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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궁예왕의 나라 태봉국 - 사라진 흔적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1. 26. 23:37

윤여동설 - 사라진 흔적 궁예왕의 나라 태봉국 - 최초주장

 

 

 

[궁예의 도읍 철원 풍천원으로 비정되는 하북성 평천] 


  삼국사기 열전 궁예 전을 보면,
  "궁예는 신라 사람이니 성은 김씨요, 아버지는 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다. 혹자는 궁예가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궁예가 신라 왕자 신분이었음을 밝히고 있으나 그의 아버지가 헌안왕인지 경문왕인지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 말기에는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정정이 매우 불안한 시기였다.

  앞서 난을 일으켜 43대 희강왕을 죽게 하고 왕위에 오른 44대 민애왕을 김양, 장보고 등이 합심하여 제거하고 45대 신무왕을 세웠으나 재위 6개월만에 등창이 나서 죽고, 태자인 경응이 왕위에 오르는데 이가 46대 문성왕이다.

  그리하여 문성왕은 왕위에 오르자 그 아버지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는데 공이 많았던 청해진(현 중국 천진시 부근으로 비정된다) 대사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맞아들이려고 했으나 조정대신들이 '궁복은 섬사람인데 어찌 그의 딸을 왕실의 배필로 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반대하여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자 이에 불만을 품은 장보고가 반역을 도모하게 되었고, 결국 장보고는 제거되고, 청해진이 없어지게 되는 혼란한 와중에 문성왕은 아버지 신무왕의 이복 동생이며 자신의 숙부인 김의정을 상대등에 임명하게 된다.
  그런데 그 몇 년 후 태자가 요절하게 되고, 왕 역시 전염병에 걸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문성왕은 자신의 숙부이며, 상대등인 의정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게 되어 김의정이 왕위에 오르는데 이가 곧 47대 헌안왕이다.
  삼국사기 헌안왕 5년(A.D.861) 조를 보면,
  "봄 정월 왕이 병으로 누워 위독하매 측근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불행히도 아들이 없이 딸만 두었다...... 사위 응렴은 나이가 비록 어리나 덕이 있으니 그대들이 임금으로 모셔 섬긴다면 반드시 조종의 훌륭한 후계를 잃지 않을 것이요, 내가 죽더라도 또한 마음이 놓일 것이다' 하였다.
  이 달 (서기 861년 정월) 29일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헌안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사지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궁예열전을 보면,
  "궁예가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 때에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 빛이 비추어 위로 하늘에 닿았다.
  일관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중오에 태어났고, 태어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 이상한 빛이 비추었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 까 염려되므로 기르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다. 왕이 궁중의 사자를 시켜 그 아이를 죽여 버리라 하였다. 사자가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 다락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가 그 아이를 몰래 받다가 손으로 눈을 찔러 한 눈이 멀었다. 유모가 아이를 안고 도망쳐 숨어 고생스럽게 길렀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궁예가 태어났을 때 그 아버지가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헌안왕은 죽을 때까지도 아들이 없었다고 스스로 말했음을 알 수 있어, 궁예는 헌안왕의 아들이 아니라 경문왕의 아들일 가능성이 많다 하겠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경문왕이 헌안왕의 맏딸과 혼인한 해는 헌안왕 4년인 860년이었고, 둘째 딸을 둘째 왕비로 맞아들인 해는 863년이었다.
  그렇다면 경문왕은 또 하나의 후궁을 그 후에 맞아들여 궁예를 낳았을 것인데, 이때 헌안왕의 두 딸 즉 경문왕의 두 왕비들은 후궁이 아들을 낳은 것에 대하여 불안을 느끼고 일관을 동원하여 좋지 않은 징조라 하여 궁예를 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궁예의 출생 년도는 865년경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어릴 적 궁궐에서 나와 신분을 숨기고 고생스럽게 살아야만 했고, 후일 성장한 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신라에 반대하는 반란군에 가담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따라서 그가 865년경 태어났다면 대순 2년인 진성여왕 5년 즉 891년에 그가 처음 죽주의 반란군 기훤을 찾아갔을 때의 나이는 27세 정도였고, 철원에 도읍하고 왕위에 올랐다가 송악군에 도읍을 정한 해인 효공왕 2년 즉 898년에 그의 나이는 34세쯤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
