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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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논쟁 - 신라가 양자강 부근에서 건국되었다는 주장은 순 엉터리 거짓말

윤여동 2008. 10. 20. 00:31

박창범은 신라가 양자강 부근에서 건국되었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박창범은 이 시대 최고로 멋진 책이름인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김영사)"의 저자이다.
  그는 천문학자로서 삼국사기 등에 나타나는 삼국의 일식 기록을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곳 즉 일식최적관측지가 어디인가를 처음으로 밝힌 사람이다.
  저자는 처음에는 고조선시대의 천문현상을 분석하여 고조선의 위치를 찾아보려 하다가 그것이 기록의 부정확성으로 여의치 않자 컴퓨터 프로그램의 정확성을 확인해 보고자 하는 차원에서 삼국사기 속의 일식기록 관측지가 정말로 한반도로 나타나는지를 확인해 보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이때 박창범은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이 한반도에 위치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 생각하고 당연히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최적관측지가 한반도로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일반적인 역사상식과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잘못되었나? 라고도 생각했을 것이고, 삼국사기 일식기록이 중국 사서들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여러 실험과 검토 끝에 결국 결론을 도출하고는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55쪽과 56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게 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일식 모두를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지구상 위치는 발해만 유역이다. 그리고 서기 2∼3세기에 주로 나오는 고구려의 일식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는 만주와 몽고에 이르는 백제보다 북위도 지역이었다. 신라의 일식기록은 서기 201년 이전과 787년 이후로 양분되어 있다. 그중 서기 201년 이전 상대신라의 일식 최적 관측지는 양자강 유역으로 나타났다. 서기 787년 이후에 나오는 하대신라에선 한반도 남부가 최적관측지로 밝혀졌다. 즉 삼국사기에는 신라 초기에는 남쪽으로 지나가는 일식이 주로 기록되어 있고, 고구려에서는 북쪽으로 지나가는 일식이, 백제에는 그 사이로 지나가는 일식들이 기록되어 있다."라고..........
  그런데 필자가 생각하기에 박창범이 말한 "일식최적관측지"의 의미가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이해한다면, 삼국의 개기일식만을 관찰할 수 있는 최적관측지를 부각시켜 언급함으로써 사람들이 최적관측지가 곧 삼국의 중심강역으로 오해하도록 만든 것은 설명이 부족했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삼국에서는 육안으로 관찰이 가능한 부분일식도 관측이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은 개기일식과 부분일식 모두를 관찰할 수 있는 넓은 범위 안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범위를 넓혀 결론지었어야 타당한 주장이었을 것이다. 
  개기일식을 관측할 수 있는 일식최적관측지는 물론 최소한 태양의 일부가 가려지는 부분일식 중 육안으로 충분히 관측이 가능했을 최적관측지의 바로 외곽지역까지는 포함시켜 삼국의 위치를 찾아야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볼 경우 고구려의 일식관측지는 발해 북쪽 하북성 북부, 내몽골, 대흥안령산맥 일원이고, 백제의 일식관측지는 지금의 중국 북경을 중심으로 한 중국 북부지역 일원이라 할 수 있으며, 신라 상대는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해연안까지가 육안으로 일식을 관측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되고, 신라하대 역시 한반도 남쪽지역을 중심으로 발해까지가 육안으로 일식을 관측할 수 있는 가능지역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신라의 도읍이 위치하고 있었던 신라의 중심 강역이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錦州) 일원이고, 백제의 중심 강역은 진황도,당산 일원이며, 고구려초기의 중심 강역은 북경 북쪽지역으로 보고 있다.
  특히 우리가 한반도 경주부근에 위치했을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신라가 한반도 경주 부근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중국 요녕성 금주(錦州) 일원에 위치했었다고 하는 것은 중국 사서들이 한결같이 "신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고,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되었다"라고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 부근에는 지금까지도 고려성으로 불리우는 성들이 여럿 있는데, 이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로 이어지면서 사람들에게 고려시대 성으로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백제가 한반도가 아닌 북경 동쪽 당산, 진황도 부근에서 건국되었다고 하는 것은 요서 진평현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기록들이 있고, 동성왕 때 북위의 수십만 기병과 백제가 전투를 하여 백제가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들이 전하기 때문이며, 삼국사기에도 백제 초기에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부근지역(낙랑동부도위 지역으로 비정된다)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고, 백제는 그 서쪽인 하북성 진황도, 당산 일원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한 것이며,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의 북쪽지역에 위치했을 것이다.

