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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민족은 첩의 자식의 후손들인가?

윤여동 2008. 11. 10. 00:13

윤여동설 - 한민족은 첩의 자식의 후손들인가?

 

 
 

삼국유사 고조선(왕검조선) 조를 보면,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경에는 무엽산이라 했고, 또는 백악이라고도 하는데 백주에 있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하는데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했는데, 고(요임금)와 같은 시대였다"고 하였고,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함이다]의 서자(庶子) 환웅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탐내고 있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해줄 만한 곳이었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 세 개를 환웅에게 주어 (그곳으로 내려보내)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꼭대기[太伯山頂 태백은 곧 지금의 묘향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주곡, 주명, 주병, 주형, 주선악과 모든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이때 호랑이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신웅(神熊: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빌었다. 그리하여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했다.
  이에 곰과 호랑이가 그것을 받아서 먹었다.
  삼칠일 동안 조심했더니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고, 호랑이는 잘못하여 사람의 몸으로 변하지 못했다.
  웅녀는 혼인할 사람이 없으므로 날마다 단수(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축원하였다. 이에 웅(환웅)이 잠깐 사람으로 변하여 혼인하였더니 곧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불렀다.
  (단군왕검은) 당고(당요) 즉위 50년 경인[당요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사실이 아닐 것이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고 조선(朝鮮)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궁홀산[일명 방홀산이라고도 한다]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했다. 그 나라는 1,500년 간 존속했다.
  주 호왕(무왕) 즉위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다. 1,908세까지 살았다.
  당나라 배구전에 이르기를, "고려(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지금의 해주]이다. 주나라에서 기자를 봉함으로써 조선이라 했다. 한나라에서는 세 군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는데, 이른 바 현토·낙랑·대방이다."라고 했고, 통전 역시 이 설과 같다. [한서에는 진임낙현(진번임둔낙랑현토]이라 했는데, 지금은 세 군이라 하고 이름 또한 같지 않으니 어찌된 일일까?)』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글은 일연의 삼국유사 기이 제1 고조선(왕검조선) 조의 전문인데, 환웅의 강림설화, 단군왕검 탄생설화, 왕검조선의 건국과 멸망 그리고 기자조선과 그 이후 한사군설치까지의 변화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글의 내용이 신화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 많아 이해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각도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그러다보니 환웅이 그 아버지인 환인으로부터 받았다는 천부인 세 개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 한민족이 곰의 자손이란 말이냐, 사람이 1,908세까지 살았다니 뻥이 너무 심하다, 기자조선이 과연 실재했던 나라였느냐는 둥 온갖 논란이 끊이지 않게 되었고, 이는 불교 승려인 일연이 불교 포교를 위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위서』와 『고기』를 들먹거리며 우리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신화화했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까지 나타나게 되었으며, 삼국유사 기록의 가치를 폄훼하게 만드는 결과도 낳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삼국유사는 우리의 역사를 한층 풍요롭게 만들어준 고마운 책임에 틀림없다. 물론 삼국유사 속에는 일연이 착각한 부분도 있고, 오기도 눈에 띄기는 하지만 있지도 않은 사실을 억지로 꾸며서 기록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은 한 군데도 눈에 띄지 않는다. 기록자체는 역사적 사실로 보여지는데, 다만 해석상의 차이로 여러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판단된다.  
         
한민족은 첩의 자식의 후손들인가?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함이다)의 서자(庶子) 환웅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탐내고 있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해줄 만한 곳이었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 세 개를 환웅에게 주어 (그곳으로 내려보내)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꼭대기(太伯山頂 태백은 곧 지금의 묘향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주곡, 주명, 주병, 주형, 주선악과 모든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위 글 중에 가장 먼저 논란이 되는 곳은 "서자(庶子)"라는 의미이다.
  서자라는 의미가 현대와 같이 첩의 자식을 말하는 것이라면 한민족은 정실소생이 아닌 곧 첩의 자식의 후예라는 말이 되므로 한민족으로서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이 "서자(庶子)"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을 하게 되었고,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서자라는 의미는 첩의 자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둘째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조선시대에 한성서윤(漢城庶尹)이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이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부시장과 같은 직책이다.
  여기에서의 "서윤(庶尹)"은 한성부의 최고책임자인 한성부윤의 바로 이래 직책인 한성부의 두 번째 관리라는 의미인 것이다.
  요즈음에는 장관 차관이라 하고, 장자, 차자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둘째라는 의미로서 "서(庶)" 자를 사용했던 것인데, 언젠가부터 적서를 엄격하게 구분하게 되면서 서(庶)라는 의미가 좋지 않자 그 이후에는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환웅이 환인의 서자 즉 둘째 아들이라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해지게 된다.  
     아주 먼 옛날 환인국이 있었다. 
  환인국의 왕에게는 여러 왕자들이 있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이 환웅이었는데, 명석하고 리더쉽도 있었으며 꿈도 큰 아들이었다. 그런데 이때 환인국에서는 장자가 왕위를 잇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둘째 아들인 환웅은 왕위에 오를 수가 없는 몸이었다.
  그렇지만 환웅은 왕위에 오르는 꿈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려면 환인국을 떠나 멀리 떨어진 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리하여 환웅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차근차근 준비했고, 환인국을 떠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 환인 역시 환웅이 둘째아들이기 때문에 왕위를 물려 줄 수는 없지만 명석하고 꿈이 큰 아들이라는 것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환웅을 그대로 국내에 머무르게 할 경우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환인은 적당한 시기가 되었을 때에 둘째 아들 환웅을 불러 신임표와 함께 산 넘어 삼위태백 부근의 땅을 나누어주고 따르는 백성을 이끌고 그곳으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하게 된다. 
  그러자 환웅은 자신을 따르는 3천의 무리를 이끌고 삼위태백으로 가서 신시(神市)에 도읍하고 새로운 나라 환웅국을 건국하게 되었고 왕위에 올랐으며 주변국을 통합해 강역을 넓혀갔다

 

  라고 이해한다면 해석에 아무 무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환웅은 첩의 자식이 아니라 환인의 둘째 아들이었던 것이다.