  고려 태조 왕건의 출생년도가 신라 헌강왕 3년인 877년이므로 궁예가 왕건보다 12세 정도 나이가 많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궁예는 폭정을 일삼다가 결국 918년에 이르러 부하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반정을 일으킴으로 해서 한 때 욱일 승천하던 궁예의 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고려가 건국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우리는 궁예가 한반도의 철원지방을 중심으로 나라를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여 강원도 철원 부근에서 그 흔적을 찾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그 부근에서 궁예의 태봉국에 관한 확실한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 고려사지리지의 "궁예궁전의 옛 터가 동주 북쪽 27리 풍천벌에 있으며, 지금 그 성의 둘레는 14,421척(약 3.3km)이요, 내성의 둘레는 1,905척(약 0.4km)인데, 반쯤 무너져 있으며, 궁전 터가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 있다" 라는 기록을 보고 한반도 철원부근의 비무장지대 풍천원에서 어느 이름 모를 옛 토성터와 석등(궁예석등이라 이름 붙였다)을 찾아 태봉국 도성일 것이라 추정하고 역사를 해석하려 하는 것으로 생각되나, 지금 철원 풍천원에 있는 토성 중 외성의 길이는 12.5km, 내성은 7.7km, 궁성의 성벽은 1.8km라 하므로 고려사지리지의 기록보다 훨씬 크고, 실제 그곳에서 태봉국 임을 밝혀줄 단서가 될 만한 명문이나 유물은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궁예왕이 나라를 세웠다는 옛 철원을 지금의 한반도 철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그곳에 토성터와 석등이 있고, 궁예왕이 불교에 심취했던 사람이었으므로 지금 풍천원 일대가 태봉국이 도읍했던 곳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궁예가 국호도 마진 또는 태봉이라 하면서 철원성에 도읍했다 하고, 궁궐도 짓고 누각도 지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원에서 당시의 주춧돌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야 궁예의 나라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필자가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이는 신라의 위치와 관련이 있고, 후백제, 고려의 위치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는데, 신라는 사실 한반도에서 건국된 것이 아니라 옛 전한 낙랑동부도위에 가까운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錦州) 부근에서 건국되었고, 그곳이 바로 신라 천년 도읍 서라벌(금성)이었다.
  따라서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반란을 일으킨 죽주의 기훤, 북원(현 객라심좌익 부근)의 양길, 무진주(현 영하 부근)의 견훤, 철원(현 승덕시 평천부근)의 궁예 등의 반란 세력들 역시 신라의 도읍인 금성(현 요녕성 금주시 부근)을 중심으로 한 그 부근에서 세력을 다투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이 모든 세력들이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어 한반도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해야 하는 중대한 사안으로서 우리의 옛 역사를 모두 새로 써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이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한반도의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곳이 옛날 왕검성이었고, 전한 낙랑군의 치소였다. 
  그리고 고려의 도읍 개경은 한반도의 개성이 아니라 하북성 승덕시의 관성현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궁예왕이 도읍했던 철원 역시 그 부근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인데, 지금의 하북성 평천(平泉)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곳이 바로 궁예왕이 도읍했던 철원성이었다.
  한반도 땅이 아닌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평천부근이 바로 궁예왕이  도읍했던 철원성이었는데, 우리가 그를 알지 못하고 삼국사기 기록을 한반도에 비정하여 해석함으로써 강원도 철원이 궁예왕이 도읍했던 곳이라고 믿고 그곳을 뒤지고 있었으니 철원에서 궁예왕이 살았던 궁궐의 초석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가 지금까지 서울에서 백제의 도읍 한성을 찾았으나 그를 찾을 수 없었던 것도 백제가 서울에 도읍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철원에서 확실한 궁예왕의 도성 철원성을 찾을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궁예왕의 태봉국은 한반도에 없었다.

  궁예왕의 태봉국은 지금 만리장성이 시작된 산해관 북쪽  중국 하북성 평천부근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