 

☆ 대륙의 신라와 백제, 고구려는 아주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세 나라의 일식최적관측지가 발해연안과 양자강 부근, 내몽골 등으로  멀리 떨어져 나타났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고 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났는지 의문으로 남는다. 혹시 이때 신라는 천문관측 기술이 발달하여 부분일식까지를 관측해 기록했고, 백제와 고구려는 개기일식만을 기록했을까?  

 

  그런데 재야의 일부 역사 연구자들은 박창범의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는 서기 201년 이전의 상대신라가 중국 양자강 부근에 위치했었고, 백제가 중국의 동중국해안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있었으며 고구려가 그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음이 천문기록으로 밝혀졌다는 말들을 하고 있다.
  그리고는 통일왕조인 진나라나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를 아주 조그만 나라였다고 하기도 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장안성이라고도 불렀다는 중국사서의 기록들을 확대 해석하고는 평원왕이 옮긴 고구려의 도읍 장안성이 당나라의 도읍이었던 장안성(현 섬서성 서안)을 빼앗아 도읍했다고 터무니없는 말들을 유포시키기도 하며, 우리 삼국의 옛 지명과 동일한 지명이 지금의 중국에 많이 있다고 하여 지금의 중국지명과 삼국사기 기록 속의 지명을 동일한 곳으로 보고 역사를 해석하려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옛 기록 속의 석문이라는 지명이 지금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아마 중국 전역에는 석문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는 곳이 적어도 수십, 수백 군데 될 것이다.바위가 좀 있고, 그곳 사이로 길이 나 있으면 중국 사람들은 그곳에 석문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몇개 지명을 제외하고는 현재의 중국 지명을 그대로 역사 속의 지명으로 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아 그 남쪽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침공하면서 수군은 당시 제나라 땅이었던 지금의 산동반도에서 출발하여 발해를 건너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는 바로 그 땅을 나누어 한사군을 설치했었으며,
  수 양제는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지금의 북경 서남쪽 가까운 탁군(현 하북성 보정시 탁주)에서 육군을 출발시켰고 수군은 역시 산동반도에서 출발시켰다.
  당 태종 역시 고구려를 침공할 때 육군은 북경 서남쪽의 정주(현 하북성 보정시 정주)에서 출발하여 요수(지금의 영정하로 비정된다)를 건너 요동(북경으로 비정된다)을 경유하여 압록강(백하,밀운수고로 비정된다)까지 진군했었으며 수군은 산동반도에서 출발했었다.
  그리고 당 고종 때도 백제를 침공하면서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수군이 지금의 산동반도에서 출발했었다.

  
☆ 진시황이 쌓은 장성의 동단이 북경 서쪽 태행산맥을 넘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옛 요동은 지금의 요하 동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정하 동쪽인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산동반도가 이미 옛날부터 중국의 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땅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신라와 백제가 산동반도의 훨씬 남쪽 지역에 위치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 대공탑비를 보면,     
  "선사의 법휘는 혜소(慧昭)이며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그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山東)의 고관이었다.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다가 고구려에서 많이 죽자 항복하여 변방의 백성이 되려는 자가 있었는데 성스러운 당나라가 4군을 차지함에 이르러 지금 전주의 금마(당산시 풍윤으로 비정된다) 사람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는 신라를 떠나 중국 당나라의 창주(滄州)로 건너가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창주는 지금도 옛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천진 남쪽의 창주시를 말하는 것으로서 산동반도와 가까운 곳이다. 그곳이 중국 땅이었고 당나라 사람들이 살았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이때 진감선사는 옛 백제 땅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당산, 진황도 부근에서 태어나 자라 서남쪽으로 발해만을 건너 그리 멀지 않은 중국의 창주에 이르렀던 것이지, 한반도 전라북도에서 서북쪽으로 서해바다를 건너 발해연안의 중국 창주로 갔던 것이 아니다. 이를 보면 이때 당나라와 통일신라의 국경은 지금의 영정하와 해하였거나 조백하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필자가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가 출간된 2002년 말에 바로 그 책을 읽고 박창범 교수에게 이 메일로 질문을 했더니 아래와 같은 답장이 왔었다.
 

