 기이 제1 진한 조에는,
  "신라 전성기에는 서울(서라벌)에 178,936호, 1,360방, 55개 리(里), 35개의 금입택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호당 평균 5명의 식구가 있었다고 가정할 때 당시 신라의 도읍 서라벌의 인구가 894,680명(178,936호X5명) 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어느 사람은 지금도 경주시내와 주변 면소재지까지를 포함한 경주시에 30만(275,659명 : 2008년 6월 30일 기준)이 안 되는 인구가 살고 있는데, 어떻게 1천여 년 전에 지금 경상북도 경주에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고, 어느 사람은 경주 주변에 넓게 흩어져 살았을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삼국지 한(韓)전을 보면,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했고, 남쪽은 왜와 접했다. 땅이 방 4천리이다. 삼종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며, 셋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 한 전에는,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고,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했다. 변진(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했다. 모두 78국이며 백제는 그 중의 한 개 나라이다. 큰 나라는 1만여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인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한다. 그 땅을 합하면 사방 4천여 리이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하는데 모두 옛 진국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백제가 마한 땅에서 건국되었고, 신라가 진한 땅에서 건국되었으며, 가야가 변한 땅에서 건국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들 나라가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도 알고 있다.
  그런데 약 2천년 전의 한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 같이 조그만 나라가 아니라 방 4천여 리에 달하는 광대한 강역을 가진 큰 나라였고, 인구도 한 개 나라에 평균 5천호 정도로 계산하면 총 40만호 정도에 200만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나라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반도 남부에 이 기록을 적용해서는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한반도는 전체를 다 한다고 해도 방 4천리가 되지 않고 더구나 삼한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는 한반도 남부는 겨우 방 1천리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옛날이라 하더라도 한이 방 1천리에 지나지 않는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방 4천리에 이르는 강역을 가진 커다란 나라였다고 기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후한서나 삼국지에는 진한을 설명하면서 " 옛날 진(秦)나라 사람들이 고역을 피하여 한국으로 도망하여 오자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분할하여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진(秦)나라는 진시황의 진나라를 말하는 것인데, 장성을 쌓느라 백성들을 매우 혹사시켰으므로 진나라 백성들은 마음 편히 생업에 종사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진나라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진나라를 떠나 주변국으로 도망쳐야 했는데, 우리는 이 기록을 지금까지 중국 대륙을 떠난 진나라 사람들이 배를 타고 서해(황해)를 동쪽으로 건너 한반도의 마한으로 오자 마한왕이 그들을 동쪽 땅인 지금의 경주부근에 살도록 조치했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옛날 진나라 사람들이 과연 서해바다를 건너 한반도로 건너 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금이야 서해바다를 건너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옛날 돛단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동쪽으로 직접 건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연안항로를 따라 발해를 돌아 요동반도에 도착한 후 다시 남하하여 한반도 남쪽으로 오거나 산동반도에서 북쪽으로 묘도군도를 따라 목숨걸고 발해해협을 건너 요동반도로 건너온 후 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멀고먼 길이다.
  가난해 먹고살기도 힘들어 살길을 찾아 진나라를 떠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배를 만들거나 살 수 있었을 것이며, 쉽게 도망칠 수 있는 육지로 연결된 가까운 나라들을 제쳐놓고 온 가족이 목숨을 걸고 파도가 넘실거리는 대해를 건너 멀고먼 한반도 남쪽까지 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수서와 북사 그리고 신·구당서에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듯이 북한 평양 부근이 낙랑군이 아니라 만리장성이 시작된 그 부근에 낙랑군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옛 사서들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 상식으로 신라가 한반도 경주가 아닌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미친 사람 취급받기 딱 십상이지만 옛 중국 사서들이라는 것들이 대개 중국 황제들의 명을 받아 당시 내노라 하는 학자들이 모여 명예를 걸고 심혈을 기울여 만든 책들이다. 거짓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송하기만 한 우리 역사를 찾아내기 위해 그 중국사서의 기록들을 일단 믿어보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속는 셈치고 일단 우리의 신라가 만리장성 부근에 위치했다고 믿어보자.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 시조 온조왕은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말하고 있고, 신라 5대 왕인 파사이사금은 "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있고, 신라의 남쪽에 가야가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마한왕은 마한의 동북쪽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후한서와 삼국지에는 마한은 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진한은 동쪽에, 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금주 부근이 진한이며, 신라가 위치했다고 본다면, 그 남서쪽인 흥성, 수중 부근에 가야가 위치했으며, 그 서쪽인 하북성 진황도 일원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며, 진황도의 서남쪽인 당산 부근에 마한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며, 그 북쪽인 승덕시, 장가구 부근에 고구려가 위치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송하기만 한 우리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한 비밀통로였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그 기록들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고, 잃어버린 우리의 옛 땅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이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신라의 서라벌, 금성은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한반도의 경주는 신라의 서라벌, 금성이 아니고, 김해에 가야는 없었으며, 강원도 강릉에 예국은 없었고, 익산의 금마는 마한의 월지국(목지국이라고도 한다)이 아니며, 백제의 건국지는 한반도의 서울 부근이 아니며,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은  환인의 오녀산산성이 아니다.
  대방은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고대의 왜국은 발해 건너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신라의 천년 도읍 서라벌, 금성은 지금은 중국 땅이 되어버린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