『윤 선생님께
보내주신 편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늘 일이 밀려서 답신도 늦고 제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고 해서 결례를 했습니다.
편지 내용을 보니 역사 분야에 나름의 연구를 하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많은 재야사학자들께서 요새 글을 보내오시는데 모두 다 조금씩 의견이 다르고, 저의 일식 관측지와도 조금씩 다릅니다.
우선 저는 일식관측지가 삼국 강역의 위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책의 본문에 쓴 대로가 제 생각입니다.
(책 뒷표지와 신문서평의 글은 모두 출판사나 기자들의 과장된 표현입니다. 책 뒷표지는 2쇄부터 수정이 됩니다)
삼국과 주변국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신 듯 합니다.
제가 그 연구에 대해 무어라 말씀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은 기존 사학계의 역사내용과 매우 다른 결론을 가지신 재야 사학자 분들께서 서로 간의 의견 차를 좁힐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늘 왜 재야사학자들은 서로 의견이 또 다른가 하고 궁금했습니다.
경황이 없어 이만 줄이겠습니다.
하시는 연구가 마무리되어 조만간 다시 소식을 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박창범 드림』

  위 답장의 요지는 박창범 자신은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에서 삼국이 중국 대륙에 위치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삼국사기 기록에 나타나는 일식(개기일식)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최적관측지가 그곳이라고 말했을 뿐이라는 이야기이고, 실제 박창범은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이 중국 대륙에 위치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천문학자로서 역사학자들의 영역인 삼국의 위치까지를 새로 비정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그 문제의 해결을 역사학자들에게 넘겼다.
  사실이 그러하기는 하지만 그의 글 속에는 삼국의 위치에 대한 강한 의문이 군데군데 남겨져 있다. "일식기록을 통해 파악한 관측 위치와 삼국의 위치와의 관계에 대해 굳이 나의 입장을 이야기한다면, 나는 한 나라의 역사서에 수록된 일식 관측지가 그 나라의 강역일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한다. 상식적으로 천체관측과 같은 중요한 일은 그 나라의 수도에서 이뤄지는 것이 가장 타당하기 때문이다." 라는 글은 그가 우리 삼국의 위치가 중국 대륙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입장이 아니라서 말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삼국의 위치를 다시 비정해보아야 한다고 촉구하는 내용인데, 그는 또 이어 "사서에 기록된 최적일식관측지가 그 나라의 위치가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글도 함께 남겨 놓았는데, 이는 곧 자신은 천문학자로서 삼국의 위치에 대한 논란의 중심에서 비켜 서기 위한 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박창범이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북경 동쪽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에 위치했었음을 미리 이해하고 삼국사기 기록에 나타나는 일식 기록의 관측위치를 찾으려 하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역사의 진실에 가까우면서 흥미있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하북성 당산, 진황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백제에서 개기일식이 관측되었다면, 이때 요녕성 호로도, 금주(錦州) 부근에 위치했을 신라에서는 어느 정도의 부분일식을 관측했을 것이라던지, 이때 북경 북쪽 연경(延慶) 부근에 위치했을 고구려의 국내성에서도 그 일식을 관측했을 수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헛일하는 셈치고 필자가 주장하는 삼국의 위치를 염두에 두고 삼국의 일식최적관측지와 부분일식도 관측이 가능했을 그 외곽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 중에서 삼국이 공통으로 관측이 가능했을 일식관측지를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 삼국은 한반도에서 건국된 것이 아니었고, 고려 역시 한반도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북경 부근 만리장성 북쪽을 아주 넓게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고, 백제는 하북성 당산,진황도 부근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나라였으며, 신라는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부근을 중심으로 일어나 당나라를 끌어들여 서쪽의 백제와 북쪽의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백제 땅과 고구려 땅 남쪽 일부를 차지했다가 그 땅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바치게 되어 그 땅은 고려가 되었다.
  그리고 북쪽 대흥안령산맥 부근의 옛 고구려 땅은 발해가 차지했다가 요·금·원·청이 흥기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고, 남쪽의 고려 땅은 다시 조선 태조 이성계가 그 땅을 차지했으나 도읍을 대륙의 개경에서 한반도의 한양으로 옮김으로서 대륙의 드넓은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고, 결국 명나라, 청나라가 우리의 대륙 옛 땅을 포함한 중국대륙 모두를 차지했다가 멸망하게 되고, 지금의 중화민국이 청나라의 강역을 그대로 물려받게 됨으로써 우리의 옛 땅이 졸지에 중국의 소유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의 선조들은 지금의 북경 동쪽 난하를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고 주변의 넓은 대륙의 땅을 차지하고 살았었고, 따라서 그 땅은 우리의 옛 땅인 것이다.

 

☆ 난하 중 반가구수고 북쪽은 고구려의 패수였다.

 

  지금 당장 그 땅을 되찾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최소한 우리의 옛 땅이 어디에 있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우리의 옛 땅이 어디까지였는지도 모르고 있고, 그 땅의 위치를 알려줘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옛 땅이 어디였는지를 모른다면 머지 않은 훗날 그 우리의 옛 땅을 다시 되찾을 기회가 온다고 해도 그 기회를 살리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의 마음이 급하고 안타까운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